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소중한 무위사의 벽화들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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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maria12)등록 2009.12.09 18:15

무위사의 삼존불화(三尊佛畵) 가로로 긴 화면 가운데에 설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본존불을 그리고 좌우로는 협시보살을 배치하였다. 일명 설법도라 한다. ⓒ 김현숙


무위사의 벽화 무위사 ⓒ 김현숙


무위사의 벽화 무위사 ⓒ 김현숙


어느 사찰이나 나름의 특징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일반인이 알아차리기는 극히 어렵다. 그것은 불교문화의 동질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성지순례를 떠나보면 성당도 마찬가지다. 본질은 같은데 형상을 다르게 표현하기에 겉보기에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의 눈으로 볼 때는 본질과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무위사의 북 보존각에 들어서면 입구에 놓여있던 아름이 넘는 커다란 북 ⓒ 김현숙


나는 불교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심오한 불교문화에 대해 아는 것이 턱없이 부족해서 늘 아쉽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욕심 없이 내 마음이라는 그릇에 담겨오는 대로 느끼고 받아들일 뿐이다. 그렇게 꽤 오래 사찰을 순례했다. 그런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사찰이 있었으니 그건 강진에 있는 무위사였다.

무위사의 오불도(五佛圖) 삼존불도 위쪽 벽화에 그려진 오불도로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짓고 있는 다섯 부처그림이다 ⓒ 김현숙


무위사의 주악비천도(奏樂飛天圖) 거의 'V'자에 가까운 자세로 입에는 퉁소(洞簫)를 물고 있는데, 마치 하늘 위로부터 아래를 향하여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듯 하다 ⓒ 김현숙


무위사의 입불도(立佛圖) 우향한 입상으로 오른손은 하복부, 왼손은 어깨 위에 두어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적색 대의에 양록색 하의를 입었으며 끝단은 검은색으로 처리하였다. ⓒ 김현숙


무위사 무위사 ⓒ 김현숙


어느 날 문득 그냥 여기저기 떠나고 싶어서 준비 없이 나섰다. 그러다 도로변에 있는 안내표지판만 보고 무심코 따라 들어갔다가 얼마나 놀라고 나왔는지 모른다. 마치 내 가슴에서 한 세기가 흘러간 것 같았다. 벽화들이 보관되어 있는 좁은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그 앞에서 압도되어버렸다. 잠시 숨이 멎는 듯 했다. 부족한 내 솜씨로 그 앞에 감히 카메라 들이대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여행지는 대부분 한 번 다녀오면 일상에 묻혀 거의 잊어버리고 살기 십상인데 무위사는 첫 만남처럼 오래도록 사라지거나 희미해지지 않고 가슴에 남아 무언가를 추동하게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나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담아온 사진을 보고 또 보다가 부족한 대로라도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위사의 보살도(菩薩圖) 관음보살도와 서로 마주보게 자리한 상으로 오른손은 어깨 위로 들어 엄지와 무명지를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앞쪽으로 하여 경책을 들고 있다. ⓒ 김현숙


무위사에 대한 첫 느낌은 요란한 꾸밈이 없어 소박하고 편안했다. 어느 시골집 넓은 안마당처럼 자유로웠다. 노자는 춘추 시대의 어지러운 세태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여 무위자연의 사상을 내걸고 현실을 외면한 은둔과 도피의 철학을 강조하였다는 것을 알고 늘 가슴속에 무위를 생각하며 살고자 하는 내게 무위사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다가왔던 것이 아닌가 싶다.

무위사에 대한 설명 무위사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글 ⓒ 김현숙


사전 자료인《사지(寺誌)》에 의하면 617년(신라 진평왕 39)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는데, 875년(신라 헌강왕 1) 도선(道詵)이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라 개칭하였고, 946년(고려 정종 1)에는 선각(先覺) 형미(逈微)가 3창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하였다가, 1550년(명종 5) 태감(太甘)이 4창하고 무위사라 개칭하였다 한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보물 507호인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비명(碑銘)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도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로 불렸으므로《사지》에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사전은 적고 있다.

이 때의 당우(堂宇)는 본 절이 23동, 암자가 35개로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사찰이었는데, 그 후 화재 등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목조건물의 아름다움은 늘 화재로 소실되는 아픔을 겪는데 이곳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지난 해 국보 제1호인 숭례문이 불타자 목조건물로 국보 제2호인 무위사 극락보전이 언론에 회자되기도 했었다. 화재란 생명은 물론 문화재를 앗아가는 무서운 첨병이다. 나는 인간의 생명보다 문화재의 손실을 더 우위에 두고 싶은 사람이다. 유한한 인간의 생명은 언젠가 한 번은 죽게 마련이지만 문화재는 세대를 넘고 넘어서 영원히 연결되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번에 미군이 바그다드를 무차별 폭격할 때 최소한의 역사의식조차도 없는 그 무자비함에 치를 떨었고 따라서 죄악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 유구한 세월 동안 문화를 키워서 지키고 간직해온 인류문화를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무참히 폭격해버리는 잔인함과 비인간성에 그들이 진정 인간인가 싶어 절망했었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인류문명을 어디서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지금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깝고 원망스럽기 그지없다.

무위사의 선각대사 편광탑비 보존각 안에 선각대사의 편광탑비를 액자에 담아놓았다. ⓒ 김현숙


무위사의 선각대사 편광탑비 무위사 ⓒ 김현숙


무위사의 극락보전은 조선 초기의 목조건물로 연대가 확인되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여섯 차례 중수되면서 벽화가 따로 28점은 보존각에 소장되어 있었다. 이 벽화들은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어떤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보존각에 들어서자 처음 대하는 이 벽화들 앞에서 세상과는 전혀 다른 기운과 냄새를 느끼며 나는 잠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벽화 앞에 서는 순간 내 안에서 그 천 년의 숨결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게 긴 세월을 음미하면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나오려다 그냥 나오기는 너무 소중해서 기록으로라도 남기기 위해 서투른 솜씨로 몇 장 담아온 것이다.

사원 건립에 있어 벽화의 제작은 그 내외공간의 장엄(莊嚴) 및 장식을 위한 필수요건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단순히 건물의 장식미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원(深遠)한 교리상의 체계를 배경으로 성소(聖所)를 장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동시에 교화(敎化)의 역할도 겸하게 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천정 , 벽면 , 기둥 , 문 등에 그에 알맞은 불교적인 소재의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이것은 기독교 벽화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탱화가 많지만 예전에는 불국사화(佛國寺化)시킨다는 이상에 접근하려는 방법으로 사원의 장엄함을 더욱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 벽화를 많이 그렸던 것이라 한다. 벽과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탱화가 주는 느낌과 벽화가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아마도 내가 그렇게 벽화 앞에서 충격을 받았던 것은 지금까지 보아온 탱화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그런 강렬한 느낌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중앙에 연꽃 문양이 있는 배례석 큰 행사가 있을 때는 많은 불자가 법당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예배를 드린다. ⓒ 김현숙


무위사는 해방 이후 1956년에 극락보전을 수리 보수하였으나 오랜 세월 견디어온 사찰의 잦은 중수로 곧 허물어질 지경에 이르게 되자, 해체보수를 시도하여 벽화를 통째로 들어내서 1975년 벽화 보존각을 세워 그 안에 벽화를 봉안했다고 한다. 그 벽화들을 다행히 보존각에 잘 보관하고 있어 운 좋게도 내가 조우할 수 있었으니 그 문화재가 걸어온 지난한 역사 앞에서 감개가 무량했으리라. 비록 투박하고 깨어져 손상이 된 부분도 많지만 우리 문화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이 귀한 벽화들이 부디 오랜 세월 소중하게 간직되어 우리의 후손들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물려지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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