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 민씨 정권과 MB - 한나라당 정권을 생각하다.

남북관계의 파탄을 우려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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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fine35)등록 2010.05.10 11:18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다보면 가끔 가슴이 서늘함을 느낄 때가 적지 않다. 그것은 150여 년 전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한국 근현대의 시작을 열었던 흥선대원군과 고종 - 민씨 정권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근대사회로의 진입이라는 민족적 전환기에 있어 적절치 못한 선택을 한 주체들이라는 면에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 중 흥선대원군의 경우는 비록 복고적 경향을 띠었으나, 세도정치세력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의 정치 ․ 사회 ․ 경제적 독점을 타파하고 자영농에 기반한 소농경제체제를 안정화시킴으로써 국가적 개혁의 틀을 닦았다는 데에서 일정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한계는 강력한 왕권의 부흥이라는 전근대적 목적에 얽매어 근대적 사회로의 진전에 대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고, 서구세력의 아시아 침략이라는 세계사적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를 당시 아시아 최대 제국이었던 청을 영국과 프랑스 등이 유린하고, 이 틈을 이용한 러시아가 연해주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면서 만주와 한반도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던 위기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강요받았던 선택이라는 한계상황이라 변호할 수는 있을 것이다. 허나 그것으로, 동아시아의 전통적 조공 외교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라는 제한적 성과에 도취되어 변화와 개방의 기점을 놓쳐버린 점에 대해 변호할 수는 없다.



이보다 더욱 절망스러운 사건의 전개는 고종 - 민씨 정권의 집권 이후 벌어졌다. 흥선대원군이 유지하고 있던 최소한의 민중적 지지도 없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도정치세력과 다시 타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권하자말자 취한 정책이 흥선대원군이 이뤄놓은 최대의 개혁 중 하나였던 서원철폐를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강화도 조약'이라 불리는 《조 ․ 일 수호 조규》등을 체결하면서 개화 ․ 개방 정책을 추구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제1차 《조 ․ 일 무역규칙(통상장정)》의 내용에서 대책 없이 무관세 조항을 설정해준 것이나, 《조 ․ 일 수호 조규 부록》등에서 이루어진 각종 불평등 조항의 체결 등은, 단순히 국제관계에 무지했던 조선 정부가 일본의 기만적 책략에 휘말려 당한 일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일들이다.



즉 고종 - 민씨 정권이 보인 최대의 한계는, 그들의 통치 행위에서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노력 이외에는 별다른 의의를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것이 극명하게 드러난 두 사건이 있으니, 첫 번째는 《텐진 조약》 등을 고려치 않고 동학농민운동에 맞서 청국군을 끌어 옴으로써, 자국의 영토 내에서 청 ․ 일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이 이후에도 청 ․ 일 전쟁의 종전과 삼국간섭의 강제 등과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국가의 독립을 꾀할 수 있는 회생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치적 판단 기준은 여전히 외세에 기대어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사욕의 추구였다.



그 결과로 일어난 것이 바로 을미사변이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노골화되는 가운데에서도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미국과 러시아에 기대어 정권을 유지하려 했던 소극(笑劇)이 참극(慘劇)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 평가야 어떻든 간에 왕조 국가의 상징 중 하나인 왕후가 타국의 부랑아에 의해 살해당하는 치욕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한 이후에 고종 - 민씨 정권은 이에 대해 여전히 관망적일 따름이었다. 을미사변 이후의 친일정권을 붕괴시킨 것은 독립협회와 을미의병으로 대변되는 민중의 투쟁이었고, 여전히 러시아의 보호 안에 숨어 있던 그들은 국가의 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팔아넘기며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게 전부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이러한 고종의 모습에, 그나마 그를 옹호해왔던 알렌마저 다음과 같이 고개를 젓고 말았다고 한다.



… 미국 공사 안련(알렌)이 가고 모간이 대신 왔다. 안련은 우리나라에 머문 지 수십 년 되었는데, 돌아갈 때 사람들에게 탄식하며 말했다. "한국 백성들이 불쌍하다. 내 일찍이 구만 리를 돌아다녔지만 상하 4000년에 한국 황제 같은 이는 처음 보는 인종이다." …



그로부터 110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른바 보수세력은 '잃어버린 10년' 동안 '좌파정부'가 북한에 대해 퍼주기만 하다가 천안함 사태를 일으키고, 금강산 사태를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주적' 개념을 되살려 북한에 대한 안보의식을 강화하고, 그들에 대해 '철저한 응징'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천안함 사태는 논외로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과연 그 10년간 이루어졌던 햇볕정책이 북한에 대한 퍼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는가?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전(前)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공동발표에 의해 이루어진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제5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 경제협력사업을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2009년도 기준으로 북한의 지하자원 가치만 하더라도 3,700조 ~ 4,000조에 이른다고 한다. 남북한의 통일비용을 최대치로 계산한다해도 3,000조 정도이며, 현 남한의 총 자산 가치가 6,000조 정도라니 그 가치가 얼마 만한지 짐작이 갈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계산을 기계적으로 대입할 수는 없다 해도, 이후 기대․파생 효과가 얼마만큼의 가치를 생산할 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10년의 성과가 3년 여 동안 이어진 남북 대립의 결과로 사라진 지금, 북한의 지하자원 채굴권 등은 중국 등의 열강으로 계속해서 유출되고 있다. 한국과 미국 주도의 봉쇄 - 압박 정책으로 인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중국과의 유착을 강화하는 길 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다지'라는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막대한 금을 매장하고 있던 운산금광 등, 민족의 미래가 될 지하자원을,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아낌없이 팔아넘겼던 고종 - 민씨 정권. 그들의 시대와 안보논리의 강화를 위해 4,000조가 넘는 북한의 지하자원의 채굴권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기하는 2010년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다른 지, 나는 잘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디지털경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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