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결혼장려 정책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조 혼인장려책

검토 완료

유성호(shyoo)등록 2011.06.24 13:27
요즘이야 결혼이 선택사항이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혼기를 넘기면 불효, 불충으로 몰렸다. 결혼은 곧 대를 잇는 필요충분조건이었기에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별 없이 때가 차면 당연히 하는 것으로 여겼다.

조선시대 홀아비, 노처녀는 환과고독(鰥寡孤獨: 늙은 홀아비, 지아비 없는 늙은 홀어미, 늙어서 자식이 없는 노인, 부모 없는 아이 등 사궁민(四窮民)을 뜻 함)과 함께 나라가 구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특히 가난으로 인해 결혼을 못하는 집은 장려금까지 지급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전해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결혼장려 정책을 엿본다. 

조선 2대 임금 정종 2년(1400년) 7월 2일자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혼가(婚嫁·혼인)의 예는 요컨대 시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양가집 딸로 혹 부모가 모두 죽었거나 혹은 가난하여 고할 데도 없어, 나이가 장성하여 시기를 잃는 자는, 소재지 관사에서 그 족친에게 일러서 혼사(婚事)를 주장하게 하고, 적당히 헤아려 비용을 도와주어 민생을 후하게 하라."

세종조에 와서는 장려책과 동시에 까닭 없이 혼기를 넘길 경우 혼주를 벌하도록 했다. 세종 즉위년(1418) 11월13일 실록을 살펴보자.

"가난하여 아무 것도 없는 집에서 시집보낼 나이가 이미 지났는데도 시집보내지 못한 사람과, 장사지낼 날짜가 이미 지났는데도 매장(埋葬)하지 못한 사람은 진실로 불쌍하니, 감사와 수령이 관(官)에서 자량(資糧·비용과 식량)을 주어 비용을 보조하여, 때를 놓치지 말게 할 것이다. 혹시 부모가 다 죽었는데, 동복형제(同腹兄弟)와 일족(一族)이 노비와 재산을 다 차지할 욕심으로 혼가(婚嫁)를 시키지 않는 자는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세종 6년(1424) 10월 30일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수령이 그들의 경내에서 가난하여 혼가(婚嫁)의 시기를 놓친 자와 장사(葬事)를 미루는 것을 불쌍히 여겨, 흔히 혼인에 필요한 물건과 장사지내는 비용을 내어주게 되는데, 그가 죄를 짓게 될 때 이것까지 포함하여 장물로 따지는 것은 진실로 옳지 못한 일이다. 이를 의논하여 아뢰라."고 적혀있다.

세종 17년(1435)에는 예조에 지시하기를 "가난하고 곤궁하여 시기를 넘기고 능히 혼가(婚嫁)를 하지 못한 사람은, 내외(內外)의 친족으로 하여금 함께 자장(資粧·여자의 단장에 관한 준비품)을 준비하여 시기를 잃지 않도록 하고, 그 중에서도 가난하고 곤궁함이 더욱 심한 사족(士族)의 딸은 관청에서 곡식을 주도록 하되, 만약 까닭도 없이 기한을 넘기는 사람이 있으면 주혼인(主婚人)을 논죄하는 법이 이미 영갑(令甲·법령)에 기재되어 있는데, 무식한 무리들이 나이를 꾸며 숨겨서 시기를 어기는 탄식이 있게 하니, 내가 심히 염려한다. 예전(禮典)을 거듭 밝혀 서울과 지방에 효유(曉諭·깨닫도록 일러줌)시켜 시기를 잃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세종 "까닭없이 혼기 넘기면 논죄"ㆍ성종은 25세 처녀 성혼 독촉 

성종 때는 보다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다. 성종 3년(1472) 5월 7일 예조에서 혼인하지 못한 자들을 성혼시킬 방법을 임금에게 아뢰는 기사다.

"지난번에 전교(傳敎)를 받들기를 '남녀(男女)가 혼인하여 함께 사는 것이 인간(人間)의 대륜(大倫)이니 만약에 혹 시기를 어기면 반드시 화기(和氣)를 상하는 데 이를 것이다. 지금 혹 가장(家長)이 불초(不肖)하거나 집안이 가난함으로 인하여 나이 30이나 40에 이르도록 혼인하지 못한 자가 있을 것이니 때에 미쳐서 혼가(婚嫁)할 절목(節目)을 상의(商議)하여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공경히 중외(中外)에 알려서 처녀(處女)의 나이 25세 이상이 되는 자에 대하여 그 가계(家計)를 모두 조사하게 하였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예(禮)를 갖출 수 없는 자들이니 청컨대 횡간(橫看)에 의하여 쌀·콩 아울러 10석을 주어서 자장(資裝)을 삼게 하고, 사족(士族)이 아닌 자는 반(羊)을 감(減)하여 제급(題給)하되, 자장(資裝)을 받고 이미 납채(納采)한 자는 20일로 한정(限定)하고 납채하지 않은 자는 한 달로 한정하여 성혼(成婚)하도록 독촉하소서"

성종은 8년과 17년(1486)에 거듭 각 도 관찰사에게 "지금 듣건대 사족(士族:양반)의 딸로서 혹은 부모(父母)가 모두 죽었거나 혹은 생계(生計)가 빈곤하여 나이가 장성하였어도 시집을 가지 못한 자가 많다고 하니 화기(和氣)를 상하고 재화를 부르는 것이 반드시 이런 데에서 연유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경(卿)은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도내(道內)의 나이 장성하고도 시집가지 못한 자는 그 자재(資材)를 공급해 주어 혼인[婚嫁]하도록 해서 시기를 잃는 일이 없게 하라"고 했다.

영조는 6년(1730), 47년(1771)에 혼인할 때가 지났거나 상(喪)을 당하여 장례 치르는 시기를 놓친 자를 찾아서 위문하고 돌보며 돕도록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 결혼장려 정책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아봤다. 이 시대는 주로 가난이나 부모의 사망으로 홀로 남겨진 경우 등 스스로 결혼이 어려운 이들을 위한 지원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이 시대는 과년한 남녀의 비혼이 화기를 상하게 해서 국운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 미신적 요소 때문에 결혼이 강요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을 위해 환금성이 높은 쌀, 콩 등으로 지원한 것을 보면 일면 '장려'의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경기침체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우리 상황을 보면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시대는 변했지만 금전적 어려움이 결혼을 막아서는 큰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조선시대처럼 지자체가 결혼장려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검토할 단계다. 외국인 신부를 데려오는 곳에만 지원할 것이 아니라 결혼 후 관내에 거주하는 부부에게 장려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대를 잇는 일'과 일맥상통한 저출산 대책의 선행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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