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가 토론회를 기피하는 이유는?

식견과 판단력 부족 의심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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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준(kimhj)등록 2012.11.05 16:05
  공중파 방송 3사가 추진했던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쪽의 거부로 모두 무산됐다. 때문에 공식 선거운동 이전의 텔레비전 토론회는 사실상 기대할 수 없게 됐다. 후보 자질을 검증하고 국민 판단을 도울 TV 토론회가 전무하다시피 한 현상은 1997년 15대 대선 당시 TV 토론회가 도입된 이후 처음이다. 박 후보 측은 절차상의 문제 등을 들어 TV 토론회를 기피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박근혜의 식견 부족으로 인한 토론 기피증과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날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 "박근혜가 얘기하는 것은 100단어 이내"라는 말이 있었다.사람이 신중해서 그렇다는 얘기도 있지만, "언어 구사력이 제한돼 있고 논점 파악 능력이 떨어진다."는 분석이 정확할 듯하다. 최근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박 후보의 발언은 이러한 면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인혁당 사건에는 두 개의 판결이 있다."고 말해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원심과 재심의 차이를 모르는 데서 나온 실언이었다. 사회과목을 공부한 고등학생 정도면 알 수 있는 법체계를 일국의 대통령 후보가 잘 모르고 자기 방어에 활용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박 후보는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해서도 "유족 측에서 강압에 의해 주식을 강탈당했다고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강압사실을 인정하지 않아 패소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강압에 의해 주식을 증여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재산반환 청구소송 소멸시효가 만료돼 원고 패소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 문제는 수십년을 끌어온 문제이기 때문에 박 후보가 판결문을 읽어보았을 개연성이 높다. 그런데도 판결문 취지와 배치되는 말을 하는 것은 인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뜻을 둔 뒤부터는 전문가들로터 지도를 많이 받고 있다지만, 식견이나 통찰력은 단기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 후보가 된 뒤에도 무지에서 비롯된 실언을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박 후보를 두고 "아주 칠푼이"라고 한 것도 저급한 인신공격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박 후보는 판단의 잣대가 자기중심적이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최태민 목사의 예를 들어보겠다. 최 목사는 10·26 이후 상실감에 빠져 있는 박근혜에게 접근해 친분을 맺은 뒤 각종 부정을 저질렀다. 박근혜의 후원으로 구국봉사단을 설립한 뒤 이권에 개입하고 정관계 인사에 관여해 거액의 금품을 수수한 사실이 여러 경로를 통해 밝혀졌다. 심지어 중앙정보부가 조사한 자료에는 44건의 비리가 적시돼 있다. 때문에 최태민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불려가 직접 심문을 받았고, 10·26 이후에는 전두환 합수부장에 의해 삼청교육대로 보내졌다.
최태민은 '영생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교주로도 활동하고 이름을 7개나 가졌으며, 결혼도 6차례 한 희대의 사기꾼이었다. 그런 최태민이 또다시 1982년부터 1990년까지 육영재단 고문을 맡으면서 박근혜와 밀착되자 박근령·박지만씨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서 "최 목사로부터 언니를 구출해 달라."는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박 후보가 최태민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한번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발언을 보면 오히려 세상이 최태민에게 누명을 씌우고 있다는 뉘앙스를 준다. 일개 사이비목사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아직까지도 그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판단력이 없는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를 상상하면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박 후보가 1974년 육영수 여사 사망 후 퍼스트레이드를 할 당시의 부실한 역할도 자질을 의심케 한다.
비록 그녀의 역할이 의전 등에 한정돼 있었고 또 정책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퍼스트레이디라는 존재는 결코 가볍지 않다. 더구나 그녀는 박 전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자식이어서 직ㆍ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박 후보가 당시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가능한 노력을 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박 후보는 '청와대 내의 야당'으로 통했던 육 여사만큼도 세상과 국민의 여론을 아버지에게 전해주지 못했다. 그 당시 나이로선 대학을 졸업한지 오래되지 않아 사회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녀는 이미 판단력을 상실한 아버지를 일깨워주지 못했고, 그것은 결국 10ㆍ26사태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물론 박 대표가 상황 변화를 위해 노력했다 하더라도 박 전 대통령과 측근 인물들의 성향으로 보아 성과는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가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국민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사실은 원죄로 작용할 것이며, 나아가 자질론으로 비화될 수 있다. 스스로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책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박 후보가 오래된 당시 상황에서 아직까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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