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바람, 바램

보이지 않지만 내 앞에 당당히 존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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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래(whatnew)등록 2011.10.01 11:51
정체
바람.
뭘까?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것,
귀가를 스치는 소리는 있는것
없는 것은 아니며 더욱 당당히 내 앞에 존재하는 것.
눈부시게 짙은 신록에서 만나고,
고압선처럼 가느다란 줄에서 휘파람 소리로, 
아름다운 선율을 만드는 관악기의 통속에서,
바람의 언덕에서 전기를 만드는 날개에서 만나기도 한다.
힘들게 올라간 산 정상, 환호하는 이의 이마에서,
탐스럽게 열린 과수의 꼭지를 흔드는 농부의 안타까운 가슴에서도 만난다.
피부에서 만져져서야 비로소 존재감을 나타내는 바람은 느낌이고,
혼자 외로움에 눈물 흘리는 이의 뒤안에서 바스락거리며 위안을 주는 바람은 친구이고, 
모든 잠자는 것을 깨워 비로소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드는 부지런한 바람은 열정이고,
바라보는 모든 것 뿐아니라 등돌려 뒤돌아 있는 것에 까지도 기꺼이 손내미는 바람은 관심이고,
그래서 어디에도 없는 것 같지만 어디에 서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는 것
바람은 사랑이 아닐까. 

아쉬움
함백산에서 맞는 바람은
천년을 살아온 주목과 신갈나무와 소나무와 싸리나무, 나리꽃, 동자꽃,엉겅퀴,노루오줌 등등 뿌리를 박고 산 모든 것들을 송두리채 흔들어버리겠다는 각오를 한 듯했다.
뿌리를 박고 있는 모든 것을 뽑아 버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거대한 음모가 한꺼번에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온 듯 했다. 문득 그랬으면 좋겠단 위험한(?)생각을 잠시 해본다. 처음부터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이미 결과가 보일땐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게 빠른 것처럼 이 바람이 모든 것을 날리고 흰 도화지 처럼 텅빈 민둥산에서부터 새로 시작하라는 바람의 음모인가. 그랬으면 좋겠다.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하릴없이 걷는다.
내 살아온 길을 바람을 따라 거슬러 올라 가 보기도 한다.
잘 살고 있는가 그대는
잘 못살고 있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가.
바람의 음모에 나를 맡겨 툴툴 털어 낼 수 만 있다면...... . 
바람은 아쉬움인가보다.

희망
하늘도 보이지 않는 신갈나무의 잎으로 덮인 초록세상은 바닷속에서 일렁이는 해초처럼 쉼없이 흔들렸다.
초록의 바다에서 초록의 파도가 흔들어 대는 무섭기까지한 이 혼돈의 길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고 있었다.
산행의 발길은 땀이 날 새 없이 말라 시원했다.
뜨겁게 내리쬐는 8월의 햇살도 없고, 바닥 밑바닥같은 고요도 없이 오로지 괴물처럼 세상을 뒤흔드는 바람만이
길위에 있다. 지금부는 바람은 괴물이 맞는것 같다. 
이 거대한 산 전체를 삼킬 듯이 뒤흔드는 힘의 정체가 바람이라니 지금까지 바람을 너무 쉽게 보았나.
괴물에게도 연정이 있나보다.
산 정상을 스치듯 지나는 구름은 바람에 떠밀려 시속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어지럽게 밀려가지만,
언듯언듯 말끔하게 비치는 구름의 창가로 내 여로가 광장처럼 펼쳐졌다.  
꽉 막히고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거대한 벽 앞에서도 한 줄기 빛 같은 길을 보여주는 이가 바람이다.
바람은 희망인가보다.

변신
바람은 언덕위의 참수리 날개에 걸터 앉아 세상을 내려다 보기도 하고,
풍차 날개 속으로 들어간 바람은 자신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변신로봇같은 마술을 부린다.
어둠에 길 잃은 이에게는 더 없는 두려움을 주고, 살깧을 에는 소리는 몸을 더 움추리게 만든다.
너무나 고적한 무료함에 속삭이는 바람소리는 친구같은 동무가 되기도 한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바람은 천의 손을 가진 화가로 변신한다.
푸른 잎새에 닿으면 바람은 금새 연녹색으로 물들어 버린다. 잎새를 뒤집어 그 연녹을 모두 흡수해서 가슴속으로 연녹의 세상을 가져온다.
드넓은 바다위에서는 초록의 바람으로 날아간다. 물결을 타고 튀어 오르는 바닷고기도 금새 초록으로 물들이고 돛을 단 배도 한적하게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도 모두 초록이다.
노랑도 있다. 가볍고 명랑한 햇살속에서는 상쾌하고 발랄하게 노래를 부른다. 투명한 존재속에서 바람은 그렇게 눈물나게 맑은 노랑의 물감을 바른다.

겸손
이제 바람은 세상을 휘 돌아 모든 것을 깨달은 양 얌전하게 양지바른 귀퉁이를 휘돌아 자리잡고 앉는다.
그리고 세상을 겸손하게 내려다 본다.
함백산의 천년의 바위를 지났고, 두문동재의 천년의 고독을 품은 주목의 병든 가지도 지났고, 독야청청한 낭떨어지기 끝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가지와 신갈나무의 연초록의 어린 잎새도 훑고 지나왔다. 동자꽃, 나리꽃, 투명하게 맑은 마타리 노란 꽃술도 만지고, 참수리의 날개사이와 매봉산 풍력발전기 날개도 지나왔다. 한시도 머물지 않았다.
시원하고 늘 새롭게 자신을 닦아왔다.
눈부시게 흰 물감으로 물든 깨끗하고 순수한 천으로 온 천하가 덮히길 소원해 본다.
거기에 나도 소박한 한가지 바램을 바람에 얹어 본다.
이제 불혹을 넘어서는 세월속에서도 내 정체성이 한 순간에 지나가는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단단한 바위처럼 혹은 낭떨어지기 낙낙장송의 소나무 잎새처럼 순수하게 지켜질 수 있기를 간절히......
그리고 이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정직과 우직함으로 힘들고 지친 우리에 위안을 주고,
우리의 귀밑 흰머리, 불혹을 멋지게 일으켜 세워줄 바람을 간절이 바래본다.

덧붙이는 글 백두대간 산행을 하면서 하루종일 큰 바람을 맞으며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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