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20대들은 분노할 여유가 없다

20대는 물질주의와 취업전쟁에 포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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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훈(youthpower)등록 2009.07.28 16:17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이 땅은 '열사의 나라'였다. 눈만 뜨면 듣는 소식이 누가 경찰과 대치하다가 분신했다, 혹은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더라는 것이었다. 군부독재시대였던 80년대는 더 했겠지만 민주화가 막 진행되던 90년대 초반도 여전히 많은 20대 청년들이 민주와 자유를 외치면서 스러져갔다.

대의명분을 위해 시위현장에 나가고 때로는 자기 목숨까지도 내던지는 것이 고귀한 가치로 인정받던 시기였다. 상대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는 학생들은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스스로도 그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행됨에 따라 학생들의 투쟁의식도 차츰 옅어져갔고 90년대 후반에 터진 IMF 구제금융사태는 청년들을 비롯하여 국민 전체의 가치관에 큰 변화를 안겨주었다. 1950년에 터진 한국전쟁이 남한 주민들에게 반공주의를 각인시켰듯이 IMF 구제금융사태는 전쟁이 아니더라도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공포심과 함께 물질이 없으면 삶의 기반도 송두리째 파괴된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게 된다. 이미 이전부터 우리 국민들 머릿속에는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운동 가치가 남아있었지만 이 사태를 통해 다른 어떤 것보다 "먹고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경제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경제논리를 더 철저하게 학습하게 된다.

몇 년 전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황우석 교수 사태가 일단락 되기까지 보여준 언론과 국민들의 태도는 우리 사회에 배금주의가 어느 정도로 침투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그의 연구를 두고 윤리논쟁이 벌어졌을 때 대다수 언론과 국민들은 황우석 교수가 앞으로 한국을 먹여살릴 고부가 가치의 생명공학산업을 이끌고 있는데 '다 된 밥에 재 뿌린다'고 잘 되고 있는 연구에 제동을 거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경제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윤리적 결함이 있더라도 덮고 가야한다는 것이 당시 국민들의 정서가 아니었던가?

지난 대선 때도 각종 탈법과 비리로 의심을 받아온 이명박 후보는 '경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 하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역시 다른 어떤 가치보다 경제와 물질이 최고라는 배금주의적 가치가 작동한 것이다. 이런 가치관은 기성세대들에게서 오늘의 20대들에게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예전에는 공공연히 물질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을 속물로 여길만큼 터부시 했지만 차츰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손가락질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상녀'라는 신조어가 생길만큼 현대 젊은이들에게는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당당하다. 나 하나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중요한 가치로 떠오른 시대에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거대담론은 20대에게 너무나 생경해 보인다.

물질주의, 배금주의는 오늘 우리 시대를 휩쓸고 있는 가치관이다. 386세대가 지금 이 시대에 20대라고 해도 현 20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취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도서관에서 열심히 '스펙쌓기'에 골몰할 것이고, 틈틈이 쉴 때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TV에서 나오는 오락프로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 것이다. 이들을 다그쳐서 '왜 이런 현실에 분노하지 않고 그렇게 도서관에 처박혀 있냐!'고 호통쳐봤자 싸울 태세도 없고, 분노할 이유도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20대들에게는 공허한 외침이 될 뿐이다.

지금의 20대들은 10대 시절 내내 학교와 학원을 전전하며 모든 고민과 꿈을 대학 이후로 미룬 채 숨 가쁘게 입시전쟁을 치렀다. 이들이 10대 시절 내내 들었던 말은 '돈 많이 벌어 출세해라' '좋은 대학 못가면 성공하기 어렵다'라는 것들 뿐이었다. 이들은 대학에 진학해서 한숨을 돌리나 싶었는데 곧바로 취업전쟁으로 내몰린다. 늘상 보고 들은 것이 '좋은 직장=행복한 삶'이다. 이 외 다른 것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것이 없고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어린시절 IMF 경제 위기를 지켜보며 막연하게 돈이 최고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이들은 소위 대기업이나 공기업이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고 결혼조차 불투명한 '돈이 최고!'인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면 오로지 취업전쟁을 이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20대에게서 민족과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밖에 없다. 

과거 대학생들은 적어도 취업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10대 때는 입시전쟁으로 인해 현실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할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대학에 진학하면서 왜 현실에 분노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막걸리 마셔가며 충분히 공부하고 고민할 시간이라도 있었다. 선배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현실을 알게 되고 여러 사회과학 서적을 통해 눈이 열리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런 학습 과정을 거쳐 불의한 사회에 분노하며 행동하는데 대학생활을 다 보내도 80년대에는 경제호황과 대졸자의 희소성 때문에 취업하는데 별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대학생들은 취업 이외에 한가하게 다른데 눈 돌릴 여유가 없다. 또한 눈을 돌리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지금 세상은 청년들에게 왜 분노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칠 여유도, 분노할 여유조차도 주지 않는 것이다. 20대들은 지금 기성세대가 물려준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고 그 가치관을 깨트릴 기회조차 주어져 있지 않다. 이것이 분노하지 않는 20대를 마냥 비난할수 없는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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