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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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dwkim)등록 2011.05.13 16:43
표현은 의식을 지배합니다. 특히 단어의 경우 그 특징이 뚜렷합니다. '쿠데타'와 '혁명'이 그러합니다. 한 때 우리는 쿠데타를 혁명인 줄 알았던 적이 있습니다. 고백 하나 할 게요.

1990년인가 91년인가 그 즈음이었습니다. 대학교 1, 혹은 2학년 때였는데요. 어느 볕 좋은 봄날, 아마 이 맘 때였을 겁니다. 막 알기 시작한 여자 친구와 새순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노천강당 잔디계단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무심결에 제 입에서 '5.16 혁명'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5.16이 혁명인가요?"

저를 쳐다보며 되묻던 그 친구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띵.'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했습니다. 저는 그때 이념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5.16을 혁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제 입에서 튀어나온 말로 인해 5.16이 혁명이 돼 버렸던 거지요. 아버지 세대들에게 무한반복 리필 된 '5.16혁명'이라는 말이 갓 스무 살 청년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태'라는 단어도 한동안 우리의 의식을 지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민주화운동으로 바로 잡힌 이 낱말은 5~6공 시절 '광주'와 '5.18' 뒤에 붙어 10년이 넘도록 인민들의 의식을 지배했지요. 민주화 운동이 사태로, 민중항쟁이 폭거로 변질됐던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던 겁니다.

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폭거를 민중항쟁으로 바로잡기 위해 그 시절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피를 흘렸고, 다행히 역사는 전진했지요. 전두환씨가 사형, 노태우씨가 12년형을 선고받은 게 불과 15년 전입니다. 그리고 이제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이 매년 정부의 공식행사로 열리고 있지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행사의 의미가 상당히 훼손되고 있습니다(공식 추모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엉뚱한 노래로 바뀌었습니다)만 역사의 큰 수레바퀴를 되돌리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요즘 일부에서 5.18을 다시 '사태'와 '폭거'로 바꾸려 하고 있네요. 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 한미우호증진협의회라는 희한한 이름의 단체가 바로 그들입니다. 특히 한미우호증진협의회 대표를 맡고 있는 서석구씨는 한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5.18을 시종일관 '사태'라고 표현하더군요. 가관인 건 서씨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5.18광주사태는 북한 특수부대원 600명이 몰래 잠입해 한 짓'이랍니다. 서석구씨의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전두환 노태우씨는 참으로 억울하게 살인누명을 쓴 사람들인 거죠.

서석구씨의 주장은 시쳇말로 '좀비스럽'습니다. 총으로 쏴도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반공주의의 망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좀비들은 빛이 닿으면 사라져 없어진다지요. 그래서 그런가요. 이들은 한사코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 합니다. 좀비들의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은 5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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