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보수 서로 무시말고 교육을 보자

교육을 다양체로 보면 대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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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주(ericrow)등록 2010.11.01 08:31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의 욕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나는 피와 살로 되어있는 우리의 몸과 그 몸에 사는 영혼에게 편안함을 제공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런 욕망은 적은 힘을 들여서 최대의 편의를 얻으려는 효율성의 원칙에 의해 충족될수록 만족도가 높다. 사람들이 이 편의를 효율적으로 얻는 법을 연구하는 것이 경제학과 과학으로 대표되는 실용학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영혼에게 충만함을 주고자 하는 욕망이며, 이는 단지 영혼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몸이 피곤하고 힘들어도 그 몸을 움직여 뭔가를 이루려 하는 것은 그런 충만함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 효율적이지 않더라도 결과를 반드시 얻어야 하는 효과성(?)의 원칙에 따라 충족된다. 사람들이 이 충만함을 얻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예술과 철학, 역사와 문학과 같은 인문학과 예술이다.

나는 이 두 욕망을 모두 충족시키고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자 행복이며 자아실현이라고 생각한다. 들뢰즈가 말했던 다양체의 개념처럼 인간의 몸은 온전히 물질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의 영혼 또한 온전히 정신적인 것이 아니며 이 둘은 혼재해 있는 것이고, 이 둘이 바라는 욕망인 편의와 충만함 역시 온전히 편의만을 또 충만함만을 추구할 수 없는 것이고 이는 인간의 욕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본다.

육신의 편의를 버리고 숭고한 가치를 추구함은 충만함만을 추구하는 완고함이요 그 결과가 좋으면 종교적 승화일 것이다. 반면 영혼의 충만함을 버리고 육신의 편의만을 도모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할 것이다. 예를 들어 돈을 통해 육신의 편의만을 취하는 사람은 흔히들 어리석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버는 데에 인생을 걸고 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리석은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편의를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혼의 충만함도 얻기 위해 돈을 원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는 예술과 인문학도 돈으로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을 고양할 수 있는 문화를 누리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도 그들은 돈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다. 돈은 효율성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인문학은 효과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를 지탱하는 돈이 효율성에 의해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문제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곳은 이 지점이다. 이제는 돈에도 효과성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는 다양체라는 인식이 필요하고, 예술과 인문학도 효율성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는 다양체라는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 예술을 하는 사람이 이제 돈을 무서워하거나 더럽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는 아직 그 진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 사람은 예술과 인문학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 역시 돈의 진수를 모르는 사람이다. 돈을 잘 버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흔히 예술성을 발견한다. 또 예술과 인문학을 잘하는 사람에게서 장사꾼의 본능을 느낄 수 있다. 박찬욱과 JK 롤링이 그러하며, 안철수와 애플 사장 스티브 잡스가 그러하다.

교육은 어떠한가? 교육은 애초 인간의 영혼을 고양하고 그 육신을 건강하게 하여 조화로운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며, 태도 변화를 통하여 바른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본질이다. 교육은 애초에 다양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노예가 삶의 영위에 필요한 편의를 담당하던 고대에는 귀족들만이 교육의 대상이었고, 효율성을 추구하는 실용학문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충만함을 추구하는 인문학이 중요했다. 그것이 대학의 기본 정신이기도 하다.

부르주아 혁명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공교육이 들어섰다. 부르주아는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새로운 지배세력이었다. 그들은 주로 효율성에 의해 세상이 움직인다고 믿는 사람들이며, 이들에 의해 경제학과 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했다. 그들은 적어도 제국주의 국가에서 자국 내에서는 나눠 먹을 파이를 키웠으며, 하층민이 받을 파이를 키우는 데 기여했다. 따라서 그들의 교육적 관심은 과학 기술과 실용학문이 이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하리라는 신념에 기초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 교육 정신이 오늘날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교육 역시 돈에 의해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귀결이다. 물론 (예를 들어 조선시대 과거를 통한 피지배 세력의 통제의 전통이 이어져왔다는 등의) 다른 다양한 원인도 있겠지만, 다양체로서의 교육의 의미가 퇴색되고 효율성에 입각한 경쟁 교육이 횡행하는 것은 부르주아가 주도하는 교육이기 때문일 것이다.

평범함 사람들이 믿는 것은 이것이다. 귀족은 특권을 지니고 편안한 삶을 누리면서 인문학이다, 예술이다 하며 고상한 척 한다고 본다. 서민들의 질곡 있는 삶과는 무관한 얘기만 한다고 본다. 서민들은 귀족과 인문학의 글쟁이들을 믿지 않는다. 부르주아는 고상한 척 하지 않는다. 부르주아는 나는 서민이라고 말한다. 나는 인문학, 예술 이런 거 잘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잘 먹고, 잘 사는 법은 안다고 말하고, 그것이 시급한 서민은 그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서민은 예술, 체육, 역사, 철학 이런 것은 먹고 살만 해지면 배워도 좋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나라 교육에서 부족한 지점은 바로 이런 생각이 만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육의 균형이 무너지고 실용학문만이 득세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인문학 강의가 사라져 가고, 회계학과 같은 수업이 필수 과목이 되었다는 것도 그렇고, 고등학교에서 미술, 체육, 음악 시간이 입시를 위한 국영수 수업으로 대체되어 가는 것이 그렇다.

이제는 실용학문 만큼이나 인문학과 예체능 교육을 중시해야 다양체로서의 교육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 실패한 영화는 대중성을 너무 생각한 나머지 새로움이 없거나, 예술성을 너무 생각한 나머지 대중성이 없는 것이다. 이 둘이 조화를 이뤄야 성공작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학업 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제도를 개혁하고, 새로운 교수 방법을 도입하고 실험하는 것, 교원의 능력을 평가하여 계속적으로 노력하게 하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학생들이 육체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이루려는 의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실용학문으로만 이룰 수 없다. 이것은 인문학을 통해서, 예술을 통해서, 체육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실용학문은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편하기 위해서 공부하게 된다. 편하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모순은 실용학문에서 이해하기 힘들다. 아이들은 요령을 찾게 되고, 공부의 정도인 수양과 인내를 모르게 된다. 그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가르치는 곳이 사교육이다.

사교육도 잘되는 곳을 보면 이렇다. 아이들을 잘 상담해주고 의지를 키워주고, 학습 동기를 높여주는 곳이다. 이는 사교육도 다양체이기 때문에 효율성을 목적으로 하지만 그것을 공부하는 과정은 효과성의 원리에 의해 습득하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학교는 효과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사교육처럼 효율성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도 필요하다.

공교육도 편의와 충만함을 동시에 도모하는 다양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작금의 공교육이 편향적이고 비교육적이며, 성공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율성을 기반으로 (우열반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수준별 이동수업을 하고, 일제고사를 보고, 국영수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재편하면 분명히 학력을 높이는 데 효율적일 것이다. 그러나 학력을 왜 높이려고 하는가? 먹고 살기 위해서? 아니면 편의를 높이기 위해서? 이것만이 교육의 목적이라면 이는 어리석은 교육이다. 또 고상한 예술과 인문학만 가르쳐서 편의를 추구할 수 없다면 이는 완고한 교육이며, 잘해야 승화된 숭고한 교육이다. 우리는 어느 교육으로 갈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이 둘의 조화이며, 균형이다.

이미 균형은 무너졌고, 효율성은 교육계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 이제 정부는 인문학과 예술과 체육 교육에의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자명하다.

문제는 이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흔히 보수적인 교육계 고위인사들은 대개 보수적이다. 이들은 충만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세상 물정 모르는 숙맥으로 볼 가능성이 높고, 변화를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으로 무시할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교육을 다양체로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그들을 존중할 줄 안다. 이에 반해 소위 진보적이라는 교육계 인사들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 무시하고, 그들을 모두 속물이라고 매도할 가능성이 크다. 그들도 충만함의 가치를 알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사람들도 많다. 교육을 다양체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이것을 이해하고 서로를 존중한다. 진보는 보수에게서 그 체계성과 효율성을 배워야 것이며, 보수는 진보에게서 그 열정과 충만함, 그리고 의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서로 무시하지 말고 교육을 다양체로 보고 대화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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