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산, 사람 사는 이야기와 그 감동으로 살던 사람이 종교와 역사를 만난 이야기

소설가 한수산, 양화진 목요강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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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남(paullife)등록 2011.04.26 18:57

소설가 한수산 씨가 양화진문화원 목요강좌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 양화진문화원



"순간 한줄기 빛처럼 말씀이 전해지면서 무릎이 꺾이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하느님께서 나를 쓰시려고 그랬구나. 한국 가톨릭 순교자 이야기를 나에게 쓰게 하려고 하시는데, 나란 인간이 시원치 않으니 담금질 시키시려고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때리셨던 것이 '한수산 필화사건'이구나. 그리고 외국에 나가서 헐벗고 살아보라고도 시키셨구나.'"

소설가 한수산 세종대 국문과 교수가 지난 21일 양화진문화원(명예원장 이어령, 원장 박흥식)에서 '가톨릭 문화의 지평 – 한국천주교 순교자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열린 강연 중 털어놓은 고백이다. 한 교수는 지난해 4월,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한 교수 자신의 자전적 삶을 융합한 <용서를 위하여>라는 장편소설에서 자신의 삶을 활자로 고백한 바 있는데, 이날 강연은 그의 '화해에 이르는 삶'에 대한 생생한 육성이었다.

모진 고문 뒤 인간성이 말살되고 벌레가 되어 살아

1981년 5월, 뒷날 '한수산 필화사건'이라고 이름 붙여진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제주도에서 살고 있던 작가는 1980년 5월부터 <욕망의 거리>라는 제목의 소설을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었다. 아내를 잃은 가난한 시골의 우편배달부 아버지와 그의 삼남매가 주인공인 소설이었다. 그러나 당시 계엄령 속에서 신문검열은 강화되었고, 소설은 작가와 상의도 없이 가위질된 채로 신문에 실렸다.

그러던 중, 국가기관에서 나왔다는 사내 둘이 제주도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서울로 함께 가야 한다는 말에 작가는 그들을 따라 나섰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승용차에 강제로 태워진 그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차 속에서 눈이 가려진 채로 영문을 모를 폭행을 당했다. 어딘가(육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끌려간 작가는 짙은 푸른색 환자복 같은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고, 검정색 고무신을 신었다. 그때부터 마구잡이 구타가 시작되었다.

"자동차에서 맞은 건 맞은 게 아닐 정도로 온몸을 몽둥이와 군홧발로 찜질 당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물에 흠뻑 젖은 채 시멘트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건 구타일 뿐 고문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마침내 고문이 시작되었다. 고문기술자들은 약제를 천에 넣고 한약을 쥐어짜듯, 작가의 얼굴을 큰 타올로 뒤집어 씌우고 있는 힘껏 조였다. "귀가 찢어지는 것 같고, 코가 일그러져, 거의 질식하여 죽기 직전까지 간다. 그러면 그 순간 탁 풀어놓고, 들숨을 들이마시려는 순간 코와 입에 물을 집어넣는다. 그러면 의자에 묶인채 뒤로 자빠진다." 전기고문은 "빨래집게 같은 집게로 손가락과 발가락 모두와 가슴부분도 집는다. 그리고 전기가 통하게 하기 위해 목 윗부분을 제외에 한 전신에 물을 붓는다. 그리고 꽃꽂이할 때 쓰는 뾰족한 침봉으로 넙적다리 안쪽을 찔러 살을 찢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류가 흐를 때 피가 튈 수 있기 때문에 몸의 일부를 찢어놓는 것이라고 한다.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순간 정신을 잃고 까무러친다. 피부는 가짓빛으로 타들어갔다."

한 교수는 "이 과정에서 그들은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영문도 모른 채 무차별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물고문도 이어졌다"라고 덧붙였다.  

그들이 작가에게 적용한 혐의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국가원수 모독이었다. 소설 속에서 하나의 삽화로 대머리를 풍자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이 당시 대통령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군비방 및 이적행위였다. 노점상을 악랄하게 단속하는 등의 완장차고, 제복 입은 자들의 어쭙잖은 권력의식을 가진 행태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내용이 군을 비방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하는 이적행위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사회부정시였다. 독자들에게 사회를 부정적으로 보도록 조장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혐의로 작가만 끌려온 것이 아니었다. 일이 이미 조직적으로 계획된 사건이 되어 있었다.

한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이 같은 혐의들이 기소거리나 됩니까?"라며 "그러나 그들은 제가 주범이고 저의 뜻대로 따라준 종범으로 신문사 편집부국장, 문화부장, 출판부장, 출판담당기자, 제가 책을 내고 있던 출판사 편집장 2명까지 잡아들여 똑같이 폭행하고 고문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작가는 "선생님,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는 말을 듣고 풀려났다.

한 교수는 그 후 찾아온 몹쓸 고문 후유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몸에 난 상처는 사라지지만 정신과 영혼에 준 상처는 절대 안 없어집니다. 제주도에 돌아온 나는 인간이 아닌 벌레가 되었습니다. 오직 생각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버스 타고 가는 10명의 사람들을 보면 '저기 악10마리가 타고 가네' 하며 두려워했습니다. 거실에 신문을 보다가 '왜 불렀었어?'하고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신 착란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1갑도 안 피우던 담배가 3갑으로 늘었고, 밤이 되면 분하고 억울한 게 치솟아 올라와 쓸쓸한 밤 바닷가로 나가 울부짖으며 모래 위를 뒹굴었습니다. 폐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일본으로의 '유배', 그곳에서 신앙과 역사 만나

작가가 보안사에서 고문 당할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 노태우였다. 그가 1987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한 교수는 "'뭐 이 따위 나라가 있나. 이게 나의 조국인가'라며 분노했다.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였다. 하나는 민주화운동에 나서든가, 다른 하나는 외국으로 가서 모든 걸 잊고 공부하는 길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1988년 여름, 일본으로 떠났다. 작가는 <용서를 위하여>에서 "나는 이념으로 살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면서 그 이야기의 감동으로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한 교수는 "일본에서 특별한 두 가지 체험을 하며 저의 영혼과 정신사적으로 중요한 4년을 일본에서 보냈다"고 말했다.

화해에 이르는 길 한수산 작가가 '한수산 필화사건' 이후 신앙과 역사를 만나 화해에 이르는 길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 양화진문화원


"첫째는 종교적 체험입니다. 천주교 신자로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나환자를 위해 평생을 바치셨던 이경재 신부님을 여행 중 우연히 만나서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고, 백두산 천지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 신부님이 저의 신앙을 큰 애정을 갖고 보살펴 주셨습니다. 둘째는 제 문학의 전환입니다. 이제까지 써온 문학과 달리 역사와 사회 속으로 저의 시각이 들어가게 되는 전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와세다 대학 근처의 한 헌 책방에서 <원폭과 조선인>이라는 얇은 팸플릿을 발견하고, 알게 된 사실에 대해 경악했다. 이 6권으로 된 책자는 1945년 8월 9일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로 원자폭탄을 맞은 도시인 나가사키에서 원폭 피해자가 된 조선인들을 발굴하고, 찾아내 증언을 듣고 기록으로 남긴 일본시민단체의 기록집이었다. 나가사키 시의 조선인 피폭자 공식기록은 340명이었으나, 루터교 목사가 이끄는 이 시민단체가 무려 30년에 걸쳐 꼼꼼하게 취재한 결과 조선인 피폭자는 2만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500여명의 조선인들이 나가사키 아래에 있는 '하시마 섬'의 탄광에서 강제 노동을 하며 노예처럼 살았다. 한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이 섬에서 만난 조선인 S씨에 대해 소개했다. "일제 강점기 때 할머니와 살고 있던 15살 S씨는 배추뿌리를 밭에서 줍다가 강제징용에 휩쓸려가 하시마 섬 탄광으로 가게 된다. 그 소년이 탄광에서 노동을 하다 몸을 다쳐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퇴원 후 그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나가사키 조선소에 일하다 피폭당한다. 목숨은 구했으나 후유증으로 폐, 콩팥 등 몸의 장기가 하나씩만 남고, 노인이 되어 혼자 살고 있었다. 꿈 많던 15살 소년이 늙고, 병든 노인이 된 모습을 보며 가슴이 무너지고 분노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작가는 지난 2003년 '하시마 섬'을 무대로 한 장편소설 <까마귀>(전5권)를 세상에 내놓았고, 2009년에는 <군함도>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

궁금합니다 한 청중이 한수산 작가의 화해에 이르는 길에서 만난 신앙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 양화진문화원




한국 천주교 순교자 이야기를 소설로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한 교수의 세례명이다. 4세기의 주교 성인인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설교가 매우 뛰어나 '황금의 입'이라고 불렸다. 한 교수가 들려준 백두산 천지에서 이경재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일이다. "이경재 신부님께서 내일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축일이니 그분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인이 좋은 설교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찬미하셨으니 저도 하나님께서 주신 글을 쓰는 탤런트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찬미하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씀하시며 세례를 주셨습니다."

1998년 5월 이경재 신부가 소천하고, 작가는 신앙의 고아가 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작가는 "신부님께서 세례주실 때 하셨던 말씀, 곧 '하나님을 증거하고 찬미하는 글쓰기'를 이제 미루지 말고 실천하자"고 결심했다. 그러고 나서 작가는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겠다"는 뜻을 세우고 공부하고 밑그림 그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 세월이 흐른 후 작가는 한국인으로서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의 생애를 소설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때 작가는 김대건 신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최양업 신부를 재조명하는 작업에 열중한 청주교구의 장봉훈 주교를 만났다.

한 교수는 "그 때 주교님이 '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어찌 이렇게도 오묘하실까요'라고 말씀하셨어요. 주교님은 최양업 신부님의 훌륭한 업적을 어찌 알리나 하면서 10여 년을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와 자료축적을 해왔고, 저도 10여 년 가톨릭 순교자 공부를 해왔는데 서로 그 사실을 몰랐어요. 그러다 우리가 그날 만난 것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이어 말했다.

"주교관을 걸어나오는데 무릎이 꺾이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하느님이 나를 쓰시려고 그랬구나. 그런 과정들을 거치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무릎 뼈가 터지고, 갈빗살이 드러나고, 피고름이 흐르며 옥 안에서 죽어갔던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쓸 수 있었겠는가. 내가 몸소 고문 받고 기절하고 깨어나보고, 갇힌 상태에서 혼자 새벽이 오는 것을 느끼는 등의 생생한 느낌들을 알게 해주셔서 순교자 이야기를 쓰게 하시려 했던 하느님의 뜻이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잘 나가던 작가'에서 하루 아침에 영문 모를 고문을 당하고, 삶이 파괴되었다가 이후 신앙과 역사를 만나 '화해에 이르는 삶'을 살고 있는 한수산 작가는 "인간이 궁극적으로는 평화가 있는 곳, 그곳에서 하나님께 가 닿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양화진문화원 목요강좌는 양화진문화원 홈페이지 (www.yanghwajin.re.kr)에서 무료로 다시 볼 수 있다. 오는 28일 열리는 목요강좌에서는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조선왕을 말한다'라는 주제로 강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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