'용감한 녀석들'의 박성광, 어떻게 돌아올 것인가?

주인공 없는 무대는 ‘대체 가능’한가

검토 완료

김민관(minkwan)등록 2012.11.23 10:48
이례적인 일

개그콘서트의 '용감한 녀석들'이란 코너에 출연 중이었던 코미디언 박성광은 지난 10월 21일 방송분에서 가장 위험한 내기를 코너 말미에 걸었다. 개그콘서트의 이승건 PD와 자신의 외모 투표 결과를 통해 코너를 하차한다는 것. 다음 주 10월 28일 방송분에서 발표된 결과는 박성광의 표가 상당히 못 미치는 다소 싱거운 결과, 11월 4일 방송분, 현재 '용감한 녀석들'은 박성광은 무대에는 오르지 못하고 관객석의 자리에서 관람하는 형태로 진행 중이다.

흔적은 어떻게 존재의 자리를 메우는가?

<개그콘서트>, '용감한 녀석들' 10월 28일 방송분 캡처 ⓒ KBS


어떤 한 코너에서 주요 캐릭터가 빠지는 경우는 특별한 일이 없고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곧 코너의 내용상의 측면이 아닌 코너 외적인 사건이 있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그 사건이란 코너에 활약하던 코미디언이 그의 일상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키거나 하는 등의 경우를 가리킨다. 그렇지 않은 경우 개그콘서트에서 이 코너의 지속 기간 동안, 그리고 스스로 코너의 종언을 알리며 작별인사를 하기 전까지는 캐릭터의 생명은 자연 유지됐다.

박성광의 공약은 그러한 너무도 당연한 법칙에 은연중에 기댄 공약이었다. 동시에 소위 '리얼'이라는 명목 아래 더 큰 자극의 강도를 요구하는 코너의 특성에 따른 하나의 도발이었다. 이는 코너가 끝나지 않고 캐릭터는 끝날 수 있는가의 '코너와 캐릭터의 떼려야 뗄 수 없었던 경계'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이는 쉽게 말해 영화상에서 주인공이 중간에 죽는 게 과연 가능해라는 물음과도 상응한다.

물론 '용감한 녀석들'이라는 이름만큼 다른 멤버들이 그의 역할을 해낸다. 더군다나 세 명 뒤에 코너 초반에 잠깐 재현 상황을 연출하던 양선일의 존재감이 박성광이 빠진 다음 주 직후에 그의 자리를 대신하는가 하면, 지난주에는 게스트 김장훈이 나와 그의 무대를 대신했다.

현재 박성광은 코너에서 부재의 자리로 존재한다. 방청객 속 그의 등장은 꽤 묘한데, 곧 그는 떠났지만 그는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한 채 어슬렁거리는 형국이고, 그의 떠남의 순간은 각인된 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우리 곁에 누군가의 죽음이 반드시 부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진정한 부재는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 곧 망각에서 비롯된다.

이제 한 명의 시청자인 동시에 무대 위에서의 마이크 역시 할당되지 않아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박성광의 자리는 양선일이 대신하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선명하게 확인된다.

'인터액티브적 스토리텔링', 개그콘서트의 독특한 특징

<개그콘서트>, '용감한 녀석들' 10월 28일 방송분 캡처 ⓒ KBS


개그콘서트에서 특정 코너가 막을 내리더라도 개그콘서트는 그 상위의 범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코너를 아무렇지 않게 등장시킨다.

개그콘서트 자체가 여러 다양한 성격의 코너를 품는다면 그리고 개그콘서트를 다시 KBS라는 방송사가 품고 있다면 제작에 관여하는 PD가 코너가 아닌 프로그램을 떠나는 것은 박성광이 하나의 코너를 떠나는 것보다 더 큰 사안임에 틀림없다. 동시에 박성광은 부재의 존재로 남아 있더라도 PD의 경우는 어떤 자국도 남기지 못하게 된다. 시청자에게는 가시적인 결과가 제시되지 않으므로 결과는 어떤 의미를 얻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박성광의 내기는 <개그콘서트>라는 프로그램 전체의 경계선상에서의 불가능성을 건 내기였던 것이므로, 박성광의 패는 예상외의 결과라고만은 볼 수 없다.

하지만 박성광이 패하더라도 박성광 역시 완전히 막 바로 이 코너를 떠날 수 없다. 곧 내기가 진행됐을 때 벌어질, '이미 누구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그 떠남 자체가 이후 결과 속에서 다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기에는 내기의 결과의 확인까지가 필요하다. 또한 내기에는 내기 이후의 조처까지가 확인되어야 한다. 내기는 일견 법적 효력만을 가지는 듯 보이지만, 내기는 무모하고도 유희적인 놀이의 성격을 애초에 띠고 있다. 더군다나 이는 대국민적 참여를 유도한 내기였다.

어쨌거나 박성광의 말이 그대로 다음 회의 코너에 반영되고 또 그가 여전히 방청객을 비치며 카메라에 의해 무대에서의 그의 동료들과 객석에서 방청객으로 남아 있던 그의 장면이 편집에 의해 꾀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개그콘서트>, '네가지' 방송분 캡처 ⓒ KBS


여기에는 개그콘서트가 현재 보이는 인터액티브적 스토리텔링이 진행되는 흐름과 연관을 맺는다. 가령 얼마 전 허경환의 난쟁이 발언이 강원래의 트위터에서의 비판이 따랐고, 다시 허경환이 트위터 상에서 사과를 하며 일단락된 사건이 있었듯이 코너에서의 말은 현장의 관객을 비롯해 대국민에게 하는 약속이 되는 '수행적 발화(performative utterance, 계약이나 선언 등에서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행위를 수반하는 실제 효과를 가져오게 되는 말)'의 양상을 띠는데, 이 사건의 경우는 코너의 일이 코너 바깥에서 연장되고 다시 코너로 전이되는 경우를 보여주는 것이다.

허경환은 난쟁이 발언에 대한 사과를 코너에서 직접 하는 것까지는 않았지만 그것에 조금 더 조심하겠다는 코너 바깥에서의 허경환의 마인드는 코너에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치게 됐음은 분명한 일이다.

곧 여기서 허경환이 얼마만큼 잘못을 했느냐의 문제를 논하는 게 아니라, 허경환은 사실 잘못이 없더라도, 허경환의 발언이 대국민 모두에게 보내는 하나의 전언이라는 전제가 깔렸기 때문에, 오히려 특정인에 대한 불만 역시 무시할 수 없이 겸허한 자세로 수용하는 것 자체가 필요하게 된다는 점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그래서 허경환의 트위터에서 발언은 잘못했다는 사과의 위축됨보다는 조심하겠다는 긍정의 자세로 드러난다.

이러한 '네가지'의 스토리텔링은 일종의 대국민을 상대로 한 담화이자 무대를 실제로 확장한 현재 진행형의 발화이자 코너의 현재 시간을 넘어서 다음 회에 만나기 전까지 있었던 시간까지를 포함하는 시간을 가져가게 된다.

현재 개그콘서트가 전국민적 파급력을 가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개방된 형태의 관객과의 일종의 대화로서 인터액티브적인 서사 장치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코너 별로 다른 지점들이 있지만 허경환의 '네가지'나 '용감한 형제들'은 그 최전선에 있는 코너이다. 이는 단지 코너 자체가 어떤 내용이나 형식을 갖출 것이냐의 층위와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이 이야기 방식 자체가 하나의 매체이자 내용이 되는 것이다.

박성광의 코너 복귀의 가능성은?

<개그콘서트>, '용감한 녀석들' 10월 28일 방송분 캡처 ⓒ KBS


박성광의 자리에 김장훈이 나온 것은 또 꽤 복잡한 실제적 맥락이 덧붙여지는 것을 느끼게 했다. 독도 전도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회적 활동을 몸소 실천해 온 김장훈이 박성광의 코너 복귀를 촉구한 것, 이는 이 코너의 형식 안에서였지만 코너 자체에서의 구조적 목소리가 아닌 외부의 목소리를 덧댄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측면은 단순히 '생활의 발견'이 보이는 패턴과 같이 게스트를 훈련시켜 유사한 역할을 대물림하는 것과는 다른 측면이었다.

얼마 전 불화를 겪던 김장훈과 싸이가 극적으로 화해하며 훈훈한 광경을 낳았듯, 마치 실제적인 측면에서 김장훈이 무대 난입의 측면을 일종의 자가-패러디적 측면에서 코너 상에 끌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사실상 김장훈의 화해의 제스처는 리얼이었지만, 일종의 퍼포먼스이기도 했다(퍼포먼스라는 개념이 예술의 영역에 한정되거나 실제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다시 말하면 김장훈의 화해는 가장 감동적이고 효과적인 '리얼한 퍼포먼스'였던 것이다.

<개그콘서트>, '용감한 녀석들' 10월 28일 방송분 캡처 ⓒ KBS


앞으로 코너의 경계를 넘는 발언을 한 박성광은 외부의 목소리에 의해 코너 위의 새로운 규칙이 부여되고 다른 식으로 무대에 등장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일단 부재의 자리로써 떠남 의 자리 내지는 망각의 자리를 메우고 있는 박성광은 '용감한 녀석들'을 떠났으니 '용감한 녀석들' 시즌 투를 살짝 붙여 새로운 코너로 돌아왔다거나 하는 꼼수가 등장하는 가운데 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코너 자체의 전환, 코너 자체를 새로 짜는 것이라 봐야겠다.

또는 떠난다고 했으니까 그것을 이미 실천했고, '영원히' 떠난다고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등등의 이유를 붙여 그는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천으로서의 말은 지켜져야 하지만 언제나 말은 일종의 구멍이 있어 그 말을 부정할 다른 여지들을 남긴다.

만약 이승건 PD와 박성광이 재투표를 통해 시청자들이 박성광의 손을 들어준다면, 그리고 돌아온다면, 이 재투표의 재재투표는 계속 순환론적으로 반복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이는 마치 박성광이 서수민 PD와 끝없는 다툼을 코너의 경계선상에서, 무대와 무대 바깥의 경계선상에서 펼쳐냈던 것처럼 이 내기로 또 다른 코너의 원동력의 축을 얻어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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