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들은 故 이태석 신부에게 열광하는가?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하느님께 따졌던 신부 이태석.

검토 완료

오찬호(och7896)등록 2010.12.28 14:42
나는 '빈자에게 다가섰다는' 성직자를 보고 울어본 적이 없다. 마더 데레사? 그녀에 대한 나의 입장은 미국의 독설가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입장과 비슷하다. 히친스는 그의 저서 "The Missionary Position"에서 데레사 수녀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Missionary Position은 직역하면 선교사의 위치겠지만 이 단어조합은 성행위시의 '정상체위'(남자가 여자의 위에 올라가는)를 은유한다. 그만큼 데레사 수녀를 개무시한거다. 우리말 번역제목이 이 내용을 그대로 대변한다. "자비를 팔다."  (책 내용은 예전에 오마이뉴스에 게재한 글을 링크거니 참고하길) - <테레사를 의심하지 않았던게 부끄러웠다>(오마이뉴스,2008.1.29)

종교가 아프리카를 그렇게 만들었는데..

이태석 신부가 대장암으로 투병할 때, 이 남자의 삶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뭐, 착한 신부님 한명 참 안타깝다는 정도로 생각했다. 이 신부님의 '형'이 예전에 내가 다니던 대구 범어성당에서 보좌신부님이셔서 그런 의미에서 더 친근하게 느껴졌을 정도?

그런데 선종 후 이태석 신부는 그야말로 이 사회의 폭풍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이건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때와는 전혀 다르다. 김 추기경의 선종이 일련의 보수적 가톨릭 '안'에서, 그래도 '민주화'에 대한 상징적 지지를 70-80년대에 여러 번 보여준 것에 대한 예의였다면, 대장암 말기로 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 젊은 신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그야말로 '개인에 대한 성찰'과 관련되어 엄청난 눈물로 이어지고 있다.

사실, 이런 활약을 보인 성직자는 일종의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딱 까놓고 말해서, 종교가 그러한 세상의 불평등 일등공신 아닌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아프리카가 그렇게 거지깽깽이 꼴이 된 것의 책임은 5할이 가톨릭이고 4할이 개신교이고 1할이 이 두 종교와 결탁한 자본주의 아닌가?

아프리카를 초토화시킨 가톨릭의 사제가 그곳에 가서 생명을 구하는 삶을 산다? 그리고 존경을 받는다? 그런데 이 존경이 가톨릭을 계속 '유지'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이태석 신부는 하느님께 분명히 말했다. 왜 이런 세상을 보고만 있었냐고.

그런데 이태석 신부의 삶을 보면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 굉장히 불순하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왜 이렇게 착한(?)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엄청 고민했는데 이 노래를 듣고 답이 풀렸다. 이태석 신부가 만든 '묵상'. 주일학교를 꽤나 열심히 다녔던 나는 이 노래를 잘 안다. 후렴구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평화위해~"라는 멜로디는 지금도 기억한다. 다만 그때는 이 가사가 작사가의 어떤 고민에서 등장했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태석 신부는 무슨 고민을 하면서 이런 노래를 만들었을까?

이 묵상곡은 "하느님 만세!"를 결코 외치지 않는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돕게 해 주세요~"라는 '나에게 은총 주소서'라는 건방진 기도도 아니다. 오히려 매몰차게 묻는다 "왜 당신은 이들을 보고만 있었는가!"라고. 추위, 굶주림, 총부리에 희생당하는 아이들. 그들이 무슨 죄냐고 따진다.

왜 인간은 닫힌 감옥에서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는지를 신부는 답답해한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단 한 음성만을 듣는다. '사랑'. 그건 하느님의 입장에서도 참으로 별 수 없는 대책이다. "휴~ 그래. 나도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의미.

사회구조적 모순을 따지는 것을 굉장히 금기시하는 종교에서 하느님의 노여움이 아닌 이런 푸념은 "내가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지금 너희들에게 사랑 외에는 할 말이 없어서 부끄럽다!"는 하느님의 고해성사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태석 신분의 불만이 충분히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노래는 '주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님'자를 빼버리고 '주'라고만 한다.

이태석 신부의 묵상은 단호하다. "하느님 은총주세요!"가 아닌, "하느님 왜 그러셨나요!"라는 아쉬움의 강력한 표출이다. 그런데 이건 빈민들에 대한 당연한 예의다. 그렇지 않고 가난한고 불쌍한 사람들을 "저들을 도우면서 제가 보람을 느끼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의 도구로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비인간적'인 모습이 어디에 있다 말인가?

그래서 이태석 신부는 하느님을 용서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방향점을 선포할 뿐이다. 그건 "세계평화"다. 자신이 성직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하고 살겠지만 빈자 몇명을 돌보면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빈자가 발생한 '구조'의 해결이 가장 큰 과제임을 반드시 '당신'(주님)에게 기도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거다.

묵상 - 이태석 작사, 작곡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 말씀 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필자의 개인홈피에서 들을 수 있음 :http://www.cyworld.com/och7896)

종교는 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서 앞서 말한 '개인의 성찰'은 우리가 '봉사하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단순한 질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보다 '근원적인 고민'을 과연 해 보았는가에 대한 반성과 연결된다. 우리는 입으로만 '봉사, 봉사' 그런다. 하지만 가장 본질적으로 이런 '봉사'을 간절히 바라는 대상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고민하는 것이 바로 그 '봉사를 받아야하는 대상'들에 대한 진정한 예의인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이론가, 사회운동가들이 이런 것의 구조적 문제를 주장할때는 전혀 와닿지 않았는데 이 신부는 말 그대로 '실천'으로 우리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느끼게 해 준다. '세계평화'. 이 얼마나 단순한 명제인가. 그는 "하느님의 위대함"을 전파하는 것도 아니다. "아프리카의 복음화"도 목적이 아니다. 오직 평화다. 아. 오금이 저린다.

<울지마 톤즈> 혹은 이태석 신부와 관련된 다큐는 사람의 '선함'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지를 생생하게 증명한다. 앞으로 가톨릭이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사회에 던질 수 있는 '실천'을 보여주길 간절히 원한다. 그것이 세상을 그렇게 만든 '자신들'에 대한 치열하고도 '유일한' 반성 아니겠는가? 물론 나부터도 달라져야 하겠지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개인블로그 http://blog.daum.net/och7896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개인블로그 http://blog.daum.net/och7896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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