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궐위시, 우리 정당에게 대안은 있는가?

한국 정당, 안락한 보수주의에 현실안주 한다면 대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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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식(kame1004)등록 2009.06.01 10:16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어느 누구도 예기치 못했습니다. 퇴임 1년 3개월 만에 세상의 등진 그의 선택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듯이, 이명박 대통령의 죽음 또한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물론 현직 대통령으로서 특별한 건강관리와 경호처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안전관리도 이뤄지겠지만, 사람 일은 한치 앞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이명박 대통령의 갑작스런 유고를 바라는 글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상황이 올 경우 현재 우리 정당들이 국민의 뜻을 받들고 우리사회의 갈등과 이해관계를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대안인지 되돌아보고, 내일을 준비하자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우리 헌법 제68조 제2항은 대통령의 궐위(闕位) 시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공직선거법 제33조에 따라 공식 대통령 선거(운동)기간은 23일이므로, 역산하면 선거일 한 달 전에는 각 당의 대통령 후보가 결정되어야 합니다. 대선 준비 시 실제로 1년 정도 준비한다고 봤을 때 2달이라는 시간은 무척 짧은 기간이죠.

 

그렇다면 현 대통령의 갑작스런 궐위 시 60일 이내에 대선을 치러야 한다고 가정할 때, 지금 준비된 정당과 후보가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해 선거를 치를 준비는 되어 있어도, 국민이 공감하고 우리 사회의 중요한 현안들을 담아낼 정당과 후보는 없는 것 같습니다. 현실안주와 중도를 표방한 안락한 보수주의에 안주하고 있는 주요 정당을 볼 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정당이 사회적 갈등(conflicts)과 균열(cleavages)을 표출하고 대변하며, 공익과 공공선에 대한 여러 경쟁적인 논의와 이슈들을 정책대안으로 조직하는 역할을 한다는 최장집 교수의 정의(定意)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져줍니다. 정당은 중요한 이슈에 대한 의제설정과 대중동원을 통해 사회의 중요한 담론과 이슈를 제기해 정치적으로 대표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사회의 주요한 세력의 참여가 제약되고 그 이해관계를 제도권에서 배제될 때, 정치는 엘리트 카르텔에 의한 정치, 미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가 말한 '상층계급의 편향성 동원'(mobilization of upper class bias)의 정치가 될 뿐입니다.

 

정당이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갈등을 정치적 대표체계에서 다루지 않음으로 해서 정당의 사회통합의 기능을 약화되고, 정치적으로 배제된 주요한 갈등과 이슈들은 '거리의 정치'로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작동기제인 우리 정당들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을까요? 작년 전국의 어둠과 사회적 이슈를 밝혔던 촛불은 한국 정당체제의 저발전(低發展)의 역설적 결과물이었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 대다수의 여론을 등 뒤로 하고 미국과 손을 맞잡은 현 정부에 대해 어린 학생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촛불로써 반대의사를 명백히 표출했습니다.

 

하지만 국민이 직접 거리로 나서기 전에 청와대가 여론을 반영했던가, 국회에서 먼저 제도적으로 논의하고 타협점을 찾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대립과 소모적 갈등 속에서 아무런 성과도 내놓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국민이 직접 대통령과 맞서는 상황까지 연출된 것입니다. 수많은 국민의 촛불은 높은 컨테이너 벽(명박산성)에 막혔고, 수많은 촛불들은 경찰의 물대포에 꺼졌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전환을 촉구했던 촛불 이후 1년이 지난 지금, 그리고 탄핵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켜낸 촛불이 서거에 대한 애도의 촛불로 바뀐 지 며칠 지난 지금, 우리 정당들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친이-친박 갈등으로 내부입장조차 정리하기 어려운 한나라당은 170석의 거대 집권여당이면서도 이명박 대통령과 행정부의 일방통행식 행정에 제대로 된 문제제기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과 소통을 강조하지만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구속, 집회자유 보장 대신 물대포 세례 등을 보면 이 정부와 한나라당은 광장(廣場) 자체를 두려워하나 봅니다. 그러니 일반국민의 목소리를 경복궁 너머 북악산 아래 청와대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높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정치적 반대당인 민주당 등이 상대적으로 지지를 더 받아야 할 테지만,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등은 합쳐도 20%가 겨우 되는 낮은 지지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작년 촛불 이후 양상은 '반이명박-비민주당'으로 국민은 민주당을 대안정당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체성을 알 수 없는 '민주당 뉴플랜'으로 민주당 내부는 물론 국민도 헛갈려 하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과 창조한국당, 진보신당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 주요 정당들이 제 위치와 갈 방향을 모르고 국민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모르는 동안, 사회 저변에 깔린 우리 사회의 주요한 이슈와 현안, 이해관계들이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대표되지 못해 우리 사회는 광범위하게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하는 '반쪽짜리 주권자'인 대다수 국민들과 소수의 상층, 특정계층의 이해관계가 과대대표(誇大代表)되는 편향성이 동원되지는 정치적 대표성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낮은 투표율은 대안부재에 대한 유권자의 항의일 것입니다.

 

집권여당은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정책들을 밀어붙이면서 강한 반발을 사고 있으나 이를 수정, 보완하지 않음으로써 대표들의 정치적 책임성은 약화되고 있습니다. 시민, 유권자들이 선거 이후 선출된 대통령과 국회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별다른 수단을 갖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 민주주의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현직 대통령 궐위 시 우리에게 대안은 있을까요? 아직 없어 보입니다. 그럼 대안을 우리 국민이 직접 만들어야 하나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촛불과 같은 운동은 강력하지만 오래 지속할 수 없습니다. 운동이 제기한 문제들을 제도로 녹여내고 지속가능한 질서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당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기존 정당이 대안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기존의 질서와 관행, 세력 불균형에 도전한다면 기존의 틀을 깨라는 것입니다. (선거)결과 불확실성과 정치적 기회구조의 확대의 의미를 가진 민주주의라는 게임의 규칙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게임판도 자체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광복 후 반세기 동안 30여년의 군부독재, 냉전과 반공, 재벌중심 경제가 주형해 놓은 대한민국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교육 등의 사회구조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지난 10년 김대중·노무현 두 전 대통령의 노력도 쉽지 않았습니다. 때론 시도하면서도 타협하기도 했습니다.

 

알 속의 새 생명은 알껍데기라는 틀을 깨고 나와야지 아기 새로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보호해주는 알껍데기를 버리겠다는 생각이 없다면, 알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데에는 각고의 노력이 없다면, 알은 그냥 알일 뿐 새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고인의 대통령 당선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조직, 돈, 계보도 없는 3무(三無) 정치인 노무현은 기존의 낡은 정치와 지역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수평적 리더십과 탈권위주의로써, 변화를 갈망한 유권자의 열망을 정치적으로 동원했고, 이를 정치적으로 대표하면서 기득권과 대세론에 도전해 16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많은 지지와 반대에 직면했지만, 껍데기를 깨기 위한 그의 도전과 당선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등이 국민의 지지를 얻고 이명박 대통령 및 170석의 한나라당과 힘의 균형을 찾기 위해서는 지금껏 해왔던 모든 행태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와 새로운 시도의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안락한 보수주의와 현실안주라는 기존의 껍데기를 깨고 '반이명박-비민주당'이라는 구도를 깨기 위한 분골쇄신의 각오가 필요합니다. 실종된 시대정신을 찾아야 합니다.

 

첫째, 이제 거대담론에 매몰되지 않고,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에 더 눈을 돌려야 합니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등 스스로 진보라고 외치는 정당들도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서민과 중산층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지만, 그런 말 자체가 허공의 뜬구름 같습니다. 민주당 뉴플랜은 내부에서의 비판처럼 한나라당의 그것과 별반 차이를 못 느낍니다. 대안정당으로서 거듭나려면, 정당간 정치적 경쟁이라면 차별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민주VS반민주, 7대 강국-국민소득 4만불, 재벌개혁, 통일문제 등 거대담론도 필요하지만 교육, 복지, 노동, 교통 등 국민의 일상 속에서 현실적 문제의 해답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국민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과외비에 허덕이면서도 아이들 교육을 위해 빚을 안아야만 하는 우리네 학부모들, 노약자·장애인 엘리베이터가 없어 위험한 휠체어 리프트에 몸을 맡겨야 하는 장애인들, 돈 있는 사람들만 돈 버는 세상에 내 집 한 칸 마련하기는 멀어져 가는 우리네 서민들, 육아와 교육 걱정에 둘째 가지기 어려운 젊은 부부, 졸업해 이력서를 내도내도 소식 없는 우리 젊은이들……. 조금이라도 진보라고 생각하는 정당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찾기 위해서는 정말로 우리 국민이 힘들어 하는 것,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짚어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존재감을 찾기 위한 또 한 방법으로서 그에 걸맞은 규모를 갖추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특정 현안에 대한 정책연합을 구성해도 좋고, 공직 후보자를 단일화하고 공동으로 공약을 개발하는 등 선거연합을 구성해도 좋습니다. 이들 정당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진영이 참여해 사회변화와 상식적 일상 구현을 위한 진보적 가치의 공유와 큰 틀에서의 연대도 모색해 나가야 할 시점입니다. 그간 쌓인 상대측에 대한 감정도 있겠지만, 감정적 대응은 정치적 자해행위이며 광장(廣場)과 토론이 막힌 현시점에서는 일종의 사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4월 울산 재보선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보여준 연대와 연합은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거인(巨人)에게 대적한다고 혼자 달려들어 봤자, 따로 붙여봤자 질 게 뻔합니다. 지금처럼 사분오열 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거인(巨人)에게 각개격파(各個擊破)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위대한 것이지만, 지혜롭게 용감한 다윗 정당은 없습니다. 그럼 뭉쳐야 합니다. 2009년 10월 재보선,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 2012년 4월 총선, 2013년 대선 등 정치일정 등 앞으로 기회는 많이 있습니다.

 

기존의 세력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쪽은 늘 약자입니다. 자기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외부의 새로운 참여자를 동원해 최소의 세력구도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또한 기존의 강고한 갈등구조에 변화를 주기 위해 새로운 갈등(이슈)을 강도 높게 제기해 합니다. 최선의 방법은 사회적 갈등과 이해관계를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동원해 정치체계 내에서 이를 대표하는 것, 즉 대안을 형성하고 국민에게 제시해 선택받는 것, 대안을 정의하는 것이 최고의 권력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하는 '반쪽짜리 유권자들'의 변화에 대한 기대와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대한 열망은 2002년 미군 장갑차 사고(미선이,효순이 사망),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을 통해 강렬하게 나타났습니다. 제도권 정치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거리로 나와 직접 외치고 제도권 정치의 대오각성을 촉구했습니다.

 

갈 곳을 모르던 (국민의)정치적 열망에 출구를 열어준 것은 노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평가할 만하지만, 집권 이후 그 출구를 제도화함으로써 안정시킨 게 아니라 사유화했다. 노무현이 사라지면 출구도 사라지는 구조가 돼버렸다는 박상훈 박사의 지적에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지금 시점에서 더욱 안타까움으로 남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제도권 밖의 정치적 열망을 효과적으로 동원해냈지만, 집권 이후 그 열망을 제도권으로 포섭하는 데 실패한 셈이죠. 열망이 실망으로 바뀐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민주주의는 '피치자의 동의에 의한 정치체제'라는 토마스 제퍼슨의 정의는 우리가 귀담을 만합니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전제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체제라는 샤츠슈나이더의 정의에 공감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반응하는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라는 최장집 교수의 규정도 의미가 싶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의견에 귀 막고 동의하지 않는 정책을 강행하는 정권과 의회라면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국회와 정당들이 국민의 목소리를 크게 듣지 않고 국민의 요구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국민은 또 다시 거리에서 촛불을 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리의 정치는 강력하지만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어려우며, 제도적 개선을 이루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당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안락한 보수주의에서 벗어나 관성과 관행의 틀을 깨는 각고의 노력을 촉구합니다. 그래야지 갑작스런 대통령 궐위에도 우리 국민이 불행해지지 않고, 흔들리는 민주주의의 촛불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어려운 선택을 한 원초적 원인에는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현재의 권력구조의 문제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노 전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이었냐는 별도로 하고, 너무 쉽게 제왕적 대통령이 될 수 있는 현행 권력구조, 과도한 중앙집중의 문제는 반드시 손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차분하게 경건한 마음으로 고인을 보내드린 후,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로 우리 현실에 맞고 국민의 주권을 온전히 만들어줄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의 제도적 디자인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 중임제, 의원내각제, 준대통령제 등 모든 제도적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말입니다. 한편으로 고인이 외쳤던 정치개혁 및 지역주의 타파, 서울로의 초집중 완화 및 지역균형 발전을 위한 방향도 함께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9.06.01 10:11 ⓒ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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