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의 새가 종횡무진으로 날더라도 공중에 흔적이 남지 않듯이!

깨달음을 찾아서

검토 완료

강복자(bjkang86)등록 2012.03.13 21:23
작년 9월과 10월 두 번, 부산 범어사의 말사인 원효암(元曉庵)을 방문했다. 통일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해에 원효대사가 원효암을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신라의 암자는 이제 퇴락하여 지붕은 기와대신 잡초가 덮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 암자에는 범어사의 조실 지유스님께서 침거하시며 공부를 하는 곳이다. 장좌불와(長坐不臥)와 오후불식(午後不食)의 수행정진을 20년 넘게 해오신 선지식이다.

9월의 독대와 10월의 법문에 함께한 이후 나는 삶을 대하는 마음에 변화를 경험했다. 그것이 무엇인지가 뚜렷하지 않아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 원효암의 방문을 잔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봄을 지척에 둔 두릅나무의 탱탱한 새순봉우리를 보면서 원효암에서의 큰스님의 설법이 다시 선명해졌다._기자 글

한밤중의 원효암

작년 9월 29일, 남편의 강의에 동행해서 울산에 들렷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부산 범어사에 여장을 풀 수 있었다. 이미 산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던 원효암을 향해 무작정 범어사를 떠났다. 밤안개가 짖게 드리운 산길의 두려움을 설레임으로 이기며 미끄러운 바윗길을 올랐다. 

어둠속 원효암은 고즈넉한 신라 시대의 암자 그대로 인듯했다. 정적만 흐르는 암자에는 안개에 싸여 희미한 한줄기 불빛만 깜박일 뿐 시간을 거슬러 올라 신라시대로 와 있는 것 만 같았다.

한밤중의 범어사 ⓒ 강복자


밤길을 한 시간 올라온 나를 지유스님은 공부하시던 책을 덥고 자애스러운 표정으로 맞아주셨다. 그리고 차 한 잔을 우리셨다. 차를 따르는 소리 외에는 다른 소리가 없었다. 밤중에 불쑥 나타난 저를 대좌한 큰스님은 제게 찾아온 연유를 묻지 않으셨다. 저도 스님께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공부해야하는 지를 묻고 싶은 일념이었던 마음을 스님을 대좌하자 그 갈망이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스님이 내려주신 차의 향이 법문이라고 여겼다. 스님이 내가 목마름으로 산을 오르는 것을 미리 아시고 이렇게 설법하시는 것이라고…….

나는 한 시간 반 동안 어두운 산길을 오르고, 한 시간 다시 내려온 그날 밤의 원효암과 지유스님을 잊을 수 없다.

범어사에서의 하룻밤. 이날밤 원효암의 산길을 올라 지유스님을 독대했던 때의 차향이 아직도 선명하다. ⓒ 강복자


나중에 야초스님을 뵈었을 때 한밤중에 원효암에 올라서 큰스님께 아무 질문도 못했던 아쉬움을 말씀드렸다.

"도(道)란 말로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서 설명될 수 있는 도는 이미 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서로간 아무말씀도 없었던 그날밤 이미 도를 소통한 셈이니 아쉬워 할 일이 없습니다."

저는 야초스님의 말씀으로 후회되는 마음을 어느 정도 떨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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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복자

협존자는 팔십에 출가해서 겨드랑이를 땅에 불이지 않았다.

작년 10월27일, 음력으로 시월초하루였다. 원효암 큰스님의 법문이 있는 날이었다. 김천에 계신 어머니를 뵈러 가느냐. 큰스님 법문을 들으려 가느냐로 갈등했다. 나는 두 가지 고민에서 두 가지를 모두 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새벽 5시 30분 부산행 KTX에 올랐다. 원효암 지유큰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은 오랜 갈망이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열차 속에서 이 발걸음이 나를 깨우치는 길로 한걸음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는 길이기를 기도했다.

범어사역에서 미리 약속한 선혜님을 만나 같이 범어사 원효암으로 향했다. 한 달 전에 어둠속에서 올랐던 길이었다. 사실 그날 밤에 길을 잃어 길을 벗어났었기 때문에 꼭 같은 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도반인 선혜님은 오랫동안 지유스님의 설법을 기둥삼아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오랫동안 계속하고 있다. ⓒ 강복자


낮에 오르는 원효암산길이 옛선사들의 발자국소리가 그대로 묻어 있는 듯 했다. 때로는 길이 없다. 큰 바위덩이들이 계곡사이사이에 모여 있는 것을  밟고 나무사이를 지나 한참을 올라야 한다. 중턱에 이르러 평평한 흙길이 나온다. 주위는 가끔 산죽이 길을 따라 나 있고 깨어진 기와들이 길옆에 흩어져 옛날의 인적을 짐작케 할 뿐이다. 

선혜님은 법문에 늦지 않도록 땀을 훔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난 길을 익히느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뒤처지기 일쑤였다.

한참을 오른 뒤에 나무위에 원효암이라고 새겨진, 오랜 시간에 바래고 모서리가 삭은 이정표가 나왔다. 이제야 다 온듯했다. 선혜님이 뒷문으로 들어가서 법문을 듣고 일주문으로 나오자고 하셨다.

풍화된 원효암의 표지판 ⓒ 강복자


뒤란을 돌아 마당에 들어서니 무량수각에 많은 불자들이 모여 법문전 기도로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좌복을 나란히 놓고 스님의 입장을 조용히 기다렸다.

정확히 11시에 스님이 뜰에 모습을 보이셨다. 스님은 불당에 들어 법상(法床)에 앉아 '입정(入定)에 대한 설명을 하시고 함께 '입정'한 다음, 법문을 시작하셨다.

한국의 대표적인 선지식, 지유스님 ⓒ 강복자


-불생불멸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변하는 것이다. 조금도 변화하지 않는 존재가 없다. 우리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바뀌었다가 우리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바뀐다.
-생시는 육신을 통해서 일어난 일이고 꿈은 환상이다.
-인생을 살다가 피곤해질 때는 쉬어야한다. 때를 잘 조절해서 쉬어야 한다. 보통사람은 누워서 잠드는 것도 쉬는 것이지만 피곤해서 쉴 때도 모든 환상과 생각에서 벗어나 가부좌를 하고 선정에 들면 그곳에서 맑은 지혜가 난다.

-행주좌와(行住座臥) 그 속에서 어묵동정(語默動靜). 움직일 때와 움직이지 않아 고요할 때 그때를 알아서 조절해라.
-일념이 무량겁(無量劫)이라 한 시간 앉았다고 보는데 하루가 지나가고 예전에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신묘장구대다라니100만 독을 해서 불망지은(不忘之恩)를 얻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육신으로 우리가 뭘 닦아야 되느냐?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어지러운 망상, 혼침(昏沈) 이 두 가지를 일상생활을 하면서 없애야한다. 눈으로 보면서, 입으로 말하면서, 음식을 먹으면서...
-환상을 초월한 분상에서 보고 듣고 맛보고 했다. 보는 것도 진리요, 맛보는 것도 진리요, 목탁소리가 진리이다.

-인도의 협존자(脇尊者)는 팔십에 출가해서 낮에는 경전공부를 하고 밤에는 좌선을 하고 겨드랑이를 땅에 붙이지를 않았다. 3년을 공부해서 도를 깨달았다. 늙었다고 실망하지 말아라. 습관은 습관으로 낳을 수 있다.오랜 나쁜 습관을 습관으로 고치면 된다. 포기하지 말라 .

-돈과 음식으로 해를 본다. 몸이 맑아야 마음이 맑다. 배가 고파서 많이 먹는 것이 아니다.
음식이라는 것은 잘 만 사용하면 몸과 마음을 도와주는데 잘 못 사용하면 독이 된다.

-나머지 명이 남아 있는 동안 부처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마음 닦는 법을 배우라.
-지혜란 모든 생각에서 벗어난 마음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지유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마음이 평안함을 느꼈다. 하루가 온전하게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는 충만함이 느껴졌다.

스님의 법문이 끝나고 원효암의 마당과 법당을 둘러보았다. 처마 밑은 흙이 드러나 보이고 기둥을 덧대어 받쳐 놓았다. 불당 아래 일주문의 지붕은 잡초가 지붕인양 푸른색으로 감싸고 있다.

원효암의 곳곳은 긴 세월을 이고 있다. ⓒ 강복자


마당에는 연로한 스님이 공양을 마치고 보드라운 햇살을 받으며 신도들과 들깨를 뒤척이고 계신다. 일주문을 지나 작은 길로 내려오며 채마밭과 아름드리나무들을 보며 예전의 영화를 그려보았다.

선혜님이 특별한 곳으로 안내해주셨다. 의상대! 의상대사가 공부를 하시던 바위란다.
그곳은 멀리 아련하게 도시가 보이고 바다가 보이는 곳이다. 그 바위에서 직접 가부좌를 하고 앉아보았다. 바위에 몸을 붙여 공부에 정진하시던 선사들을 느껴 보고 싶었다. 그 분들의 온기가 내게 전해서 오는 듯하다.

의상대 ⓒ 강복자


"불법은 자기의 모습을 말함이요, 자기의 모습을 보도록 가르친 것이 불교이다. 왜 자기의 모습을 보아야하는가? 자기의 모습을 봄으로서 모든 문제의 근본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자기의 모습이란 곧 마음을 말한다. 마음은 어떠하기에 마음을 봄으로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마음은 모든 것의 근원이요,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시작되고 마음으로 돌아간다.

과거, 현재, 미래의 무한한 시간과 동서남북, 상하의 무한한 공간과 유무, 장단, 대소, 피차(彼此)의 무한한 차별상과 희비고락 등 무한한 감정의 생멸(生滅), 이 모든 것이 한 마음속에 기멸(起滅)이니 마음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모든 것의 근원이 된다.

일상생활의 동과 정에 있어서 행주좌와(行住座臥)하는 것은 뜻에 맡기고, 공적과 영지를 온전히 하면서 혼침과 산란을 녹여가는 것이 수도일 것이다. 초심자는 마음이 산란하기 쉬우니 동(動)과 정(靜)에 잘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향(一向)에 동(動)해도 안 되고 일향에 정(靜)해도 안 될 것이다. 수도가 숙련이 되고 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면 일체 무애(無碍)가 될 것이다. 공중의 새가 종횡무진으로 날더라도 공중에 흔적이 남지 않듯이!"_ 知有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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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복자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포스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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