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들의 처참한 '가난경쟁'. 그리고 '비판'의 인문학

조선일보 <비판의 인문학, 통찰의 인문학>(이선민 문화부장)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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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och7896)등록 2010.04.25 17:23

조선일보에 아래와 같은 칼럼이 실렸다. 인문학의 비판정신을 문제삼는 내용이었다. 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칼럼에 말 그대로 '대안없는 반대'를 하는 것이 특기다. 아래 칼럼에 "왜 그럴까?"라는 물음을 던져보자. "왜 비판의 인문학이 학교 '안'에 그렇게 많은 것일까?"라고 물음을 던져보자.

 

하나는 인문학의 핵심이 '비판'이라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인문학의 힘은 '통찰'에 있다는 주장이다. 얼마 전 중앙대의 학과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독문학과 학생이 학교 내 공사장의 타워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면서 뿌린 유인물에는 전자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이 학생은 "비판적 기능 수행을 본질로 하는 인문학 본연의 모습에 대한 대학본부의 몰이해와 반감"을 강하게 비판했다.

 

(...) 하지만 사회의 인문학 코스를 두드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사뭇 다르다. (...) '석학인문강좌' 강의실을 꽉 메운 수강생들은 "지적 욕구와 호기심이 펄떡펄떡 뛰는 것을 느낀다" "생각의 폭을 넓히고 싶었는데 기대보다 더 다양한 사고를 접하게 돼 뿌듯하다"고 말했다. 인간과 사회를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하는 통찰이야말로 인문학에서 얻을 수 있는 소득이라는 것이다.

 

'비판의 인문학'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인문학을 교환가치나 취업률 등의 잣대로 접근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그러나 인문학은 그 자체가 부(富)와 바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결코 반(反)자본주의이지는 않다. 오히려 인문학적 통찰은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 근래 들어 우리 대학에서 인문학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는 '비판의 인문학' 지지자들의 목소리가 너무 강한 것이다.

 

<조선일보 이선민 문화부장의 칼럼 바로가기 - 비판의 인문학, 통찰의 인문학>

 

가난을 경쟁하는 대학원생들

 

인문/사회 대학원생들의 삶은 불쌍하기 짝이 없다. (물론 여기서 경제, 경영학과 등은 제외) 돈 안되는 학문을 공부한답시고 앉아있는 자체가 아주 서글퍼보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더러운 현실 속에서 꼴에 또 생존하겠다고 몸부림을 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웃긴 것은 살기 위한 '빈곤극복' 모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빈티나게 보여야지만' 얻을 수 있는 바늘구멍같은 혜택에 목숨을 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늘상 "가난을 경쟁"한다. 참고로 이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경쟁이다.

 

이 경쟁의 첫째 조건은 "언제나 가난하게 보여야 하는 것"이다. 이미 없는 자들끼리 모여 있는 판국인데, 여기서 '더' 가난해 보여야 한다는 것은 아주 꼼꼼한 스펙관리(?)를 필요로 하는 법.

 

밥을 먹더라도, 커피를 한잔 하더라도, 그리고 어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더라도 '있는 티'가 나면 안된다. 티가 나면 장학금이든, 조교업무든, 프로젝트 연구보조원이든 하나라도 건지기 어렵다. 몇 안되는 수혜자로 선정되기 위해서 나름의 전략을 쓰는 모습들이 가련해 보이는 것은 당연.

 

하지만 이 전략은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전반적으로 '다' 가난하기 때문이다. 비극이지만, 학부생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 보아도 인문사회계열은 '부모의 월소득'이 다른 전공계열에 비해 월등히 낮다(경제, 경영은 제외). 안그래도 없는 집의 자식들이, 취업은 하지 않고 등록금 펑펑 내야하는 대학원에 와 있으니 서로간의 꼬라지는 말 안해도 다 거기서 거기?

 

이러한 공간에서 '없는 티' 내기는 별 효과가 없으니, 대학원생들은 전략을 수정한다. 그것은 내가 '더' 가난하다고 증명하는 것보다, 남이 내보다 '덜' 가난한다는 것을 담론싸움에서 선점하는 것이다. 그래서 똑 같은 조건이라면, 얼른 흠집을 잡아야 하는 법.

 

이건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 싸움이기 때문에 이때부터는 '최소한의 동업자 정신'도 사라진다. "저 친구 할아버지가 땅부자라면서?", "저 선배가 결혼할 남자친구가 의사라며?", "나는 저 녀석이 '산사춘'마시는거 봤어" 심지어 "제 휴대폰 그거라며?" 등의 거의 웃지못할 수준의 저급한 음모론들이 판을 치기 시작한다. 여기서는 "사실은 쟤가 형편이 나쁘지 않아~"라는 속닥속닥이 가장 중요한 전략적 포인트가 된다.

 

만약 하루의 생활패턴이 비슷하다면, 그래서 딱히 서로 부딪히는 일상에서 별다른 "누가 더 가난한지가" 잘 드러나지 않을 때의 가장 좋은 전략은 '거주하고 있는 공간'을 문제 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고시원에 거주하면 이 친구는 아주 유리한 고지를 일단 먹고 들어간다. 그리고 자취생이 아니더라도 비교기준은 무한대다. 그 집이 부모님 집이냐, 전세냐, 월세냐, 아파트냐, 다세대냐 등에 따라서 누군가는 찍소리도 해서는 안된다. 아마 임대주택에 살면, 그건 거의 고시원급의 파워(?)를 지닌 셈.

 

다음은 '아르바이트'의 난이도. 최소한 인문/사회계열 대학원생들은 학교 밖에서 여러 '노동자'로서 역할을 분명 지니고 있다. 이때, 시간이 많이 투자되고 땀을 많이 흘리는 일을 할수록 유리한 것은 당연.

 

그래서 상대방이 어떤 아르바이트를 하는지를 알고 있는것이 매우 중요하다. 부잣집 도련님의 사회생활 흉내내기같은 부업인 '과외'로서는 분위기 싸움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 뭔가 힘들어보여야지만 수혜천사가 다가오는 법.

 

나는 석,박사과정시절을 고시원과 옥탑방에 살면서 4년 넘게 신문배달을 했는데 단지 이것만으로도 여러 혜택을 받은적이 꽤 있었다. 그냥 그일이 내 몸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한번도 "힘들어 죽겠다~"는 하소연을 한적이 없는데 어떤 누구도 감히 나의 고통 앞에서 "한번 붙어보자~"면서 경쟁을 제안하지 않더라. 그렇게 나는 장학금도 꽤 받았고 조교생활도 오래했다. 나로서는 완전 누워서 떡먹기.

 

그런데 나라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나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혜택을 받지 못하는 세력들이 새로운 전략을 들고 나왔다. 그건 내가 이런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과연 "절실"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독립심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를 한번 보아야 한다는 거다. 이 정도면 정말로 코미디 수준이지만, 어쩔 수 없다. "경쟁"이라는 것은 원래 이렇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이기는게 제일 중요하니까 말이다.

 

나는 평소에 술값을 아주 많이 지출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서른살에는 결혼을, 서른한살에는 딸도 태어났다. 이런 것들, "보통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행복 아닌가? 아주 좋은 먹잇거리다. "삶이 괴로우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치"에 딱 해당되는 것들이니 말이다.

 

물론 이는 내가 피해자로서의 사례이고, 내가 가해자로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말하기는 굳이 말하기는 싫다. 더 했으면 더 했을 것이다. 왜? 어쨌든 나보다 '잘난 놈'이 없어야 되거든. 그래야 이 바닥에서 먹고 사는 법.

 

인문학(+사회과학)은 필연적으로 반자본주의

 

하지만 우리에게도 생각은 있다. 나름 지식인이 되고 싶어하는 이들인데, 이러한 구차한 삶을 "원래 그런 것"이라고 체념하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누군든지 이러한 삶에 한(恨)이 서려있다.

 

"왜 이런 공부를 한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불쌍해져야 하는가?"라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학문이 무조건적으로 천대받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대학원생들 누구도 이렇게 누군가의 적선으로부터 본인이 구원되는 이 지랄같은 구조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살기 위해서' 그럴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 학문의 종사자들은 필연적으로 '반자본주의' 성향을 가지고 살아간다. 물론, 몸으로 직접 해결하고자 거리로 나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생각이 떠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소한 자본주의 사회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은 뼈저리게 알고 있다. 이건, 빨갱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보니 저절로 드는 생각이다.

 

다시 칼럼으로 가보자. 솔직히, 인문학 자체에서 비판적 요소가 '정말로'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거시기하다. 칼럼에 나와있듯이 인문학은 결코 반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자본주의도 아니다. 인문학은 그저 지루하고 읽기조차 난해한 것 아닌가? 여기에 '비판정신'을 갖다 붙히는 것도 어불성설.

 

그런데 그 인문학이 이상하게도 누군가로부터 '설명이 되면' 이게 참으로 '가슴에' 팍팍 꽂힌다. 왜 우리가 '의심의 눈초리'로 살아야 하는지가 그 '누군가의 설명'이 곁들여지면 너무나도 잘 받아들여진다. 

 

맞다. 이건 전적으로 '전달하는 사람'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전달하는 사람이 '인문학'의 정도(正道) 걸은 사람일수록 그 '비판정신'은 매우 뚜렷하게 표출된다. 외모로만 보면 한없이 겸손하고 순수한 교수님들이 이상하게도 '입만 열면' 그 안에는 세상을 향한 가시가 있다. 왜 그럴까? 그들 역시 세상을 향한 '한'(恨)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처럼, 그들 역시 과거에 공부를 '이런 식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참해질수록 운 좋게 '오래 공부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가 되어도 이 못된 버릇은 고칠 수 없다. 아니 고쳐서는 안된다. 교수로서 몇 푼 벌어서 제자들 먹여 살릴려면, 여전히 이 짓거리는 유용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좀 잘 나간다고 증명되는 순간, 여러 혜택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최소한 책을 잡은 순간에는, 그리고 이를 읽어주는 순간만큼은 아주 고약해진다. 인생이 서글퍼서 말이다.

 

비판을 하게끔 만들어놓고서 왜 그러냐! <사진은 영화'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 영화<살인의추억>홈페이지

 

통찰의 인문학? 이것 자체가 인문학의 거지근성일 뿐.

 

통찰? 이건 사실 '비판'의 전단계다. 비판을 위한 '분위기 모색'단계 정도? 그러니까 지금의 '여러 인문학 강좌'에 불려나가는 교수님들은 학부 1학년 수준의 강의를 매우 심각하게 여러 CEO에게 하는 꼴이다.

 

자존심때문에라도 논의를 이렇게 '좁히는 것'에 흥분해야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래야지만 인문학이 '적선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돈 줄 앞에서 인문학은 다시 고개를 숙일 뿐이다. 자본가들은 이것마저 '마케팅 수단'으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인문학은 과거와 같이 '없는 사람들끼리' 재생산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없다. 대학에서 인문학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있는 사람들' 앞에서 인문학은 재생산 될 뿐이다.

 

그러면 인문학의 '비판정신'은 절로 없어진다. 결국 우리는 세상을 순리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인문학을 배울 뿐이다. 이것도 모르고 지금 인문학이 유행을 한단다. 배가 고픈게 이렇게 서럽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http://blog.daum.net/och7896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04.25 17:14 ⓒ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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