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위 민들레 같은 삶을 사는 복지운동가, 에덴복지재단 정덕환이사장

110여명 식구를 둔 에덴복지재단의 아버지, 정덕환 이사장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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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정(khj3844)등록 2012.07.19 14:35
에덴복지재단의 정덕환 이사장과의 인터뷰를 위해 파주에 위치한 에덴복지재단을 방문했다. 그 날 정덕환 이사장은 서울에서 지인과 점심 약속이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타난 정 이사장은 지친 모습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점심식사를 위해 무려 3번이나 식당을 옮겨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1급 장애인인 그에게는 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식당을 출입하기 위한 여건은 장애 1급인 그에게 너무나 높은 관문이다. 계단이 줄지어 있고, 문턱이 쉼 없이 놓여 있다. 휠체어에 의지하는 정 이사장은 외부에 나갈 때면 늘 그렇게 출입가능한 식당을 찾아 헤맨다.

인터뷰 동안 정덕환 이사장은 몸을 잘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얼굴에 쉼 없이 미소를 띠고 있었으며, 아주 건강해 보였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 모든 것이 그가 그동안 대한민국 사회를 위해, 복지를 위해, 무엇보다 소외된 장애인들을 위해 온전치 못한 몸으로 모두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끌어안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를 위해 민족운동을 벌인 분들을 독립운동가라 부르듯, 복지를 위해 평생을 달려온 정덕환 이사장을 나는 복지운동가라 부르고 싶다. 화려했던 유도선수 시절부터 고단한 역경의 시간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지운동가 정덕환'의 아프지만 아름다운 인생 얘기를 전한다.



장애인 복지 패러다임의 전환 '생산적 복지' 실현

'사회복지법인 에덴복지재단'은 장애인 복지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다. 장애인이 사회로부터 무언가를 받기만 하는 시혜적 복지가 아닌 직접 일해서 얻어낸다는 '생산적 복지'는 1983년 시작부터 지금까지 정덕환 원장이 내세운 변함없는 에덴의 기치다. 에덴이 '직업재활'이란 단어를 얻어내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지금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노동착취는 물론 일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수많은 장애인들의 한(恨)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맞바꿔주었다는 것, 그리고 삶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줬다는 것이다.

과거 자신이 직접 경험한 아픔을 통해서 장애인 복지를 현장에서 실현하는 사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보듬어 아픔을 타개시켜 준 사람,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의 한계를 장애인들과 함께 극복해 나간 사람이 바로 정덕환 이사장이다.

정 이사장은 지난 2009년 8월, 한국장애인직업재활시설협회 회장으로 취임했지만 자신의 이·취임식 보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들을 위하는 일이라며 장애인 전진대회 날을 선포하겠다고 결심했다. 이를 토대로 장애인 직업재활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 이사장은 직접 '장애인 직업재활의 날'을 만들었다. 행사는 매년 10월 30일에 열리는데 날짜에 담긴 의미 하나하나에도 장애인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배어 있다. '1030' 이란 1(일) 0(zero) 3(삶) 0(zero), 즉 '일이 없으면, 삶도 없다'(No Work, No Life)는 의미이다. 이렇게 '1030 비전선포'를 통해 정덕환 회장은 보건복지부와 함께 장애인 일자리 창출 및 직업재활시설의 확충을 촉구하고, 10월 30일을 '직업재활의 날'로 선포해 그 뜻을 올해로 3회째 이어오고 있다.

"장애인들에게 일자리 창출을 해주는 것, 직업재활이야말로 진정한 재활의 꽃입니다. 장애인에게는 일할 수 있는 기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복지'라 할 수 있어요. 경증 장애인 몇 명을 고용하는 것보다 중증장애인 한 명을 고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말하는 정덕환 이사장에게서 아스팔트 위 민들레 같은, 한 번 살아서 꽃피는 일이 새까만 아스팔트 위일지라도 톱니 이파리로 희망을 움켜쥐고 있는, 주위를 아름답게 하는 모습을 본다.

대한유도회도, 학교도 아무도 지켜주지 않은 외로운 유도대표선수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유도를 배우기 시작해 성남고등학교 3학년 때 이미 전국대회를 재패하고 최연소 국가대표 유도선수로 선발될 만큼 유도 계에서는 유망한 선수가 있었다. 연세대와 군복무(육군)를 거치면서 전국 대학선수권과 국제 군인 유도선수권 대회 최종선발 우승 등을 기록하며 명실 공히 한국 유도의 일인자로 굳게 자리 잡은 선수. 그 선수가 바로 정덕환 이사장이다.

하지만 그의 유도대표선수로서의 운명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1972년 8월 그의 나이 27세. 성균관대학교 내에 위치한 명륜도장에서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 날의 연습상대는 대학 유도의 양대 간판으로 막역한 친구이자 선의의 경쟁 상대였다. 연습시합 중 그는 경추 4,5번 골절상과 골절된 경추에 의한 횡격막 손상으로 1급 장애인이 됐다. 평범한 사람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왕성한 육체적 활동을 했던 운동선수가 혼자서는 화장실도 못가는 전신마비 1급 장애인이라니…. 선수는 13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윗선에서는 "대한유도회가 책임져야지! 학교 책임이지!"하며 서로 책임을 떠밀기에 바빴다. 병원에서 13개월 투병 중 그는 강제퇴원을 당한다. 당시 원무 과장은 "평생 치료권을 주겠다"며 언제든 와서 치료를 받으라고 했지만 다시 그가 병원으로 돌아갔을 때 "더 이상 치료해 줄 수 없다"는 얘길 듣는다. 그렇게 대한유도회도, 학교도 아무도 그를 지켜주지 않았고 그는 보호받지 못한 채 혼자 아픔의 시간을 보냈다.



제 2의 도약 꿈꿨지만 또 한 번의 좌절, 그리고 새로운 길


방황의 시간을 보내던 중 그는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캐나다 선교사인 구애련 씨 등으로부터의 선교 활동과 보장구 지원으로 삶의 의욕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는 유도대표선수의 꿈은 잃었지만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을 보며 다시 제2의 꿈을 키운다. 올림픽 당시 직속 후배들이 메달을 획득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싶다"는 의지를 갖게 된 것이다. 선교사들은 그의 용기에 코치의 길은 당연한 일이라며 도와주겠다고 응원했다. 그래서 그는 선수를 평소 잘 따르던 후배들과 코치를 향한 의지를 알릴 만발의 준비를 하고 모교를 찾아가지만 학교 측에서는 찬바람이 불어왔고 애물단지 취급을 당했다. 현실적인 벽에 그는 또 한 번 슬픔과 좌절의 시기를 겪었다. 그렇게 모교로부터 코치로서의 길을 거절을 당하고 교정을 내려오면서 '곳곳에 있는 많은 장애인들이 이러한 슬픔과 아픔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와 같은 이 땅의 많은 장애인들과 더불어 살아가야겠다'고 굳게 마음먹게 됐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오랜 병상생활 끝에 신앙을 갖게 됐고 그 후 자신의 의지로 1979년 구로동에서 '이화식품' 가게를 시작으로 자립기반을 다져가게 된다. 코치로서의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지금의 에덴을 있게 한 시작이 된 것이다.

생활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1983년 이화식품으로 모은 500만원을 가지고 구로구 독산동에 2~3평 되는 작은방을 얻어 5명의 중증장애인들과 함께 전자부품 조립 작업을 하는 '에덴복지원'을 설립했다. 그러나 1985년에는 건물주의 부도로 거리에 쫓겨나야 했고, 개봉동 작업시설이 세 차례 강제 경매절차에 들어가는 등 고난과 시련은 계속 됐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만은 아니었다. 중증장애인들과 함께 직업적 길을 걷겠다는 그의 집념 앞에 사람들은 '정신지체는 반복적 훈련밖엔 안 된다.'는 말을 했고, 그 말은 그를 울컥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이야말로 내가 또 해내고야 말겠다'는, 다시 한 번 그를 단단하게 만드는 또 다른 계기를 마련 해 준다.



1990년 '사회법인시설' 획득부터 2010년 다수고용사업장까지

에덴복지원은 1987년에 이르러 에덴하우스로 바꾸게 됐고, 장애인 원생도 80~1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모두 넉넉한 봉투를 받아갈 수는 없었지만 일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동참할 수 있다는 희망만은 접지 않았다. 그 결과 1990년에는 '사회법인시설'을 획득했고, 장애인 직업재활의 글로벌화를 위해 1998년에 지금의 에덴복지재단이 위치한 경기도 파주로 시설을 확장 이전했다. 중증장애인 110여 명이 함께 일하며 생활하는 이곳은 일하고자 하는 더 많은 소외된 장애인들을 위한 근로시설이자 체계화 된 중증장애인 복지정책을 펼치기 위한 터전으로 자리 잡았다.

에덴복지재단은 2010년에 이르러 또 다른 도약을 위한 '다수고용사업장' 사업을 시작했다. '다수고용사업장'이란 장애인 100명 고용 중에서 중증장애인을 60명 이상 고용해야 하는 사업을 말한다. 이는 중증장애인 보호고용의 확대를 위해 소규모의 장애인직업재활시설 운영형태를 탈피한 새로운 직업재활시설 모델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에덴복지재단은 보건복지부의 선정으로 '형원'이란 이름의 다수고용사업장을 운영 중이다. '형원'은 친환경세제, 음이온발생기, LED 등의 아이템을 가지고 장애인 100명 이상(중증장애인 60% 이상) 고용, 근로 장애인 평균 임금을 최저임금의 70% 이상 지급하는 새로운 직업재활시설로 나아가고 있다.

정덕환 이사장은 장애인들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고 자립할 수 있도록 직업재활 정착을 위한 모든 일에 여생을 맡기고 싶다고 말한다. 특히, 중증장애인 다수고용을 통한 사회적 기업의 토대 마련을 위해 수혜적이고 소비적인 장애인 복지 형태를 생산적이고 사회 기여적인 복지 형태로 전환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장애인 복지정책의 의식변화를 위한 실천적 노력의 연속


정덕환 이사장은 올해 8월 11일 직업재활 사례로 석사 논문을 써서 합격해 총장상을 받았다. 학사에 이어 석사까지 훌륭히 수료한 정 이사장은 자신의 배움과 경험을 토대로 정부에 중증장애인 작업장의 표준모델을 제시하며 노동하는 복지, 생산적인 복지를 지속적으로 건의하고 있다. 정 이사장이 이토록 장애인 복지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유는 '경쟁고용(통합고용)' 이라는 틈새를 찾아 새롭게 복지재단을 만들었지만 현장사례를 통한 하나의 제도, 또는 법이 필요하다는 것에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 때문이다.

복지재단이 우리나라에 400~500개 이상 있다고 해서 복지국가가 아니다. 그 기관이 훈련교육을 위한 곳인지, 일자리를 위한 곳인지 구분을 해야 적절한 지원도 이뤄질 수 있다.

정 이사장은 30여 년 가까지 장애인 복지재단을 운영하기 위해 달려 왔지만 이제는 국가에, 나아가 사회에 이런 문제를 건의하고 논의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라 여긴다. 잣대가 없는 지원은 이중삼중의 지원을 받는 기관을 낳고, 그 이면에는 풀칠도 못하는 기관을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 이사장은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와 사회일각에 관심도를 부각 시키는데 일조하고, 직업재활시설 현장의 실상을 종합해 정책 반영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작은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기도 했다. '장애인 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제정'과 2008년 9월, '중증장애인 생산품 우선구매 특별법'이 제정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1급 장애인인 그에게 '인간승리'라 말하지만 그는 수혜적복지가 생산적복지로 완전히 탈바꿈되지 못하고, 법과 제도가 부족해 복지정책이 주먹구구로 바뀌는 현실을 보면 자신은 아직 승리했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기적인 사회가 아닌 국민서부터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사회구조가 돼야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잘 되려면 개인 이기주의가 아닌, 그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복지관련 법들을 최대한 악용하는 일들이 없어져야 합니다. 지원도 그냥 지원이 아닌 잣대가 있는 지원, 그런 구조적인 변화, 인식적인 변화가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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