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의 퍼즐 중, 한 조각을 채우다. -6개월의 아프리카 종단-

붉은 도시 요르단에서 출발하다.

검토 완료

박설화(jenny0404)등록 2010.04.13 16:22
 아이러니하게도, 요르단에 와서 처음 시간을 보낸 것은 로마의 유적이다.
제라쉬는 로마제국의 번성기 때 이루어진 요르단에 있는 옛 로마제국의 유적이다. 그 때에 지어진 도시가 그대로 남아있다. 현재엔 페트라 다음으로 많은 관광객이 몰리고 있으며 외화획득에 한 몫을 하고 있으니, 로마제국에서 침략에 대한 보상을 후대에 해주는 거라고 해도 되는 것인가...
뙤약볕으로 인해 많이 지치고 늘어지게 되는 요인이 있음에도 제라쉬의 유적은 이국적인 느낌으로 눈길을 사로 잡기 충분했다. 어느 유적지가 그렇듯, 현재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그 자태로 고대의 시간을 그대로 머금고 있다.
마차가 달리던 도로와, 원형경기장, 신전 등 어쩌면 제라쉬는 상상의 도시이다. 뜨거운 태양아래 묵묵히 침묵하는 도시속에서 나는 홀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다.
인상적인 그 원형경기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밀조밀 모여서 무언가를 관람했던 것을 상상하면 충분히 하나의 광란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리란 짐작이 간다.
또한 원형경기장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앉아서 이 도시 너머의 현재 도시를 바라보았다. 나무들 너머로 보이는 현재의 도시. 그리고 바로 옆에 존재하는 유적지의 돌들, 기둥들…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옛 도시와 현재의 도시가 완벽하게 맞닿아있다.
굳이 눈을 감지 않아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말발굽의 소리도 들리고, 왁자지껄 상인들의 소리도 들린다. 저 멀리 끌려오는 죄인들의 모습도 보이고… 신기하게도 이 모든 상상들이 가능하도록 충분히 믿어지는 곳이며, 그로 하여금 전율이 느껴지기도 한다. 유적이란 과연 과거의 흔적이 남아있는 돌일뿐일까…아직 현재는 불완전하다.

사실 해외에서의 호텔이라 함은 우리나라에서 생각하듯 별이 몇 개가 있는 지 중요한 그런 장소는 아니다. 영어로 숙박업소 자체가 모두 호텔이니. 물론 나라마다 조금씩 용어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호텔, 롯지,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말이다.
배낭여행자 숙소가 몰려 있는 거리의 XX호텔의 도미토리룸을 잡았다. 침대없이 매트만 쭉 나열되어있는 모습이다. 이 숙소에서는 한국인 아이들이 장기숙박을 하고 있었다.
[인터넷해외청년봉사단]으로 파견된 4명의 우리나라 젊은이들. 한국인들이 그리울 정도로, 나온지 오래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딱히 한국인들이라고 관심이 가던 것은 아니었으나 네 명이서 학교에 요르단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하니 내 주의가 기울었다. 나와 같은 여행자를 물색해, 같이 비용을 절감 해, 사해를 갔다와야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다른 같이 갈 여행자를 구하지 못해 시간을 보내다, 아이들을 따라 학교를 갔다.
원래 일행이 아닌 나로써는 쭈삣거리면서 들어갔으나 황송하게도 아이들은 교감선생님에게 나를 '한국에서 온 포토그래퍼'로 소개를 해주었다. 눈빛만으로도 교감선생님은 '포토그래퍼 박'에게 호의적이신듯 하다. 역시 무거운 카메라와 렌즈를 들고 다닌 보람이 있다.

" 머리 좀 만져봐도 되요?"
"응, 만져봐~뽑지는 말고"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중력에 약해지는 내 머리카락이 걱정되어 아이들에게 대답했다.
아이들은 자기네와는 다른 나의 쭉 뻗은 머리칼락이 신기한지, 연신 만져댄다.
"왜 이건 안하고 다녀요?" 아이들은 자기네들의 히잡을 가르키며 왜 안하고 다니냐고 물었다.
헉..! 할 말이 없다. 사실대로 종교가 달라서라고 해야하나?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갑자기 당황한 나는 아이들에게 대답했다.
"응, 더워서."
하루 본 나에게 아이들은 과분한 관심을 가져주었고, 호기심을 반짝였으며 내일도 꼭 오라고 재차 나의 대답을 요구했다. 마지못해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난 하루빨리 페트라가 보고싶었다. 그래서 아이들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 내가 방문한 날 학교를 비우신 교장선생님의, 전화상의 '내일과 모레도 와줄 수 있겠느냐'는 간곡한 요청이 무언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여행의 첫 나라인 만큼 나는 에너지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바로 대답을 못하는 내 모습을 보고, 우리 한국 아이들 중, 아영이가 교장선생님이 사진 찍히고 싶으신가보다고 우스개 소리를 했고, '언니, 부담갖을 필요 없다'며 내 부담감을 덜어주려고 했다. 사해일정을 같이 쉐어할 여행자를 만나면 난, 바로 내려갈 것이어서 학교에 오겠다는 '약속'은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학교로의 방문은 예상대로였다. 우리 한국 아이들의 열정적인 모습에 뿌듯했고.., 뭐랄까 내가 좋아하는 단면을 가진 아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그리고 알맞게 적절히 건강하게 운용되는 느낌이랄까...
열정이란, 더군다나 때묻지 않은 순수한 열정이 표출되는 모습은 그지없이 이뻐보인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그 순간이 요르단의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참 잘 어울렸다. 사실 외교의 필요에 의한 정부 차원의 파견에 그닥 큰 감동을 받진 않으나, 순수한 열정과 융화되면 꽤 보기좋은 프로젝트가 되는 것 같다. [인터넷해외청년봉사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이들에게 포토샵이나, 플래시몹, 무비메이커를 영어로 가르친다. 꽤 수준있는 커리큘럼이라고 생각되며, 꾸리(한국)티쳐들에 대한 아이들의 이런 인상은, 나중에 이 요르단 아이들이 커서 대한민국의 인상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소중한 봉사가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이런 사명감에 자신들의 순수한 에너지를 다해 요르단 아이들과 같은 눈빛을 발산하는 있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다음 날, 아이들이 학교를 간 사이 하나 남은 귀중한 오짬(오징어짬뽕라면)으로 아침을 먹었다. 밖에 나가서 어슬렁거리며 펠라페와 콜라로 점심을 해결하고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펠라페는 일종의 샌드위치 같은 것으로, 한 끼 때우기 괜찮은 간식거리이다. 그러다 동양 남자를 한 명 발견, 너무 반가워서 혹시나 하는 마음의 기대감에 인사를 먼저 하고, 말을 걸었다.
"아 유 코리안?
"나, 일본 사람." 이라는 정확하고 또박또박한 한국 말.
한국 친구가 많은 일본인인가 보다. 혼자 엄청 웃었다. 내 여행을 시작한 첫 장소인 요르단부터, 아프리카 대륙의 끝에 위치한 남아공까지는 기나긴, 한국인이 그리울 법한 여정이다. 물론 중간중간, 동양인을 보는 것이 반가울 정도로 뜸한 구역도 있으나, 이렇듯 일본 여행자들은 자주 눈에 띈다.
우리나라보다는 여행 스타일이 10년 앞 서 있다고 말할 정도로 그들은 여행지에 대한 개척 정신이나 정보를 공유하는 부분이 꽤 체계화 되어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전하는 계기가 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일 예로, 케냐의 한 게스트 하우스에는 일본 여행자들이 만든 정보북이 존재하는 데, 이 것을 보고선 나는 꽤 충격적이었다. 동물들을 직접 보는 투어를 앞 둔, 다음 여행자들 위해 그 정보북에선 어떤 누군가가 사진을 찍어 이 동물은 이름이 뭔지, 국립공원 일정을 앞 둔 사람들을 위해 이 식물의 이름은 뭔지, 이 새의 이름은 뭔지를 친절하게 적어둔 것을 보았다. 물론 나도 내 앞의 여행자들이, 그 다음 여행자들을 생각하며 적어놓은 여행의 팁들이나 정보들에 감동하여, 나름 끄적거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해 놓은 일본 정보북을 보니 꽤 감동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사해를 가고 싶었다. 사해에서, 수영 못하는 나도 둥둥 떠서 수영하는 액션을 꼭 취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혼자 다니는 내 여행의 한계에 살짝 부딪혔다. 사해가는 투어를 예약하고 싶어서 근처 배낭여행자들에게 유명한 호텔들을 찾아다니며 사해투어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고 다녔으나 마침 같이 쉐어할 적절한 사람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 호텔에도 여행자가 없고. 인근의 다른 호텔에도 목적이 맞는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
결국 난 사해라고 불리우는, 높은 함량의 소금때문에 몸이 둥둥둥 뜬다는 그 바다에선, 결국 내 몸을 띄우지 못했다. 그러나 뜻이 있으면, 길은 찾게 된다.
" 나, 내일 떠날려구요." 호텔 주인에게 말했다.
"왜. 사해 보러 간다며 " 같이 투어를 쉐어할 사람이 있으면 알려준다 얘기한 적이 있어서 아저씨도 나의 상황을 알고 있다.
"알다시피 쉐어할 사람을 못구했쟎아요. 혼자서는 못가요. 너무 비싸요. "
사실 사해는 내 목적지 중에서도 융통성 있게 조절할 수 있는 장소이긴 했다. 포기가능한 장소라는 뜻이다.
"나, 내일 모레 어머니댁에 갈 건데, 페트라 근처에 사셔."
듣는 순간 난 이게 왠 횡재냐 싶었다. 사해를 포기하고 이왕 떠나는 것, 잘하면 좀 편하게 갈 수 도 있겠다 싶어 한 번 아저씨에게 물어나 보았다.
"내일 모레 가실거면 이왕 내일로 땡겨서 가면 안되요? 사해 못 가서 해피하지 않아요. 내일 아저씨 차 타고 가면 좀 나을것 같은 데, 헤헤~"
결국 오케이 사인 하신 아저씨와 페트라로 뜨겁게 달궈진 길을 나섰다. 물론 사해를 못 가 해피하지 않은 나를 배려해 사해를 들러 가시는 친절도 베푸셨다. 고마와요 아저씨.

페트라를 보기 위해 여장을 풀었다. 물론 가장 저렴하다고 소문난 B호텔의 도미토리 룸. 3JD로 한국돈 6천원 가량이다. 2층 침대 4개로 8인실이다. 도미토리 룸에선 물론 여러 명이 섞여 지내기 때문에, 각자의 귀중품 보관이며, 옷을 갈아입을 때며 편하지는 않다. 그런 부분을 감수하고 도미토리 룸을 쓰는 것이다. 귀중품은 카운터에 맡겨야 하거나, 옷 갈아입을때에는 욕실을 들어가야 하거나 하는 불편함이 있기도 하지만 여러명이 함께 지내는 만큼, 본인과 루트가 비슷한, 혹은 이미 지나온 여행자들을 만나서 반가움에, 혹은 정보의 나눔에 수다의 장이 되기도 한다. 또한 모두가 함께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잠잘 시간엔 조용히 하고, 꺼진 불 다시보듯, 사용한 욕실은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정돈을 하는, 이기적인 나를 벗어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뭐 물론 이 예는, 단지 바른 예로만 끝날 때가 많기도 하지만 말이다.
B호텔의 숙박은 3JD로 가장 저렴한 곳에서 했지만, 거기서 파는 저녁식사는 4JD였다. 순간 먹을까 말까 고민을 하다, 거기서 만난 한국 사람들이 저녁부페에 참여한다고 해서 친목도모의 일환으로 함께 했다. 꽤 맛있었던 저녁부페와, 빌딩들이 없어 너무나도 거침없이 보이는 석양과 노을과 함께 하루도 그렇게 저물어 갔다.
페트라는 BC7세기 경 시리아와 아라비아반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나바테아인들에 의해 지어진 암벽 도시이다. 붉고 깎아지른 듯 한 협곡을 지나서 암벽에 의해 드리워진 그늘을 따라 좀 걸어가면, 페트라의 얼굴'격인 알 카즈네가 나타난다.


페트라를 가기 위해선 아침 일찍 출발 하는 것이 좋다. 개인적으로는 햇빛이 가장 힘든 요인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출발해야 선선할 때, 이 붉게 빛나는 고대 도시를 여유있게 감상할 수 있으며, 오를 수 있다. 특히 떠오르는 해와 이 도시의 색깔이 참 잘 어울리는 듯 하다. 그 태양에 빛나서 더욱 붉게 빛을 발하는 도시를 보면,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잠시 걸음을 멈추게 된다.
알 카즈네를 지나 대신전, 알 데이르 사원을 지나 암벽 산의 꼭대기에 섰을때는 펼쳐진 사막의 웅장함에, 대자연에 압도당해 잠시 멍하니 있을 수 밖엔 없었다.
페트라 여정 내내 동키(당나귀)들이 안쓰러워 볼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한 것 말고는 난, 보는 내내 어떻게 저렇게 만들었을까. 아무리 무른 돌이라지만, 그걸 파내서 살 집을 만들고 저런 신전을 만들고, 뿐만 아니라 조각까지 해서 섬세하게 멋을 냈을까. 보는 내내 다시 봐도 신기하고 호기심 많은 나에게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가져다 준, 페트라였다. 동키들 얘기로 돌아가자면, 포동포동하지도 않은 동키들은 여기서 사람을 태우는 영업을 한다. 주로 베두인들이 주인인데, 동키보다 무게가 훨 많이 나갈 듯 한 서양인들을 태우고 그 계단을 오르는 동키들을 보면, 난 개인적으로 쳐다보기조차 미안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동키가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할 때 까지 내내, 난 생각했다. 동키들은 저런 일을 하기엔 너무 착한 눈을 갖고 있다고.

페트라 입장권 2일권을 산 나는, 그 다음날도 숙소에서 만난 한국 남자아이들 둘과 함께 이른아침부터 찾았다. 어제보단 수월하게, 보지 못한 곳들을 둘러보고 숙소의 체크아웃 시간에 늦을까 염려하며 돌아왔다. 돌아오니, 친절하게도 나의 모든 짐들은 모두 밖에 나와있었다. 체크아웃 시간을 지나면, 오버차지를 물까 걱정한, 같은 숙소에 묵고 있는 한국부산아가씨 세 명이서 내 짐을 대충 싸서 밖에 정렬시켜 놓은 것이었다. 여행자들의 루트가 많이 겹치듯, 이 들과도, 암만의 같은 숙소에서 만난 사이였다. 하지만, 어차피 저들은 일행이 있고, 나는 그렇지 않아서 많은 얘기를 나눈 사이는 아니었는데 루트가 겹치며 이 들과는 후에, 첫 번째로 찡한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페트라를 떠나선, 전 날 얘기해 놓은 사막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우리가 묵고 있었던 호텔에 문의를 하니, 예상보다 너무 비싸서, 우린 곰곰히 생각하다가 한 차에 탈 수 있는 인원을 감안해 부산 아가씨 셋과 나, 이렇게 네 명이서 따로 신청 한 것이었다. 금액을 나눠내면 좀 더 절약이 되니 좋은 기회이다.
사막에서의 하룻밤은 모래 위에 빼곡히 들어박히 별을 보기 위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그 별들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 머릿속에 또렷이 박혀있다.
낙타도 타고, 사막에서의 선셋도 보며, 흡사 사막의 테마파크 같은 느낌을 풍기는 그 곳에, 놀러온 현지인들과 흥겹게 춤도 춰가며 사막에서의 하루를 보냈다. 그리곤 슬슬 이집트를 건널 준비를 했다.
이집트를 가기 위한 관문인 요르단의 아카바는 오히려 사막보다 더 더운 듯 하다.
후끈한 공기와 해상도시라 습하기까지 하다. 사막에서의 동침을 한 부산 아가씨 세 명과 이집트까지 같이 건너게 되었다. 셋이 함께 세계 여행중인 이들은, 나랑 동갑내기인 은정이, 둘째 남희, 막내 남희 …
부산이 집인 아가씨들이며, 현재 세계 여행중이다. 이집트로 가서는 스페인으로 떠날 계획인 그녀들과 함께 난 열심히 그날 묵을, 저렴하고 괜찮은 곳을 찾기 시작했다. 정 안되면 갖고 있는 여행책자인 론리플래닛에 나와있는 곳이라도 가야하지만, 일단은 우리를 아카바까지 데려다주시는 기사분에게 여쭤봤더니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한다. 그러고는 어딘가에 전화를 해서 열심히 알아보는 눈치였다.
" 아파트인데 괜찮겠어? 원하면, 지금 보러가고."
"아파트요? 하루에 얼만데요?"
"하루에 30JD래. 장기간 렌트해주는 곳이야.그런데 어차피 너희는 하루니까 한번 보기나 하던가.."
예상한 도미토리 룸보다는 조금 비싸지만 편하고 깨끗하다면 그정도는 감수할 수 있단 합의 하에, 우린 아파트를 보러 갔다. 생각보다 아파트는 괜찮았다. 깔끔하고, 주방도 깨끗하고 화장실도 물이 잘나오는 거였다. 간만에 현대적인 시설에 감동한 우리는 협상에 들어갔다.
그냥 한번에 오케이 하지 않는 나, 매니저와 딜을 시도했다.
"보시다시피, 우린 네 명이다. 딱 28JD에 하자"
"노"
"생각해봐.우리 네 명인데 30이면 누가 2를 더 내니.7씩 낼 수 있게 28에 해줘."
피식 웃더니(물론 본인도 그런생각이 들겠지. 4명에 30JD는 불공평한거라구..!)
"쏘리..노" 란다.
깎아달라고 네 번 시도했으나, 네 번 "NO"당했다. 이 정도면 물러서야 한다. 짜증난다고, 방 안주면 어째… 딱 맘에 드는데.
'오늘은 드디어 봉지커피를 뜯어서 냉커피를 타먹을수 있겠구나.야호~"
간만에 욕실다운 곳에서 목욕을 하고 빨래를 했다. 빨래라고 해봤자, 커다랗고 튼튼한 비닐봉지에 물을 채우고 약간의 세재를 풀고 옷을 넣은 다음, 샤워하는 동안 재워두는 게 다였지만 말이다. 간만에 요리도 하고, 기분좋은 마음에 난 요르단 현지 폴라포로 골든벨을 울렸다. 역시 먹을 것에 환호하는 이 정상적인 아이들.
우리는 기분 좋게, 요르단을 마감하고 이집트를 기대했다. 자, 이집트로 가자!

덧붙이는 글 사진을 여러 장 넣을 수 없는 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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