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점심때문에 한 밤을 꼬박 세우다.

지진이 일어난 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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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진(kanglee29)등록 2011.03.14 09:02
동경에 사는 여성에게서 받은 이메일입니다. 지진이 일어난 당시, 일본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기에 기고합니다.

염려 연락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는 무사합니다. 아직도 작은 지진이 계속되고는 있지만, 동경은 무사합니다. 다만 동북지방의 쓰나미 피해가 크고,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이 있었다고 해서 걱정은 됩니다. 텔레비전에서는 모든 채널이 광고 방송없이 뉴스방송 일색입니다.

동경에서 제가 겪은 일을 기록해 보았습니다. 

어제 큰 지진이 있었을 때 친구 히로꼬와 같이 두 시간에 걸친 느긋한 점심을 마치고, 장소를 옮기려고 에비수역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천장, 기둥, 바닥이 심하게 흔들리고 사람들이 춤추는 것 같이 움직이는게 보였다. 사람들이 커다란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친구의 손과 함께 기둥을 붙잡았다. 몇 초 후에 지진이 멈추는 것 같더니 다시금 흔들리기를 반복하였다. 역에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전철이 전부 운행 중지되었다는 방송이 계속 흘러나왔다. 진동이 좀 뜸해질 때를 기다려 우리는 역 밖으로 나왔다.

역 밖에 나오니 인근 빌딩에 근무하는 회사원과 근처 호텔에서 졸업 사은회를 마친 학생이 정장차림으로 대피해 있다. 모두 기를 쓰고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는데 통화나 이메일이 여간해서 이어지지 않았다. 마침 히로꼬의 핸드폰으로 텔레비전 뉴스를 볼 수 있었다. 평소에 조그만 지진에는 익숙해져 있는 나도 이번 지진은 심상치가 않다는 걸 느꼈다.

더 큰 역으로 옮기면 버스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로, 에비수역에서 시부야역까지 30분 정도 걸었다. 걷는 도중에 군데군데 가게사람들이 테레비존 뉴스 방송을 밖에서도 잘 들리게 해주어서 대강 상황파악에 도움이 되었다.

시부야 역에 도착하니, 전철 및 지하철 노선이 폐쇄되었고 언제 다시 운행할지는 예상 불가능이라고 써 붙여 있다. 급히 역 앞 버스터미널로 가려고 고개를 돌렸더니, 버스를 타려고 줄지어 있는 사람이 광장을 꽉 메우고 있었다. 어찌나 사람들이 떼구름 같이 몰려 왔는지 도저히 거기에 낄 염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아무도 아우성을 치거나 큰소리를 내지 않았고, 마치 초상집에 온 것 처럼 침울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핸드폰 밧데리가 떨어져 근처의 핸드폰가게로 들어가 충전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곳은 전부 사용 중이니 이 층으로 안내한다면서 싱긋 미소를 보이면서 이 층까지 안내해 주었다. 고객이 미어져 짜증이 나고도 남을 상황에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 사람은 산속에서 도 닦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당분간 상황을 보면서 목이라도 축이려고 커피숍을 찾는데 많은 곳이 문을 닫았다. 열려있는 곳에는 많은 사람이 열을 짓고 있었다. 역에서 좀 떨어진 조그만 커피숍에서 운좋게 자리를 잡았을 때는 벌써 밖이 깜깜해져 있었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아이스커피 밖엔 되지 않는다며 나비넥타이 차림의 주인이 연방 고개를 숙이며 미안해 한다. 가격은 스타벅스 커피의 2배 이상, 양은 그 절반 이하, 그런데 얼음이 띄워진 아이스 커피는 상상외로 아주 아주 장인급 커피 맛이다. 한모금 마시고 주위를 둘러 보니, 우리처럼 발이 묶여 집에 못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여자는 다른 자리를 마다하고 같은 여자라 안심이 되는 듯 묵례를 하며 우리 옆으로 와 앉는다. 잠시 후 그 여자 앞에 핫커피가 배달되는 것을 보고, 가스가 들어온 것을 안 우리는 장인급 커피를 다시 맛 보려고 핫커피를 시켰다. 그 나비넥타이 주인은 "아, 아,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되풀이하면서 연방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나온 뜨거운 커피맛이 최고였다는 건, 당근.

배터리 충전은 했건만 몇 번이나 시도한 전화와 이메일 때문에 다시금 배터리는 거의 없어졌다. 남편이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있어 일단 안심, 친구 히로코도 남편이 귀가완료, 수험생인 아들은 친구와 같이 밖에서 발이 묶여 있다는걸 확인.

시간이 흐르면서, 호텔에 투숙할 각오를 굳힌 우리는 시부야 역에서 15분쯤 떨어진 곳에 있는 호텔을 향해 걸었다. 가는 도중에 잘하기로 소문난 초밥집이 눈에 띄었다. 일본속담에 "배가 고프면 싸움을 못한다"라는게 있다. 시장기를 많이 느끼지 않았지만 무작정 들어갔다. 주위에서 벌어지는 상황과는 딴판인, 호화 찬란한 초밥 정식. 건배하고 천천히 만찬을 시작해 볼까 하는데 종업원이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 이 빌딩을 30분 이내로 비워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져서 추가 주문은 못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먹고 있는 손님은 시간에 관계없이 천천히 들고 가라고 한다. 옆 테이블에 있는 여자 2명은 회사에서 지급받은 헬멧을 끼고 있었는데 연방 창피하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식당밖에는 영업시간 단축으로 거절당해서 돌아가는 손님들...  세븐일레분은 먹을 것을 찾는 손님으로 만원...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는 예정한 호텔로 갔다. 물론 호텔방은 만원이었고 로비와 각 층계, 통로에는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우리는 엘리베이트 근처 대리석 바닥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동경이란 도장이 찍혀있는 담요와 함께 따뜻한 수프가 배급(?)되고 중앙통로에는 텔리비전이 설치되었다.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나왔고, 핸드폰 연결이 잘 안되거나 배터리가 끊긴 사람들은 호텔에 있는 공중전화로 몰렸다. 이 호텔에 와서야 처음으로 공중전화를 통해 남편 상황을 소상히 알 수 있었다.

지진이 있었을 때 남편은 오전근무 후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대피하라는 방송이 있어 급히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단다. 역에 갔더니 전차가 끊겨서 걷기로 작정, 무려 3시간을 걸어서 집까지 왔단다. 집에 오는 도중 다리를 건너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걷고 있어서 도중에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단다. 집 근처의 대형슈퍼에 들렸더니 24시간 영업임에도 불구하고 문이 닫혀 있었다. 집에 오니 무너진 가구도 없고 별 피해는 없었으나, 가스가 자동스톱이 되어 온수가 안 나왔다. 수도와 전기는 영향이 없었다. 부모형제, 친척 등으로 부터 많은 전화가 왔다는 등.

자정이 넘어 모두들 꾸부려 잠을 청하는데,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저녁 식사 전에 마신 두 잔의 커피 탓? 히로코는 나한테 집에 못가고 이렇게 된 건 자기 때문이라고 미안해했다. 실은, 식당에서 나의 지난 생일을 축하한다고 금요일에 직장을 일부러 쉬면서까지 자리를 마련한 히로꼬였다. 난 그냥 다른 식당에서 토요일에 하자고 하였건만 그 식당 요리사가 유명한 일식집에서 수업한 끝내주는 요리사라면서 막무가내였다. 물론 히로꼬의 탓은 절대 아니다.

새벽 두 시쯤, 도저히 잠이 안 와 눈을 떠 보니 호텔 중앙로비에 있는 화이트보드가 눈에 들어왔다. 호텔종업원이 전철 개통 여부를 적고 있었다. 지하철 한조몬선 개통, 마루노우치선 개통, 치요다선 일부 개통, 제이아르선 개통 없음. 한조몬선을 타면 단 한번에 우리집까지 갈 수 있다. 히로꼬는 집이 멀어서 제이아르선만 타야 하는데... 새벽 5시쯤 되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호텔을 떠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떠나는 사람마다, 밤새 잠 한숨 안자고 화이트보드 옆에서 뉴스상황을 요약해서 게시하고, 길 안내 해 주고, 상담도 해주고, 마실 것 돌려주고...이런걸 공짜 체재자에게 싫은 표정 하나 안하고 친절을 베풀어 준 호텔 스텝들 한테 신세 많이 졌다고 깊숙이 절을 했다. 우리는 6시에 호텔을 나와, 지하철로 오오테마치역으로, 그리고 거기서 동경역까지 걸었다. 금융가인 오오테마치에는 회사에서 밤을 새웠으리라 믿어지는 회사원이 많이 나와 있었다.

동경역에는 많은 사람이 추운 바닥위에 담요도 없이 앉아 있었다. 아--호텔에서 따뜻한 변좌시트에, 친절한 서비스에, 담요며... 우리는 행운이었다. 동경역에서 히로꼬와 두시간 남짓, 몇 분 후에 히로꼬가 탈 전철이 개통된다는 방송이 있어 각각 귀가하기로 했다. 컨택랜즈를 지난밤에 빼버려 안경도 없이 반 장님이 된 나를 우려한 히로꼬가 전철역까지 바래다주고, 히로꼬는 10번이나 전철을 보낸 뒤에 무사히 승차해서 귀가했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불행한 상황이었지만, 나에겐 사람들의 친절에 몇 번이나 감동한 이틀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싱가포르로부터 구조견 5마리와 함께 구조원 동경 도착이라는 뉴스가 나온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 졌고,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남편을 보니 그역시 눈알이 빨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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