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독립유공자탑 참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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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lmj2284)등록 2012.03.01 13:11
고향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고향이 없는 사람은 좀 불쌍하게 보인다. 그래서 원 고향뿐 아니라 사람들은 제2, 제3의 고향을 만들어 마음의 위안으로 삼는지도 모른다. 충북 옥천은 나에게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기반해서 산 시간으로 따지면 서울이 제2의 고향이겠으나 메트로폴리스 서울은 고향에 어울리지 않는 도시이다.

내가 옥천에 거주한 지는 8년이 채 안 된다. 1999년 말에 내려가서 2007년에 떴으니 만 7년 5개월을 산 셈이 된다. 옥천의 한 두메산골에서 목회를 했었는데, 이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주님의 일도 열심히 했으며, 뜻있는 사람들과 옥천군 전체 발전을 위해서도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었었다. 그래서 나는 제2의 고향이라고 하면 옥천이 떠오른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옥천 출신이다. 우리 시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인정  받는 정지용의 시에 '고향'이 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로 시작하는 시를 읊조리면 마음은 금세 동심으로 돌아가 고향 마을 언저리를 헤매게 된다. 정지용을 낳은 옥천은 그런 점에서 고향의 의미를 더 짙게 풍기고 있다. 문향 진동하는 옥천이 순국선열들을 기리는 데도 여느 곳 뒤지지 않는다.

어제(2월 28일) 옥천을 찾았다. 새로 건립된 옥천 출신 독립유공자들을 추념하는 탑을 참례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2월 25일, 서울에서 유정 조동호선생기념사업회 이사회가 있었는데, 새로 건립된 독립유공자탑 얘기가 나왔었다. 이른바 옥천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세한 내용을 전하지 못해 미안했다. 시간을 내서 꼭 한 번 참례하고 유정 선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그때였다.

옥천군에 전화를 거니 담당 부서를 연결해 주었다. 주민복지과라고 했다. 위치를 물으니 '옥천군 옥천읍 마암리 산 1-12'라고 알려 주었다. 네비게이션에 의지해서 '독립유공자탑'을 쉽게 찾았다. 그곳엔 '독립유공자탑'뿐만 아니라 '충혼탑'을 중앙으로 '6.25참전 유공자 기념탑'과 '베트남 참전 기념탑', '무공수훈자 기념탑'이 호위하고 있었다. 금잔디와 대리석 계단으로 치장된 탑 언저리는 하나의 애국공원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우리가 애국 선열들을 기리고 추모하는 이유는 그분들의 나라 사랑과 희생 정신을 본받기 위해서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받쳐 싸운 선열 제위의 희생이 있었기에 발전된 국가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애국 선열들에 대한 추념은 오늘날 우리에게 작으나마 애국심을 발동하게 만든다. 민족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 가고 글로벌, 국제화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지만 나라 사랑은 진리에 가까운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각 지자체에서 애국 선열들의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하고 충혼탑 등 여러 조형물들을 건립해서 기념하고 있다. 옥천군도 이 애국 공원 건립에 국.도비 4억7천만 원, 군비 9억3천만 원 등 모두 14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충혼탑 1기와 기념탑 3기 등을 세웠다고 한다. 내가 관심을 갖고 둘러 본 독립유공자탑은 2011년 5월 2억여 원의 사업비를 들여 따로 건립했다고 한다. 독립유공자탑 전면에 기록된 소개 글은 이렇게 되어 있었다.

"우리 지역 독립운동은 1919년 3.1 만세운동을 계기로 옥천만세운동, 청산만세운동, 이원만세운동, 군서만세운동이 있었으며, 국내외에서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의 독립운동은 의병활동, 군자금 모집, 학생항일운동, 임시정부 참여 등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 우리지역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과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의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독립유공자탑을 건립하였습니다. / 탑의 전체적 형상은 사각의 평면 위에 민족의 혈이 되돌고 애국정신이 우뚝 솟아있는 형상이며, 양 측면 여섯 개의 기둥은 독립의 숭고한 의지를 표현하는 민중의 형상이며, 가운데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들고 있는 형상은 자주독립을 열망하며 자유와 평화를 선언하는 애국자를 표현한 탑입니다. 2011년 5월 30일 옥천군수"  

옥천 지역은 일제시대 항일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지역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겠지만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해월은 1893년 옥천 청산 문암리에 머물면서 전국의 동학도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려 반봉건 반제국의 기치 아래 싸울 것을 선동한 곳이 바로 옥천이었다. 한 사람의 의인이 지역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해월은 우리에게 증명해 보인 사람이다.

옥천 독립유공자탑 뒤에는 유공자들의 이름이 지역별로 그리고 등급별고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총 57 명의 독립유공자 속에는 국내외 독립운동을 하면서 일제와 싸운 유정 조동호 선생이 독립장을 서훈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유정 선생은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 이사로 활동했고, 신한청년당을 조직 3.1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3.1운동 직후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과 국무위원을 겸임했으며 조선공산당 창당에 관계했고, 또 조선중앙일보 논설위원과 동아일보 기자 등 언론인으로서의 활동도 돋보였다.

나는 이곳을 참례하는 동안 몇 분의 도움을 받았다. 옥천군 주민복지과 사회복지팀 태봉문 팀장으로부터 충혼탑 중심의 애국 공원 건립 경과에 대해 상세한 얘기를 듣는 등 자료 도움을 받았으며, 이은승 옥천읍장으로부터는 옥천읍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듣고 저녁 식사까지 대접받았다. 이번 독립유공자탑 참례는 제2의 고향 방문에 대한 추억 치고는 아주 멋진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옥천을 떠나면서 정지용의 시 '고향'의 마지막 구절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가 귓전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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