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 윤두서를 찾아 떠나는 '땅끝' 가을길 걷기

바람과 갈대숲 길에서 시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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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섭(cul70)등록 2011.09.21 11:42
가을은 마지막 여름의 폭염 속에서도 소리없이 다가와 땅 끝에 닿아 있다. 들판 길 언저리마다 피어 가을 바람에 흔들거리는 갈대의 노래가 벌써 가을인 것이다. 이 가을의 길에 들어서면 누구나 무작정 한번 떠나고 싶어진다. 가을 길 따라 들판 위에서는 자연의 일부가 된다.

그곳에 가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땅끝' 전라남도 해남. 땅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를 포근하게 안아줄 떠나간 여인의 숨결 같은 따스함이 있을 것 같은, 비록 거기에는 잡혀지지 않는 바람만 있다 해도 그래 한번쯤 떠나보고 싶은 곳이다.

땅끝을 찾는 사람들의 절반은 그렇게 그곳에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과 동경심을 안고 찾아온다. 그 동경이라는 것은 물론 아름다운 자연과 멋있는 풍경일 수도 있지만 차라리 그보다는 일상에 지친 그리고 삶의 한 줄기가 무더기로 허물어져내리는 사람들이 마지막처럼 떠나왔다가 짭잘한 해조음의 바람과 대화하며 새로운 출구를 찾아 다시 떠나가는 곳이다. 

공재 윤두서와 함께 떠나보는 가을길은 바람 많은 땅끝 해남땅에서의 가을여행이었다. 공재가 살아온 그리 길지 않은 생애의, 또 작은 일부의 삶을 살았던 해남. 그가 살았던 녹우당과 백포 고택은 아직도 그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불멸의 명작 <자화상>은 아마 그가 당파에 휘둘리지 않고 고향에서 자연의 한정에 묻혀 있을 때 완성된 작품이 아니었을까?

미황사에서 시작된 가을길 걷기. 금강스님과 잠시 한컷. ⓒ 정윤섭


그의 자취를 찾아 떠나보는 가을길 걷기는 가을날씨 같지 않은 늦더위가 실려 있는 날씨였다. 공재길 걷기는 남도의 아름다운 절 미황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미황사에 가면 아름다운 미황사 만큼이나 미소가 아름다운 금강스님이 있다. 금강산 만큼이나 아름다운 달마산 아래의 미황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잠시 속세의 시름을 놓고 찾아온다.

미황사에는 문화가 있다. 사찰의 르네상스와 같은, 그리 멀지 않은 때 이곳 해남의 대표 사찰 대흥사에 초의선사가 기거하고 다산을 비롯 추사와 소치 허유와 같은 문인 석학들을 비롯 예술인들이 몰려와 문화의 창조시대를 연 것처럼 미황사에는 지금 그 시대가 다시 찾아 온 듯하다. 얼마전 다녀간 신영복 선생님은 이곳 미황사 아래 서정분교 아이들을 위해 도서관의 현판글씨를 기증하며 이곳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매년 열어온 미황사의 괘불재와 음악회는 올해 또 열두번째로 오는 10월 8일 다시 열린다. 깊어가는 산사에서 다시 가을의 문화축제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미황사의 가을은 아직 설익어 있다. 아직은 짙푸른 나뭇잎들이 가을이 깊어 있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미황사를 벗어나 들판 사이를 걷다보면 한해 농사의 성패를 가늠해볼 벼들이 누렇고 탐스럽고 알차다. 태풍 무이파가 휩쓸고 지나같지만 태풍을 이기고 그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미황사를 떠나 공재의 생가가 있는 백포마을 까지는 대략 11km다. 따가운 가을햇살 아래서걷기에는 녹록치 않은 거리다. 길을 걷다 보면 많은 사물들이 가까이 다가온다. 승용차만 줄곧 타고가다 시골버스를 타고서야 시골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틈 속에서 진짜 이들의 모습이 다가오는 것처럼 길을 걷다보면 빠른 시간속에서 놓처 버린 것들이 느린 시간 속에서는 다시 떠오른다.

미황사에서 잠시 목을 축이다 ⓒ 정윤섭


길을 걷다보면 어린 시절 학교 가는 길에 캐먹은 고구마나 무는 하나의 추억이었다. 지금은 모두 그리운 시절이다. 미황사를 벗어나 군곡 저수지를 따라 들판 길을 걷다보면 길가에는 온통 갈대들이 춤을 춘다. 가을을 가장 느끼기 좋은 광경이다.

군곡저수지는 오래전 저수지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곳이다. 지금은 바닷길이 막히고 들판이 된 논들에 물을 대기 위해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군곡저수지 옆을 따라가면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 길 옆의 갈대들이 하나의 하모니를 이룬다. 가을 정취를 가장 멋지게 느낄 수 있는 곳 중에 하나다. 우리는 그 길을 줄곧 따라 걸었다. 이 길에서 만큼은 가을길이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군곡저수지를 따라 삼마 마을이 있는 곳까지는 그렇게 들길을 따라 난 갈대숲이 터널을 이루는 듯 하다. 삼마마을로 들어서는 초입에서 잠깐 휴식, 삼마리는 마을 앞 세 곳에 명당자리가 있다는 말(馬)과 연관지어 붙여진 마을이란다.

삼마마을을 지나 작은 언덕을 넘어서면 군곡마을이 나온다. 군곡마을 앞으로는 지난 60년대쯤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출렁이던 곳이다. 백포만의 초입에 해당하는 이곳은 먼 바다로 나가는 통로에 위치하고 있었던 때문인지 한․중․일을 연결하는 해로상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곳 군곡패총에서는 지난 86년 목포대학교의 발굴에 의해 중국 신나라 시대의 화폐 동전인 '화천'이 발견된 곳이다. 신나라는 AD 9~22년 짧은 기간 존재했던 왕조로 '화천'의 확인은 이 시기에 이곳 군곡을 중심으로 한 백포만이 한․중일․을 연결하는 해로상의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군곡저수지 옆을 따라가는 가을걷기 ⓒ 정윤섭


우리 일행은 폐교된 군곡초등학교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머물렀다.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수백명의 학생들이 학교를 뛰어다녀 운동장의 풀들이 자랄 여유가 없었을 운동장에는 이제 자라나는 풀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잡초만 무성하다. 학교 초입의 정문에는 올 2011년 3월 학교가 폐교되었음을 알리는 설명문이 붙어있다. 이곳도 결국 아이들이 사라져 가는 농촌의 모습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점심을 먹어 약간 몸이 무겁거나 느슨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다시 길을 걷는다. 군곡초등학교를 벗어나 오래전 드넓은 바다였을 들판을 지났다. 예전에는 수많은 배들이 오가는 그 뱃길이다. 한중일 고대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진 백포만의 바다는 이제 너른 들판이 되어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이 마지막 수확의 결실을 태양의 자양분 아래서 만들어 가고 있다.

들판길은 지루하다. 인내심이 필요하다. 바다가 육지로 변해 간척지가 된 너른 들판은 더욱 힘이 든다. 터벅터벅 그렇게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오랜 역사의 흔적을 뒤로한 채 벌판으로 변한 백포만의 그 뱃길은 이제 긴 수로가 하천으로 변해 있다.

그 백방포의 수로 위에서 가을 길을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그 뱃사람들의 혼령을 추모하듯 대금소리가 들려왔다. 가을 길에 동참한 문재식 회원이 가지고 온 대금소리다.

이 수로를 지나 배는 백방포에 배를 댄다. 배는 남편을 싣고 저 멀리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일행이 되어 떠난다. 그리고 여인은 중국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백방산의 바위에서 떨어져 훨훨 새가되어 날아간다.

포구는 돌아오는 곳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포구를 통해 떠난다. 아주 오래전 멀리 제주도로 중국으로 님을 떠나 보낸 곳이 이곳 백방포다. 중국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는 백방포의 전설이 되어 내려온다.

군곡저수지따라 들판의 도로변 갈대꽃이 흐드러진다 ⓒ 정윤섭


그렇게 백방포에는 먼 세계를 향해 떠난 남자가 있고 그를 기다리는 아낙이 있다. 바다로 고기를 잡으로 떠났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사는 여인의 오랜 기다림이 있다. 이 백방포에서 김지하 시인은 이렇게 노래 불렀다.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백방산 나가미 위에
무수히 서 있는 저 연인들의
얼굴 얼굴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저 무수히 바람에 갇혀
옹송거리는 어깨 움직임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여기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이리 떠나고 떠나오던
그 숱한 작별의 이야기들을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어느 나무에
어느 나무 그늘에
그 사연 새겨졌는가
내 이제 짧은 머리
짧은 바지 차림으로
이 자리에 서서
홀로
젯빛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여긴 왜 이제 항구가 아니냐
- 김지하 <백방1>

김지하가 땅끝 해남의 백방포를 노래한 시다. 그가 시를 통해 그리움을 노래한 곳은 오래전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을 기다렸다는 전설이 머문 백방포구다. 이제는 너른 들판만이 오래전 이곳이 멀리 중국으로 떠나는 뱃길의 출발지였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떠남과 기다림, 그리움의 자리에서 김지하는 백방포를 노래했다.

이제 그때의 흔적이 모두의 기억 속에서 다 사라져 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제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김지하 시인이 70년대의 어둔 시대를 뚫고 잠시 몸을 풀던 곳, 그 고목나무 아래에는 이 가을의 휴식을 위해 동네 아저씨들이 머물다 간다.

김지하가 노래한 백방포도 이제 바다가 너른 들판이 되었다. 이제는 모두가 떠나고 노래할이 없을 것 같은 이곳에서 가을은 논두렁의 억새만 가이없게 바람에 휘날린다.    

백방포의 수로를 지나 백포마을이 얼마남지 곳에 위치한 신방저수지로 향했다. 신방저수지는 온통 연잎으로 들어차 있다. 연꽃이 많이 피지 않는다는 이곳은 저수지가 온통 연으로 뒤덮혀 있다.

삼마마을로 가는 들판길 ⓒ 정윤섭


경수마을을 지나 이제는 마지막 백포마을로 가는 길이다. 백포마을로 가는 옛길이기도 하다. 오래전 공재가 말을 또는 나귀를 타고 들어갔을 그 마을의 초입길이다. 백포마을의 초입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있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바라보는 백포마을은 고즈넉하다. 공재 고택과 함께 마을에 들어서 있는 고택들은 아직도 공재가 살았던 옛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백포마을은 공재가 살았던 전택이 있는 마을이다. 지금 윤두서 고택이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공재가 이곳 백포마을에 전택을 짓고 살게 된 것은 해남윤씨가에서 이룬 언전 간척과도 상관이 있다. 해남윤씨가는 이곳 백포마을 앞을 대규모로 간척 하였는데 간척을 하자 토지가 늘어나고 사람이 모여살게 되며 자연히 이곳은 마을이 형성되게 된 것이다.

공재는 한해가 들어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거나 유랑하는 신세가 될 때 마을 뒤 소나무를 배어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소금을 구워 마을 사람들을 구제해 주웠다고 한다. 공재의 애민사상을 알 수 있는 일화로 당시 이곳에는 마을을 이룰 만큼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백포는 흰포구다. 어느 예술가의 호와도 같은 이름이다. 배가 닿았을 이 마을 앞으로는 오랫동안 간척이 이루어져 너른 들판이 되었다. 해남윤씨 집안의 오랜 고가들이 남아있는 백포는 그렇게 오롯이 옛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백포 공재 고택에서는 오는 24일(토) 공재문화재가 열린다. 고택의 분위기를 살린 갖가지 공연과 체험행사 등 공재문화재가 열릴 예정이다. 오는 22일에는 <공재 윤두서>의 저자 박은순 교수가 내려와 해남문화원에서 초청강연도 가질 예정이다.

공재와의 대화는 다시 이렇게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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