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청앞 100만의 추모, 25년전 이한열 장례식

1987년 6월 항쟁의 대비 7월9일 그날을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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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전(gooam77)등록 2012.07.09 13:48
세월은 참으로 잘도 간다. 1987년 6월 항쟁이 시작되던 6월10일 하루 전이던  6월9일 날 연대정문 앞에서 "4.13호헌 철폐" "박종철 열사 살려내라"라고 앞장서 외치던 연대생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직격탄을 맞아 쓰러져 중태에 빠졌다.

중환자실에 후송된 이한열군은 중태로 생명이 위태로웠다. 5월27일 발족한 헌법쟁취국민운동은 6월10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6.10항쟁을 선언하고 5공 전두환 정권과 일전을 불사했다. 전국에서 일어난 항쟁은 시위대는 수십 만 명에 이르렀다.

6월 항쟁의 시발점은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여 3선 개헌을 강행하더니 느닷없는 남북 7.4공동선에 이어 10월 유신을 단행했었다. 박정희는 3선 개헌을 하여 장충단공원 71년 대선유세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했었다.

그동안 벌여놓은 게 많아 이번 한번만 더 집권하여 완수하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박정희는 이번선거에서 이기면 영구집권의 총통제를 구상할 것이라는 예언이 적중하고 있었다. 많은 야당의원이 당선되었는데 국회를 해산하고 유신헌법에다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장기 집권의 길을 갔다.

그리고 유신헌법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은 6년으로 계속 선출할 수 있게 규정했다. 바로 죽을 때까지 통일이 될 때까지 대통령직을 고수하겠다는 야심찬 욕망이었다. 그러니까 유신으로 인해 인권은 유린되고 인혁당사건 같은 사법살인을 강행하는 등 조작을 하여 민주주의가 후퇴되어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 초대 이승만대통령이 3선 개헌으로 영구집권을 꾀하다가 3.15부정선거로 결국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해 욕만의 뜻을 채우지 못했다. 그런데 박정희 역시 권불 10년을 넘긴 18년 6개월 장기독재정권에서 죽을 때까지 대통령직에 있다가 부하인 김재규 부장의 "유신의 심장에 쏜 총"에 유신이 멈추었다.

그런데 10.26이후 신군부는 12.12 군사정변을 일으키더니 1980년 광주 5.18민중항쟁을 불러 피를 보면서 신군부 전두환이 정권을 잡았다. 5공 정권은 그럴듯한 단임제 7년을 정했으나 역시 박정희와 같은 장충체육관 통대회의에서 일방적인 90%지지 대통령을 선출했다. 1987년 정권1년을 남긴 전두환은 정권연장을 획책했다.

그동안의 대통령 제도에 무제점이 있다며 내각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연초에 서울대 박종철 학생을 연행하여 조사를 하던 중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져 죽었다"고 어처구나 없는 발표로 학생들과 국민들이 분노했다. 결국 물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의사의 진단과 고문치사로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전국 학생들과 재야국민들은 "박종철을 살려내라"며 전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그런데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를 고수 하겠다는 발표로 정국은 요동쳤다. 그런데 4.13 호헌조치는 전두환의 "20년 집권시나리오"였다. 말로는 7년 덜도 않고 더도 않는다며 7년 단임을 한 대통령이라 자랑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이미 1865년 미얀마를 방문하여 내윈 장군의 장기 통치를 교훈 삼으려 아까운 인재인 각료들을 16명이나 아웅산 묘지에서 잃고 말았다. 사실 그때 미얀마는 사회주의국가로 수교도 없던 나라였다. 오직 내윈이 현직에서 물러나 실제적인 통치를 하는 현상을 각료에게 보이려 했던 장기집권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의 뜻대로 정국은 흘러가지 않았다. 그해 5.18 광주항쟁 7주년 명동성당 기념미사에서 김승훈 신부는 "1월 박종철 고문치사에 2명 경찰 외에 3명의 주범 경찰"이 있다며 결론은 "박군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이라고 정권의 부도덕을 폭로해 정국은 급랭하였다. 그리고 6월 항쟁은 불길처럼 타 올랐다.

그 가운데 6월10일부터 계속된 명동성당농성투쟁을, 정권은 해방구 선정했다하여 공권력으로 해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당시 온건한 집권세력은 대화를 풀자하여 해결했으나 6월 항쟁은 더욱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수 백 만의 헌법쟁취 5공 정권 타도를 외치며 가두시위는 파출소가 불타고 경찰이 밀려 군이 출동할 태세였다.

그러나 군 출동은 4월 혁명 같은 사태를 유발할 가능성과 88년 올림픽을 개최 할 수 없다는 당위론이 우세하여 결국 국민에 항복하는 선언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6.18일 계엄령선포는 취소되고 6.24 평화대행진이 있은 후에 6.29선언이 노태우 발표로 있었다. 6.29선언 내용은 국민이 바라는 모든 요구를 다 담았다.

국민에 항복한 6.29 선언으로 전국 시위를 멈추게 했고 정부는 국민이 원하는 15년 동안 빼앗긴 대통령을 내손으로 선출하는 유신헌법이전 헌법으로 환원했다. 국민들 모두가 승리한 것이었다. "오늘 같이 좋은날 차는 공짜"라는 찻집도 있었다. 그리고 7.8.9월 그동안 숨죽인 노동자 대 투쟁도 함께했다.

그런데 7월5일 6월9일에 중태에 빠졌던 이한열군이 운명하고 말았다. 5일장으로 7월9일 장례절차를 논의했다. 연세대 운동장에서 발인하고 신촌로타리에서 1차 노제를 지내고 당시 양김도 함께한 추도 행렬은 그 뜨거운 여름날 25년 전 오늘에 시청을 향하여 이한열군의 영령이 운구 되는 영구차 뒤를 따르고 있었다.

서울시청 앞은 이미 100만 명이란 서울시 초유의 추모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시정앞에서 남대문까지 서소문 무교동 을지로 입구 광화문 앞까지 꽉 들어찬 추모인파는  희생된 이한열군을 조용히 보내고 있었다. 시청에 게양되어 있던 태극기도 강제로 조기로 바꾸고 그동안 박정희 이후 군사유신독제를 규탄하고 있었다.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만약 6.29선언이 없었다면 과연 추모민중이 조용할 수가 있었을까? 그러기에 6.29를 속이구로 규정하기도 했다. 만약 양김이 서로 양보해 단일화를 했다면 민주주의는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그리고 참여정부까지 왔지만 엠비정권에서 후퇴한 민주주의였다.

6월 항쟁은 위대한 국민의 승리로 이는 부마 5.18 희생과 박종철 이한열 두 학생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정치는 어떠한가?  엠비정권은 반민주 반평화 반통일의 길로 왔다. 근간 사대주의 발상을 되살리고 미일에 의존하는 한반도를 분단 67년의 아픔도 일제 36년의 슬픔도 잊어버리고 있는 처사다.

그러기에 87년의 유월항쟁 대미를 장식했던 박종철 이한열 두 학생이 희생을 그해 12월 대선에서 이루지 못한 반성을 했으면 한다. 그 어느 해 대선보다 중요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다가가는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진정 간절한 마음에서 25년 전 6월 항쟁과 시청 앞 100만 국민의 소원에 다가가는 마음이고 싶다
첨부파일
이한열 7.9일 시청앞 추모장면.hwp
덧붙이는 글 6월항쟁 4반세기가 지난 오늘 7월 9일은 연대생 이한열군이 그해 6월9일 경찰이 쏜 최루탄 직격탄에 맞아 중태에 빠졌던
이군이 운명한 날이다. 당시 100만의 서울시내 초유 국민들이 추모한 역사적 순긴이기도 했다. 당시 전두환 5공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한 내각제를 꾀하고 국민들은 15년동안 잃어버린 국민주권을 찾겠다는 항쟁이었다. 결국 6월 항쟁은 성공했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은 다시 6월항쟁 같은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당시 대선을 실패한 아쉬움에서 이번에는 정대로
대선에 승리하여 한반도 분단 67년을 종식하고 평화통일로 가는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대선을 기대한다. 그러면
온 국민이 나서야 한다. 25년전 100만의 추모 분노 인파가 일치 단결하듯 지지난 80만의 촛불이 모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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