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에 대한 극도의 혐오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라틴 아메리카 단편선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검토 완료

박연주(gotozoo3)등록 2010.07.10 18:59
1816년 발간된 소설이 최초의 소설인 만큼 라틴아메리카의 소설은 젊다. 대다수 대륙의 소설들이 그보다 훨씬 이전 시기를 최초의 소설 시기로 잡고 있음을 생각해본다면 이들의 젊음을 짐작하기 쉬울 것이다. 젊다는 것은 종종 안 좋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혈기왕성함으로 인한 에너지를 의미하기도 한다.실제로 라틴아메리카의 소설에서는 그러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기존의 소설에서 없던 기법들, 생각 그리고 특징들, 쉽게 떠올린다면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소설을 떠올리면 된다. 그것이 새로움이다. 특히 이 대륙 소설에서 엿볼 수 있는 제3세계적 문명관은 독자에게는 가장 큰 수확으로 다가온다.
이 책 역시 몇몇의 단편에서 극도의 문명에 대한 혐오를 읽을 수 있다 예컨대 레오뿔도 알리스의 <안녕, 꼬르데라!>에서 기차는 좋은 친구였던 꼬르데라와 오라버니를 읽게 한 원흉이다. 이러한 생각은 <안녕, 꼬르데라>의 한 대사로 압축되어 표현된다.

"할머니 암소가 떠나던 그날처럼, 오빠는 저 멀리로 갔어. 세상이 오빠를 데려가버렸어.
꼬르데라가 소고기가 되어 대식가들과 졸부들의 밥상에 오르기 위해 떠났듯이,
오빠의 영혼과 육신은 세상의 광기와 타인의 야망을 위한 포신이 되기 위해 떠난거야."
-본문 23쪽 발췌-

문명에 대한 혐오는  <전철수>와 <검열관>에서 더욱 빛난다. <전철수>는 전철수 노인과 T시로 가고 싶어하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확히 기차가 출발해야 하는 그 시간에 역으로 온 젊은이 앞에 한 노인이 나타난다. 젊은이는 기차가 출발했느냐고 묻지만 노인은 젊은이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기  전에 이 나라에 처음이냐고 그것부터 묻는다. 그러면서 노인은 기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노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참담하다. 그가 말하는 기차는 사람들이 싸움의 장소이고 기차는 원하는 곳에 서지도 않는다. 노인은 젊은이에게 네가 T시로 가고 싶어 하지만 사실 갈 수 없을거라는 엄포마저 놓는다. 노인의 이야기는 그것이다. 이 기차는 위험해서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다들 타고자 하고 결코 목적지로 데려다주지 않지만 다들 불평하지 않는다. 언뜻보면 이는 라틴아메리카의 낮은 경제상황-기차를 제대로 만들지 못할 정도의- 을 비웃고 있는 듯하지만 보다 보편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것이 과학기술과 문명을 이야기함을 알 수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누구나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 그것이 내 목을 죄여올 것을 알지만 갖고 싶은것 그리고 절대, 결코 그것이 내 목적대로 나를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 전부 닮지 않았는가? 아이폰만 생각해도 그렇지 않은가?

아이폰의 열풍을 타고 <시사 2580>에서 스마트폰의 대세에 대해서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다. 몇몇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스마트폰을 나눠주었고, 어느 애널리스트는 출근길에 스마트 폰으로 주식정보를 얻는다는 내용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것은 좀 더 촘촘해진 판옵티콘이다. 그보다 효과적인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디서든 인터넷에 접속되고 자료전송이 가능하다. 심지어 트위터를 이용하면 실시간 감시 아닌 감시도 가능하다. 휴가도 없고 출근길의 여유도 없다. 출근길 스마트폰으로 주식동향을 살핀다는 저 애널리스트는 출세의 동아줄 하나는 더 생겼을지 몰라도 삶의 여유 하나는 날려버렸다. 그게 문명이다.

<검열관>은 보다 더 명확하게 판옵티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검열관이란 말 그대로 편지를 검열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이다. 한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를 빼돌리고 싶다는 이유로 편지 감시국(?)의 근무를 자처한다. 편지를 빼돌리다가 손이 잘리는 사람, 해고당한 사람을 본 그는 열심히 일한다. 물론 열심히 일해서 그가 쓴 편지를 빼돌리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는 그 사이에 일에 동화된다. 누구보다 열심히 편지를 빼돌린다. 그야말로 유능해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결국 그의 편지 빼돌리기에는 실패한다.왜 그럴까? 그는 그 일에 동화된 나머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낸 편지마저 부적합 판정을 주었고 이로서 그는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 이러한 몇개의 단편을 순차적으로 읽다보면 상당히 라틴아메리카 소설이 반문명적이라는 생각이 들며 불현듯 유나바머 선언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1.인류에게 있어 산업 혁명과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산업 혁명 덕분에 '선진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평균 수명이 대폭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는 불안정해졌고, 삶은 무의미해졌으며, 인간은 비천한 존재로 전락했다. 심리적 고통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으며(제3세계의 경우에는 육체적 고통과 함께), 자연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다. 앞으로 테크놀로지가 계속 발전할 때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아예 사라져 버릴 것이고, 자연은 더욱 극심하게 파괴될 것이다. 또한 추측컨대 사회적 혼란과 심리적 고통도 훨씬 더 극심해질 것이며, '선진국'에서도 역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유나바머 선언문>중에서

지독한 문명혐오론자였던 시어도어 카진스키는 수차례의 우편물 폭탄테러 이후 이른바 <유나바머 선언문>을 뉴욕타임즈와워싱턴포스트지에 보낸다. 그 글의 제일 앞에 위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저 구절의 어느 곳에 아니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사실 우리는 직면해있고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은 저 구절에서유일하게 ()안에 들어간 부분이다. 제3세계의 경우, 심리적 고통과 함께라는 부분 말이다. 이른바 제3세계에 있어서 문명은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이를 이해하는 것이 라틴아메리카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문명에 대한 혐오와 반문명성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문명이 인간성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사람을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을 겪어보지 못했던 1907년 그저 문물이 신기하고 편리했던 그 시점에 김광수는 <만하몽유록>이란 소설에서 주진촌이라는 이상세계를 그리며 산업경영면에서의 효율성에 대해서 설명한다. 문물의 편리와 이기로 인해 만들어진 이상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무려 15년전에 쓰인 레오뿔도알라스의 <안녕 꼬르데라>는 문명의 폐해를 말한다.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바로 이 차이가 심리적 고통이 아닌 육체적 고통에서 오는 것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존재하고 있던 멀쩡한 대륙을 신대륙이라고 거짓말 했을 때부터 라틴아메리카의 문명에 대한
혐오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보다 나은 기술, 보다 나아보이는 무기들을 가지고 있던 서구인들은 라틴아메리카의 땅을 피로 덮게 만들고 그들을 착취하였다. 대신에 그들은 그 숲을 베고 도로를 세우고 교회를 만들고 마을을 세웠다. 피로 얼룩진 도로이자, 마을이며, 교회였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역사가 숨어 있다. 문명이란 착취의 다름이 아닌 것이다. 단편소설에서 나오는 문명에 대한 반감과 혐오는 이러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그 기원을 같이하고 있다. 좀 과장되게 말한다면 이는 피에 새겨진 기억이고 피에 아롱 되어진 금기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문명은 그들을 착취했다. 미국의 선진기술은 NAFTA를 통해 현 라틴아메리카를 병들이고 있지 않은가?

지속되는 문명의 잔혹성, 책에서 나타나는 극도의 문명 혐오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이 아니라 고개가 주억거려짐은 그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당한 착취를 문명세계, 문명세계에서 온 사람, 문명이 보다 발달한 국가와의 조약이 라틴아메리카에 남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존 밀림을 벌목하는 뉴스를 보며 생각한다. 아마존 밀림을 벌목하는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나 국민들에게 우리는 왜 손가락질을 하는가? 그들에게 그걸 벌목케 하는 동기를 준 건 누구인가? 반성할 일이다. <아마존 개발>앞에 반성할 사람이 우리일까? 라틴아메리카에 사는 이들일까? 그들의 자연과 자원과 생명을 빼앗아 부를 축적한건 누구인가? 나는 아니라고 하지말자. 당신 손에 들린 탐앤탐스 커피가 엔제리너스커피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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