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는 왜 조선 왕릉 40기에 심취 했는가

조선 왕릉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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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상(tspark21)등록 2009.07.06 20:48
유네스코는 왜 조선 왕릉 40기에 심취 했는가
             - 조선 왕릉 탐방기

                               박 태 상(한국방송대 교수, 문화평론가)

지난 6월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스페인 세비야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33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조선왕릉'(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40기에 대한 세계문화유산(World Cultural Heritage) 등재를 확정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총 9건의 세계문화유산을 가진 국가가 되었다. 북한의 고구려 벽화까지를 포함한다면 한반도는 총 10건의 세계문화유산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실 조선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유력하다는 소식은 지난 연말 송년회 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심사위원 중 한 명인 동국대의 이혜은교수로부터 이미 약간의 정보를 전해 들어서 이번 세비야 회의에서 등재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했다.   

(사진1)▲선릉 -조선왕조 제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작년 연말부터 시간을 내서 조선왕릉 40기를 모두 탐방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워낙 바쁜 생활을 하고 있는 입장이라 차일피일 미루면서 실천이 미뤄지고 있었다. 물론 절반 정도는 오래 전에 이미 방문을 한 곳이지만, 당시 필름카메라 시절이라 사진첩을 뒤지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중요 왕릉을 탐방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마침 지난 6월 18일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인 남사놀이 보존회의 제 7대 김승국 이사장 취임식이 삼성동 소재 선릉역 근처의 무형문화재 전수회관 민속극장 풍류에서 있어서 취임식을 마치고 바로 옆의  선정릉(宣靖陵)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사진2)▲정현왕후릉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는 데에는 당대의 실세였던 장인인 한명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성종의 첫째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였으나 소생이 없이 일찍 생을 마감했다. 둘째 왕후가 된 인물이 연산군의 생모였던 폐비 윤씨였다. 정현왕후는 후궁으로 있다가 윤씨가 폐비되자 왕비에 올랐으며 소생인 진성대군이 연산군이 폐위된 후 중종에 올랐다.   

정장 차림의 말쑥한 모습으로 행사에 참여한 관계로 한 여름을 방불하게 하는 폭염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부채를 부쳐가면서 선릉과 정릉을 오르내렸다. 오후인데도 불구하고 예상 밖으로 관람객은 많았다. 땡볕에 앉아 책을 읽는 주부의 모습도 보였고 벤치에 앉아 사랑을 나누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도 눈에 뜨였다. 젊은 외국인 여성 두 명이 잔디밭에 앉아 선탠을 즐기는 모습도 이채로웠다.

선정릉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맨 먼저 성종대왕릉과 계비 정현왕후릉이 관람객을 맞는다.  성종대왕릉 옆에 정현왕후릉이 있게 된 역사는 파란만장한 이야기와 함께 또렷이 남아있다. 유명한 폐비 윤씨 사건이고 연산군이 패륜임금이 되는 한 요인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성종(1457 ~ 1494)은 어느 날 얼굴이 매우 예쁜 한 궁녀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는  춘추관 기사관 윤기무의 딸이었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의 명으로 궁궐에 있었던 그녀를 보고 반한 성종은 날마다 윤씨의 처소를 찾아가 마침내는 관계를 맺고 임신하게 된다. 곧 윤씨는 '숙의'가 되었고 아들을 낳았다. 공교롭게도 침 공혜왕후가 곧 세상을 떠났고 성종은  둘째 왕비로 윤 숙의를 맞아들인다.

(사진3)▲선정릉의 산책로 - 선릉과 정릉을 연결하는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주변에 사는 강남의 아파트 거주민들이 운동을 위해 새벽마다 파워워킹을 한다.

하지만 중전 윤씨를 시기한 정 귀인, 엄 소용, 권 숙의 등의 후궁들은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에게 가서 아양을 떨어 귀여움을 독차지한 다음 윤씨를 헐뜯는다. 인수대비의 험담을 여러 차례 들은 성종은 중전을 점차 찾지 않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중전은 후궁들에게 비상을 먹이려 준비한다.  우연의 일치로 세 후궁이 인수대비에게 거짓으로 중전이 자기네들을 죽이려 한다고 고한다.  인수대비는 이 일을 성종에게 귀띔했고 성종은 확인해보려고 중전을 찾았다가 비상을 발견하였다. 

이 일로 인해 중전 윤씨는 후궁으로 지위가 깎였고 비상을 구한 궁녀는 죽임을 당했으며 윤씨의 어머니 신씨는 대궐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윤씨는 아들을 볼 수도 없게 되었고 대궐 한 귀퉁이에서 외로움과 한을 곱씹으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성종이 윤씨를 찾았는데,  윤씨는 그 동안 응어리진 마음에 앙탈을 부리다가 결국 성종의 얼굴에 손톱으로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사진4)▲영화 <연산군> 포스터-신상옥 감독의 대표작으로 영화배우 신영균의 연기가 압권이었다. 남양주의 (영화)종합촬영소 영상지원단 건물에는 한국대중영화사를 빛낸 영화들의 포스터가 진열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인수대비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윤씨를 궁에서 내쫓는데 앞장을 섰다. 결국 3년 후 1482년 대궐에서 사약을 가지고 온 사람들에 의해 윤씨는 죽임을 당한다.

이후 성장하여 왕이 된 연산군은 외할머니 신씨로부터 폐비 윤씨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 원수를 갚겠다며 궁전에 피바람을 몰고 온다. 연산군은 윤씨 축출에 앞장을 섰던 후궁들의 경우 자신이 직접 쳐 죽였고, 할머니 인수대비는 머리로 받아 죽였다. 또 당시 윤씨가 궁에서 쫓겨나는 데 찬성했거나 가만히 있었던 신하들을 모조리 죽인다. 이것이 유명한 사대사화 중 하나인 1504년의 무오사화이며, 2년 뒤 1506년에 연산군은 중종반정에 의해 폐위되었다.

사실 왕비와 후궁의 암투로 마음고생을 많이 한 임금이 성종이었지만, 세종대에 버금가는 유교정치시대를 이루어 후세의 높은 평가를 받은 왕이었다. 성종은 즉위 초부터 경연에 힘을 썼고 모든 홍문관의 관원에게 경연관을 겸하게 하였으며 경연이 끝난 후 그 자리에서 국사를 논의하게 하였다. 1475년 성종 6년까지는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았으나 7년 친정이후로는 육조직계제가 계속되었다. 그것은 아버지 세조가 독재적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공신이나 언관에게도 위압을 가하였으며 집현전을 혁파하면서 경연도 폐지한 것과는 차별화하는 정책을 집행했다. 

(사진5)▲정릉의 장명등과 문관석인, 무관석인 -조선왕릉에는 몇 가지 기본틀에 의해 왕릉을 중심으로 각종 장식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중 중요한 것으로는 석상 좌우의 망주석,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의 문관석인과 석마 그리고 한 단 아래에 무관석인과 석마가 의례적으로 서있다. 

성종대왕의 왕릉인 선릉에서 20 여분을 산책로를 따라 걸어야 정릉(靖陵)이 나온다. 정릉은 바로 연산군을 폐위시킨 유명한 중종반정의 중종이 잠들어 있는 왕릉이다. 중종(1488 ~ 1544)의 성종의 둘째아들로 형인 연산군이 폐위된 후 왕으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권력기반이 약했다. 그래서 중종은 조광조 등 사림세력을 끌어들여 개혁을 도모했지만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이 기득권세력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정치적 혼란만 가중된 채 좌절되고 만다. 

16세기에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사림파가 성장하여 훈구세력과 대립되게 되었다. 이들은 재지 중소지주 출신으로 공도를 내세워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고 자신들의 경제 사회적 입장을 강화하였다. 그들은 15세기 말부터 삼사(三司) 등 주로 언론 문필기관의 관직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중종 때에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현량과를 실시하여 자기 세력을 중앙으로 크게 진출시키는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따라서 관학파인 훈구파와의 일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이 무렵 4차례 사화가 일어났다. 그 중에서 1519년의 기묘사화는 궁지에 몰린 중종반정 공신세력이 격렬하게 반격하여 사림세력을 중앙정계에서 거의 완전하게 몰아낸 사건이었다.

(사진6)▲홍살문 -흔히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부른다. 동구릉에는 안쪽에 아홉 곳의 능마다 약간 작은 규모의 홍살문이 설치되어 산릉의 참배나 제례가 시작되는 곳임을 확인시켜준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정자각과 비각이 한 눈에 들어온다.

동구릉은 조선왕조의 왕릉 40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태조 이성계의 왕릉이 소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구릉에는 총 6명의 왕의 능과 7곳의 왕비의 능이 위치하고 있다. 임금의 황릉으로는 제1대 태조의 건원릉, 제5대 문종의 현릉, 제 14대 선조의 목릉, 제18대 현종의 숭릉, 제21대 영조의 원릉, 제24대 헌종의 경릉이 소재하고 있다.

조선왕릉은 한 분의 임금이 모셔져 있을 때는 외자이다. 둘이상일 있을 때는 선정릉과 헌인릉 등으로 불린다. 그 외에 세 분이상이 모셔져 있을 때에는 서삼릉, 서오릉, 동구릉으로 불린다. 다만 이태조의 경우 3글자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즉 이태조의 능만 '건원릉(健元陵)'으로 호칭된다.

(사진7) ▲이태조의 왕릉인 '건원릉(健元陵)'-대개 한 분의 임금의 능이 모셔져 있을 경우에 광릉, 목릉, 장릉 등 외자로 호칭되지만, 이태조의 경우만 3글자인 건원릉으로 불린다.

태조 이성계(1335 ~ 1408)는 1392년  7월 15일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연후 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운 후 태종 8년인 1408년 74세로 창덕궁에서 돌아가셨다. 특히 왕자의 난을 일으킨 아들 이방원과의 부자지간의 갈등은 '함흥차사'란 말이 전해올 정도로 유명하다.

대개 능, 원과 묘에는 잔디(떼)가 심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건원릉에만 봉분에 유일하게 억새풀이 심어져 있다. 그 이유는 태조가 고향 함경도 영흥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아들 태종이 아버지를 먼 이북 땅에 모시기를 원하지 않아 대신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에 덮어주어 이를 대신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져 온다.

(사진8)▲조선왕릉에 세워져 있는 석호와 석양 - 봉분에는 병풍석이 둘려져 있고 주위에는 석호(호랑이)와 석양(양)이 좌우에 각각 3마리씩 음양을 상징하면서 서 있다.
        
동구릉에 6기의 왕릉 중에서 특징적인 왕릉으로는 영조대왕의 왕릉인 원릉(元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릉 중에서 원릉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다. 원릉(元陵)은 조선왕조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1745 ~ 1805)의 능이다. 영조는 제19대 숙종의 넷째 아들로 경종의 뒤를 이어 1724년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사진9)▲영조대왕의 능인 원릉(元陵) - 원릉(元陵)은 조선왕조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1745 ~ 1805)의 능으로 조선왕릉 중에서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다.

영조는 조선의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52년간 집권하였다. 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당쟁 근절에 힘을 썼을 뿐만 아니라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농사를 장려하고 국방에도 충실을 기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기고 83세로 경희궁 집경당에서 붕어하셨다.

동구릉을 빠져나와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서오릉으로 향했다. 그런데 주말이라 교통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애를 태웠다. 가는 곳마다 병목현상을 일으키고 거기에다가 IC근처에서는 주차장을 방불하게 했다. 특히 홍은동IC에서 내려가는 길은 교통잼이 되어서 차들이 꼼짝달싹을  하지 않았다. 오후 5시 30분까지 입장을 해야 하며 6시를 조금 넘으면 왕릉을 빠져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더욱 마음이 급했다. 특히 조선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을 기념하여 문화재청이 7월 12일까지 한시적으로 무료입장을 허용하고 있어서 폭염 속에서도 왕릉은 관람객들로 넘쳐났다.          

겨우 문을 닫기 전에 서오릉 주차장에서 하차하여 숨 쉴 틈도 없이 입구로 달려갔다. 이미 관람객들은 입구 쪽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밀려 나오는 관람객들을 헤집고 서오릉의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사진10) ▲서오릉의 내부 관람지도 -서오릉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역시 숙종의 왕릉인 '명릉'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장희빈의 묘인 '대빈묘'이다.

서오릉에서는 수경원 ->익릉 ->순창원 ->경릉 ->대빈묘 ->명릉의 순서로 참배를 하였다. 퇴장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무더위 속에서도 속도전으로 바람의 아들이 되었다. 온몸은 땀으로 목욕을 하는 정도로 힘이 들었지만, 우리나라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기쁨으로 더위도 쉽게 이겨낼 수 있었다. 한국인 특유의 '신바람'이 몸의 고통을 극복하게 해준 것이다. 

경릉(敬陵)은 덕종(추존)과 왕비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의 능이다. 덕종은 조선 제 7대 임금인 세조의 맏아들로 태어나,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세자가 되었으나, 20세의 나이로 1457년 돌아가셨고, 그의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 한씨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로 세조 즉위년인 1455년에 세자빈이 되어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성종 형제를 낳았으며, 성종이 왕위에 오른 뒤

(사진 11 - 사진 12)▲경릉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추존)과 왕비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덕종은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그의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왕비로 추존하면서 소혜왕후라 부르게 되었다. 특히 불경에 조예가 깊었으며, 부녀자의 예의범절에 관하여 쓴 「내훈(內訓)」이라는 저술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 13) 명릉 앞에 선 필자 -명릉은 조선왕조 제 19대 임금인 숙종대왕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쌍분과 그 옆에 위치한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으로 조성되어 있다. 또 장희빈의 묘는 서오릉내의 멀리 떨어진 대빈묘에 위치하고 있다.

서오릉에는 왕릉은 두 곳밖에 없다. 그것은 명릉과 창릉이다. 명릉은 제 19대 숙종의 왕릉이고, 창릉은 조선왕조 제 8대 임금인 예종의 능이다. 예종(재위 1468∼1469)은 재위 13개월 만에 죽었다. 익릉은 숙종대왕의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능이다. 명릉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 그리고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명릉은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분으로 조영되고 인원왕후 능이 우측에 있어 좌측이 숙종의 능과 동원이강의 배치로 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숙종(肅宗, 1661~1720)은 제 19대 왕으로 많은 치적에도 불구하고 당쟁이 심하게 격화되던 시기로 정치적인 혼란기로 역사에 기록 되어 있다. 특히 장희빈을 총애하여 인현왕후를 폐비시키는 등 국정을 혼란에 빠트리기도 했다. 
당시 붕당정치의 폐해는 극에 달했다. 예송을 계기로 남인은 처음으로 집권적 위치에 섰다. 그러나 집권 후 5년 만에 1680년 남인정권은 서인의 반격을 받아 무너졌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경신환국'이라고 부른다.   그 후 9년 만에 재집권의 기회를 누렸지만(소위 '기사환국'), 5년 만에 다시 밀려났다. 이것을 갑술환국이라고 부른다.

(사진14) ▲대빈묘 -서오릉 내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으나 1969년 6월 서오릉 내로 옮겨졌다. 동구릉과 서오릉의 왕릉과 왕비릉을 통 털어 상석에 참외와 과자류의 제물이 올려 있는 것은 장희빈의 대빈묘가 유일하다. 천하의 악녀였으나 TV 드라마의 인기로 인해 후세의 관람객들에게 그녀가 크게 주목받은 것이 주요 요인으로 보인다.

숙종 대에 들어와 정국이 이처럼 잦게 변동한 것은 전에 없던 일로서 그 자체가 정치적 상황의 변화를 뜻하기에 충분했다. 이 변화과정에서 정치에 임하는 국왕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 주목된다. 숙종은 재위 초반에는 척신인 김석주를 내세워 서인, 남인 두 세력을 견제하였으나 나중에는 스스로 나서 두 세력을 번갈아 교체하면서 왕권의 입지를 강화시키고자 했다.

또 이러한 정치적 격변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일어났다.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정치집단의 상업적 이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상업적 이익을 독점하려는 경향이 커졌다. 약 반세기여 전에 몇 차례의 외침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던 농경지도 이 무렵에 이르러서는 거의 복구되고 또 공납제도의 폐단을 없애고자 새로 실시된 대종법도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국제무역에서도 약 반세기전에 일본과의 국교 재개가 이루어진 이후로 누리게 된 중개무역의 이득이 점차 비중이 높아갔다. 국제무역의 경우, 비단 또는 그 원사를 중국 상인으로부터 사서 부산에서 일본인들에게 파는 형태의 것으로 그 이득을 취한  상인들의 상업자본 축적의 몫은 의외로 컸다.   

(사진15)▲영화 <장희빈> 포스터 -1961년 정창화감독이 제작한 대중영화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김지미와 김진규가 주연을 맡았다.

숙종 대에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장희빈사건일 것이다. 장희빈의 본명은 장옥정(張玉貞)이었다. 그녀는 어려서 나인으로 궁에 들어갔다.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당시 소의였던 장씨와 가까이 하여 왕자 균(昀:景宗)을 낳자, 1689년(숙종 15) 1월 균을 원자로 봉하였다. 이에 따라 소의 장씨는 희빈에 오르고, 세자책봉은 불가하다고 상소한 송시열은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으며 나머지 서인들도 유배되어 권대운 등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것이 유명한 기사환국(己巳換局)이었다.

이 해 5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리자 서인 박태보 등 80여 명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1694년(숙종 20) 서인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다시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인현왕후의 폐출을 후회한 바 있던 숙종이 남인을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복위시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결국 장희빈은 오빠 장희재와 함께 사사되었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 장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일이 발각된 때문이었다.

헌인릉과 광릉 그리고 여주의 영릉 등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 40기 모두를 단 며칠의 일정으로 관람한다는 기획 자체가 무리였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가볍게 본 것이 불찰이었다. 이제 한국의 문화유산은 세계인이 인정하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실사기간 중인 올해 1월 6일 문화재청에 추가 자료를 요구했다. 그것은 ▲특정 요소를 핵심지역이 아니라 완충지역에 포함한 이유 ▲능침 사찰, 특히 헌릉에서 주산을 완충지역에 포함하지 않은 이유 ▲서삼릉의 지형 및 경관 복원에 관한 추가 정보와 복원 일정 등에 대한 해명과 설명을 요청했다.
더 나아가 ICOMOS는 ▲태릉 사격장과 선수촌 철거(사격장 2008년, 선수촌 2014년) ▲의릉에서의 한국예술종합학교 철거(2012년) ▲서오릉 서쪽 건물 환경 개선(2012년) 등 세 가지를 다시금 확인해줄 것을 한국정부에 요청했으며 우리 정부는 그것을 흔쾌히 수용했다.

이제 유네스코와의 약속을 지키는 동시에 선진국의 일원답게 세계문화유산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세계 여러 나라 관광객들이 이러한 전통적이고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관람하기 위해 물밀 듯 몰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제 유네스코와의 약속을 지키는 동시에 선진국의 일원답게 세계문화유산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세계 여러 나라 관광객들이 이러한 전통적이고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관람하기 위해 물밀 듯 몰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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