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언] 5월 30일, 영결식
그 이후는?
2009-05-27 일하 민경국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영결식이 5월 29일이다. 그럼 5월 30일 이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봉하마을에서 많은 사람들과 새벽까지 울분을 토하고, 고인을 회고하며, 한편으로 여전히 고인이 고마웠고, 그 고마움을 남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었다.
새벽 1시에
자원봉사를 마치고 노트북에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한 것을 써볼까 한다. (저는 고인이 추구했던 가치에
공감하는 평범한 시민이다.)
수많은 국민들이 차비를 들여서, 3-4km를 걸어서, 3-4시간을 기다려서 조문하는 7일간의 슬픔과 분노의 가운데에서도 나의 관심은 [왜 그러셨을까?]와 [추모 그 이후]였다.
# 1. 왜 그러셨을까?
그는 외로웠다.
퇴임이후 부터 고인은 아마도 원죄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 그리고 약한 자에 가까웠던 그와 참여정부는 역설적으로 [이명박 정권]을 낳고만 것이다. 이명박 정권을
1년 넘게 지켜보면서 얼마나 허망함과 자괴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고인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수오지심). 수오지심은 단순히 창피함이 아니다. 맹자는 수오지심을 의(義)로움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인 것이다. 어느덧 우리 사회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가 되었다. 공직자로 나서는
사람들의 땅투기등 각종 이권범죄, 치졸한 변명, 그리고 황당하고도
모순된 그들의 당당함까지.
오해하지 말자. 고인의
부끄러움은 자기 자신의 잘못이나 불법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 나라의 리더였고, 그의 가치에 공감한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상징이었으며, 대통령 직무시
많은 사람들의 리더였고, 할아버지, 아버지, 지아비였다. 그는 옳지 않음에 대해서는 당당했으나(시비지심) 그로 인하여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늘 죄송함과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측은지심). 또한 그는 그가 만나는 그 누구보다도
고개를 숙이고, 겸손해하며 낮아지는 사람이었다(사양지심). 대통령기록물반환시 그가 현직 대통령에게 보낸 메일을 보면,그가
어떻게 리더로서 책임을 지는 사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인은 신념과 실천에 따른 자긍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염결함이 그를 더욱 외롭게 하지는 않았을까?
여하튼 그와 함께 하였고,
그를 지켜주어야 할 그 누구도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민주당 역시 그를 버렸으며, 시민사회단체도 그에게 역설적으로 비인간적인 염결함을 요구했을 뿐, 소리
내어 그를 이해하지 않았다.
고인은 언제나 희생끝에 그 충정과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신념에 따라 언제든 소수가 되고, 외로움을 즐겼으며, 소통하려 하였으며, 때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밭을 탓하지 않는 농부의 마음, 바로 자기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국민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충정이 있었기에 '인간'으로서 감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사람을 한 없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는 이미 '보통사람'을 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슬프다.
# 2. 추모 그 이후
봉하마을에서 짦은 자원봉사를 내면서 많은 추모객을 만났다. 고인을 따르던 사람들, 고인을 반대하던 사람들, 고인을 마냥 싫어했던 사람들, 고인에 대해 그리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 , , , , , ,
봉하마을을 찾아와서, 또는
점심시간에 시간을 내어 추모하는 사람들의 마음들을 관통하는 것은, 정치이념을 떠나, 바로 노무현이 추구하고 실천했던 상식에 대한 공감이 아니었을까 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강한 자의 자의만 남게 된다.
지금까지 고인의 충정과 진정성을 말했다. 이제 고인의 충정과 진정성의 근본을 이루는 가치에 대해 말하고 싶다. 또한
그것이 추모 그 이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인이 추구한 것은 - '사람'들이 사는 세상의 민주주의 – 였다.
'사람'은 간데없고 화폐로 변환된 가치가 만물의 척도가 되는
세상에서는, 이미 경쟁은 형식이요, 희망은 로또일 수 밖에
없다. 사람들 저마다 가지고 있는 삶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 '사람'의 가치는 정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민주주의라는 제도와 형식이 필요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제도로서 기능하지만, 그 운영과 견제의 바탕은 바로 국민이다. 오늘날 국민은 선거를 제외하고는 어느덧 지배의 객체가 되고, 국가의
의무자로써만 역할을 요구 받는다. 국민이 주인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하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국민의 개념과 시민의 헌법상
개념 차이에 대해서는 논외로 한다.)
한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동네, 마을, 지역등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시민들이 주인으로서, 공유자로서 권리와 의무를 행하여야 한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이해관계로 지방자치제가 발전할 때, 지역감정은 사라지고 지역특색이 남게 될 것이다.
88만원 세대, 생계와 여가를 위협받는 노인세대도 모두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민주주의의 대한 내 권리를 포기하게끔 했던 개개인의 환경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냄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정치이념이든, 사회신분이든 사람들 마다 제 각각일 것이지만 그들은 모두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이루는 민주주의의 구성요소인 것이다. 주인은 자신의 일에, 우리의 일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지켜낸다. 고인의 정부 명칭이 참여정부였던 것은 민주주의는 참여다. 참여는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임과 동시에 나와 다른 사람과
토론하고, 협의하는 공유와 타협이기도 하다.
영결식 이후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l 고인의 명예 회복 / 시민들에게 그의 죽음의 진실 알리기
l 고인의 실적의 공과에 대한 평가 / 시민들에게 그의 실적 알리기
l 고인이 추구했던 가치를 이어가기 위한 시민운동
(기금을 마련하면 좋겠다.)
시민운동은 크게 2가지로
이어져야 한다고 본다. 먼저 시민들에게 대한민국 민주주의하에서 보장받고, 존중되어야 할 것, 즉 우리의 권리를 인식하고 지켜내야 하는 것을
알리고, 서로 배워야 할 것이다. 2번째로는 지방자치의 성숙을
위해, 리더를 발굴하고, 지방자치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활동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시민들의 수준이 그 나라 민주주의의 수준이다. 누구를 탓하랴. 우리 모두 개개인이 민주주의를 이루는 분자인 것을.
마지막으로, 고인의
추구하는 가치는 통합이었다. 현직 대통령 및 여당에서 통합을 이야기 하지만, 진정한 사회통합은 지배자에 입맛과 명령에 맞게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는 권위적인 피라미드 통합이 아니라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적 정규분포 통합이다.
고인은 자신을 버림으로서,
자신의 신념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국민들을 깨닫게 하고자 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