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은 <이단>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장> "여성문제 무서워서 글을 쓸 수가 없다"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검토 완료

오찬호(och7896)등록 2010.05.27 13:14

이 글은 내가 온라인이프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자가 바라보는 남성계 5회 - 여성문제 무서워서 글을 쓸 수가 없다>의 <한지환씨의 반론글>에 대한 재반론이다.

 

학자와 운동가. 이것이 '레벨'의 차이였나?

 

한지환씨는 본인이 아직 학부생이기 때문에 남성학자로서 불리기보다 남성운동가로 불리기를 희망했다. 의문이 하나 있다. 학부생을 '학자'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은 한지환씨의 겸손이니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학자는 아니지만 '운동가'는 괜찮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른바 학자는 운동가보다 '상위' 클래스? 그럼 운동가는 이른바 천민? 여기에는 엄청난 권위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페미니즘이 이 사회 안에서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유와도 관련 있다.

 

사실, 페미니즘은 우리나라 사례와 '딱' 맞아떨어진다. 다른 나라는 "그렇게 남성을 모함하지 말라!"고 반론을 펼치지만 우리나라는 "그러한 차별이 당연한 것이다!"면서 오히려 아주 쿨하게 차별을 인정한다. 페미니즘 이론으로 우리나라를 조명할 때, 설명되지 않는 지점은 없다. 다만 설득을 안 당할 뿐이지.

 

여기서 설득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남성화된 사회전체의 문화'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페미니즘이 아무리 이론적으로 들을 수 있는 내용인들 페미니스트는 받아주지 않는 우리나라의 현실, 즉 학계의 가부장적 권위가 특정한 집단을 '그냥 싫어서' 배척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이 활발히, 혹은 긍정적으로 유통되지 못한 것은 이것이 이른바 사회운동(social movement)의 성격을 지닌 채, '활동가'(운동가)로부터 담론이 발화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 때문'에 꼬투리가 잡혔다는 것인데 이는 '운동'으로서의 이론이 '학문'으로서의 이론보다 낮은 단계라는 인식이 선비의식이 풍만한 학계에 만연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학자들이 사회적 활동을 '사실은 용기가 없어서 못하면서' 이를 '보다 고차원적인 이론을 고뇌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이유로 둔갑시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다. 그 합리화는 學(~~logy) 혹은 ~주의(~ism) 라는 것이 이른바 '운동'(movement)의 상위단계, 혹은 잠재적 토대로서 가치가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여성주의는 '이해'하지만 여성주의자에서 '설득'당하는 것을 학문적 자존심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지환씨의 주장을 보면 "페미니즘에는 동의하지만 그런 식으로 설득해서는 안된다!"라는 훈계형 논조가 굉장히 많다. 그렇다면 혹시 한지환씨는 페미니즘의 결점보다 페미니스트의 '수준'에 화가 나서 이렇게 반기를 드는 것은 아닌가?

 

상상력은 판타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truth)이 아니라, 상상력(imagination)"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 상상력이 사실적인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요? 만약 선생님의 말씀처럼 연구자나 사회운동가가 사실적인 근거도 없이 자신의 상상력에만 의존해 사회 문제를 다룬다면, 그것은 '학문'이 아닌 '3류 소설'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실제로 인터넷상을 둘러보면 젠더(Gender) 문제와 관련해 그런 허구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선생님 같은 전문가께서 이들의 행동을 옹호하시지는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남성학은 진실(truth)인가? 그렇다면 이건 협박이다. 이건 목사가 법당에 가서 이스라엘 민족이 어쩌고를 외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절에서 '아멘'(그대로 이루어지소서)이라는 응답은 없을 것이다. 남성학이 '믿음'으로 소통되길 원한다면 다른 지역에서 사당을 하나 차리면 된다. 그리고 명심하길. 남성학과 여성학은 개신교와 가톨릭처럼 '친척뻘'은 되겠지만 절대 한 식구는 아니라는 것을.

 

남성학이 정말로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진리야~"라는 협박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때?"라면서 타인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설득을 중요시해야 한다. 그런데 자꾸만 "내가 진실이다. 너희는 진실이 아니다"만 반복하면 되겠는가.

 

여기서 한지환씨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상상력의 사회과학적 의미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상상력은 판타지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상상력은 미토스(mythos), 즉 일종의 허구의 개념이 아니라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현실에 존재하는 토대위에서 머리를 쥐어짜는 나름의 로고스(logos)를 말한다. 괜히 '力'자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상상력은 'as if'(마치~인 것처럼)의 속성이 있다. 자신이 본 것을 모방하고 흉내 내는 것으로부터 상상력은 출발한다. 나의 의도를 '여성부가 여성 성기를 상징하는 조리뽕을 없애자고 했다!'는 수준으로 이해했다면 실망이다.

 

영화 <밀양>의 한 장면 학문은 '듣는이'를 고개 숙이거나, 혹은 '오열' 이나 '회개'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학문일수록 '이단'이 많다. 그것이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고민하는 자유를 보장받은 '근대학문'의 특징이다. 지혜를 상징하는 아테나 여신이 괜히 제우스의 '머리'를 뚫고 탄생한 것이 아니다. ⓒ 파인하우스필름(주)

 

협박은 금물

 

전통사회에서 여성은 성차별과 성적(性的) 억압의 피해자이며, 남성은 가해자 내지 수혜자"라는 페미니즘의 기본 전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고찰 없이는 남성주의와 관련된 어떠한 논쟁도 생산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학문을 진리의 개념에서 이해하면 이런 글쓰기로 이어진다. 이른바 남성학은 '새로운 시각'이고 이 조건이 '생산성'을 담보한다는 것이다. 이건 지금 선거 후보들이 나누어주는 명함들에 박혀있는 거짓말과 다름없다. "나 안 찍으면 나라 망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학문은 '다른' 시각만 있지 그 다른 시각이 기존의 것을 '구리게' 만들 수 없다.

 

사회ㆍ문화적 구조가 허락한 권리와 그로부터 강요된 굴레를 거부한 소수의 선각자(先覺者)들의 존재를 간과할 경우,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고찰할 수 없을뿐더러, 심한 경우 전통적인 성별 이원체계를 타파할 동력마저 잃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이러한 집착이 주술(呪術)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교주'로서 인정해버린다. 이른바 "이걸 모르면 다른 것은 다 헛소리"라는 주장이 등장한다. 결국 남성학자는 선각자가 되고 남성학은 엄청난 의미의 '동력'이 되었다. 무서워라.

 

(한지환씨의 주장을 통해 본) 남성학은 "남자들 때문에 여성이 이렇게 길들여졌다"는 것처럼 남성들 역시 "여성들 때문에 치사적(致死的)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여성들 때문에 남성이 이렇게 길들여졌다는 것이다. 목숨 걸어 사냥을 했고 그것처럼 지금 노동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밥하고 빨래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틀렸다. 왜냐하면 "너는 집에 있어라. 내가 돈 벌어올께"라고 말한 것은 분명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어버렸다. 그리고 말한다. "왜 나를 내 보냈냐"고. 그리고 남성학은 이를 "보아라! 남성의 이 치사적 역할을!"라고 외친다. 이건 협박이다.

 

이러한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우리는 '현실'이라고 하더라. 남자들 스스로 "남자는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한다!"고 북치고 장구 쳤다.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 남성학은 이러한 남성들 때문에 피해를 보는 남자를 집중 조명해야 하는 것 아닌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온라인이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05.27 13:08 ⓒ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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