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무섭다

[사소한 과학이야기] 돈벌레와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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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혜진(sweetshim)등록 2012.08.29 14:16
곤하게 자고 있었다. 종아리 쪽에 뭔가 와 닿는 느낌. 손을 갔다 댔는데, 순간, 빠르게 지나갔다. 머리맡에 놓인 전등을 켰다. 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며 한동안 앉아 있었다. 짐작 가는 녀석이 있었다. 요놈을 잡고 자야 맘이 편하겠지만 너무 피곤했다.

대신, 이불을 발가락부터 머리끝까지 완벽하게 덮고 다시 잠을 청했다. 파리채도 가까이에 챙겨두었다. 두 시간 후, 눈이 떠졌다. 녀석이 발쪽 이불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발이 많이 달린 '돈벌레', 정식 명칭은 '그리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습기 많은 여름에 한두 마리씩 나타나, 깜짝 놀라게 했다. 다음 날, 출근 하자마자 '돈벌레 퇴치'에 관해 알아보았다. 특별한 퇴치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는 절망했지만, 대체로 사람을 물지 않고 다른 벌레를 잡아먹는 익충에 가깝다는 위키백과사전의 글을 보고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시골에서 자란 터라 웬만한 벌레는 상관을 안 하는데 이 녀석은 생김새부터가 적응이 되지 않는다. 돈벌레 이외에 경기(驚氣)를 할 만큼 무서워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뱀이다. 텔레비전이나 책에 뱀, 아니 뱀처럼 보이는 것만 나와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다.

최근 '책 읽는 부평, 행복한 북펀' 선정도서인 '거북이는 왜 달리기 경주를 했을까'를 보면서도 그랬다. 책장을 빠르게 넘겨보고 있었는데, 한 장의 사진에서 눈길이 멈췄다.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것이 코브라 얼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나도 모르게 책을 책상 위에 내동댕이쳐버렸다.

뱀한테 물리면 죽을 수도 있으니 겁을 내는 게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하지만 내 손가락보다 작은 돈벌레를 보고도 공포를 느끼는 건 어쩐지 좀 이상하다.

위의 책에는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은, 현대인의 생존에 해가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과거 수백만 년 전에 수렵ㆍ채집 생활을 한 조상들에게 해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그 옛날엔 뱀을 만나면 즉각적인 공포를 느끼고 도망가는 것이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됐다. 이것이 현대인에게까지 전해졌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 직속 조상님은 돈벌레와 비슷하게 생긴 독벌레나 뱀에게 물려 세상을 떴는지도 모른다.

공포가 심해진 상태를 공포증이라 한다. 공포증의 특징은 평소 겁이 많은 것과는 상관없이, 특정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서만 공포를 느낀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동물이나 곤충, 높은 장소나 물, 피를 보거나 주사를 맞는 일 등, 사람에 따라 공포를 일으키는 종류는 다양하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공포를 방어기제 중 하나인 '전치(轉置)'의 결과라고 본다.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콧 펙은 '거짓의 사람들'이란 책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정상적인 공포나 혐오감이 전혀 다른 대상에게로 대치될 때 발생하는 것이 공포증이다. 사람들에게는 애초의 공포나 혐오감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전치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한다"라고 했다.

이 말을 내게 적용해보면, 어떤 대상에 대해 느껴지는 정상적인 공포와 혐오감을, 어떤 이유로든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대상을 뱀과 돈벌레로 바꿔버렸다. 그러고 보면, 원시시대의 생존법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은, 우리가 필요에 의해 그 대상을 여전히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진짜 두려워하고 있는 그 대상은 무엇일까? 내 공포와 혐오감을 대신 뒤집어쓰고 있는 뱀과 돈벌레가 (아주 잠깐이지만) 조금 측은해진다.

유투브(Youtube)에서 본 법륜스님의 강의 내용이 떠오른다. "돼지를 욕심으로, 뱀을 독한 것으로 보는데, 이것은 망상과 환영의 이미지다. 이것을 걷어내면 하나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언제쯤 뱀을 뱀으로, 돈벌레를 돈벌레로 볼 수 있을까? 당장 수행길에 오를 수도, 정신분석을 받을 수도 없는 일이니, 우선은 이 덥고 습한 여름이 어서 지나기를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주)부평신문사(http"//bpnews.kr)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주)부평신문사(http"//bpnews.kr)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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