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익스피어는 몰라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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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란(june1346)등록 2009.04.05 12:44

언제인가, 이스라엘 공격으로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끔찍하게 죽는 뉴스를 보면서 둘째아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참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못된 인종들이다.  그치? 저 하는 짓들 좀 봐라."

 "녜. 그러게 말이예요." 

"그러니까 쉐익스피어도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을 그렇게 나쁘게 그렸잖아."

"누가 쓴 무슨 책이요?"

"쉐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

"어느 나라 사람인데요?"

"영국사람, 쉐익스피어 말이야."

"그래요?  난 모르겠는데요."

 

어머나!  여섯 살때 이민와 여기서 대학원까지 나왔다는 사람이 쉐익스피어를 모르다니!  미국 교육이 뭔가 잘못돼 있나?

 

아는 언니를 만났을때  "언니, 글쎄 우리 아들이 쉐익스피어를 모른다네요.  아무리 문학 전공을 안했다고 해도 그럴 수가 있을까요?"  하고 걱정을 했지요. 

 

"하하하, 그럴 리가 있어?  보나마나 미세스 신이 하는 말소리를 못 알아 들었을거야.  천천히 다시 물어봐.  그런 일이 어디 한 두 번이라야지."

"아하!"

나는 휴우 하고 마음을 놓은 뒤 그 날 저녁에 아들을 보자,

"얘야!  내가 다시 한 번 묻겠는데 너 참말로, 쉐잌(하고 조금 띄었다가) 스피어 몰라?" 하고 천천히 물었습니다.

"쉐익스피어?  윌리암 쉐익스피어 말이예요?  알지요.  내가 언제 모른다고 했어요?" 

아들과 나는  서로 어이없는 얼굴로 마주 보았어요. 

 

"지난 번에 '베니스의 상인'을 얘기하니까 네가 모른다고 했잖아?  미국말로는 The Merchant of Venice 라고 하는데."

"녜.그랬죠.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책은 몰라요. 그렇지만 엄마가 '로미오와 쥴리엩'이나 '햄맅'을 말했다면 쉐익스피어가 누군지는 금방 알아 들었을 테지요."

"하하. 그랬구나.  내가 말하는 미국이름 소리는 서른해가 다 되어도 아직 그 모양이네.  죽을 때까지 써도 나아질 수가 없는 모양이구나."

 "아니예요.  엄마는 그만하면 아주 잘 하세요.  내가 못 알아들었으니 내 잘못이죠.  그런데 그 '베니스의 상인'이 무슨 이야긴데요?"

 

"어느 베니스 상인과 샤일록이라는 유대사람 돈놀이꾼 이야기란다.  돈을 빌려간뒤 갚을 때를 넘기니까 계약한대로 빚보증을 선 사람 살점을 한 파운드 떼가겠다지 뭐냐.  그런데 판사가  '증서에 써있는대로 살점만 한 파운드 떼어가고 피는 한 방울도 가져가면 안된다'고 판결을 했단다. 유대사람은 태어날때부터 돈밖에 모르는, 아주 못된 민족이야. 그렇지?  그러니 예수님도 못박아 죽였잖아. "

하며 나도 모르게 치를 떨었어요.

 

"에이, 엄마도!  영국이 어떤 나라얘요?  옛날부터 백인놈들은 소수민족을 누르는 정책을 일부러 해왔고, 그 책은 백인이 썼잖아요. 그러니 그런 책을 읽는 우리 엄마같은 사람이 '유대사람은 나쁜사람' 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지요."

 

그렇구나!  나는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 듯 했어요.  소수민족 무시하는 백인들 정책에 소수민족인 내가 휘말리며 살아왔네요.

 

옆에서 듣던 남편이 말했어요.

"맞아,  영국사람들이 '쉐익스피어는 인도와도 안 바꾼다'고 했다는데 얼마나 건방진 생각이야?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해도 그렇지. 사람 하나를 그렇게  큰 나라땅과 견주다니 말이나 돼?  '동양인은 더럽고, 흑인은 게으르고, 유대인은 나쁘다'는 백인우월주의에 우리가 빠지면 안되는거야." 그리고 이어서,

 

 "그래. 꼭 쉐익스피어를 알아야 해?  아들이 쉐익스피어를 모르면 큰 일이라도 난듯이 놀라고, 태산같이 걱정을 하고 말이야."  하며 놀리네요.

 

그 날, 나는 다음 세 가지를 마음에 두었습니다.

첫째:  아들이 쉐익스피어를 모른다 해도 놀라거나  부끄러워 하지 말자. 

둘째:  '유대사람은 나쁘다'라는 비틀린 생각에서 벗어나자. 

셋째:  이 나라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도 내가 말하는 영어이름을 아들은 못알아 듣는다. 

 

얼마뒤에  '민족학교'라는 비영리단체에서 한국동포들을 모아놓고, 퇴거 명령을 받거나 또는  파산하는 사람들에게 도움말을 주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미국 변호사가 도움말을 하고 아들이 통역을 맡았답니다.  

 

"네가 영어를 한국말로 통역한다구?" 

"녜. 내가 한국에서, 한국말로 말하면 아무도 내가 미국에서 온 동포인줄 몰라요."   

 

이 아들은 대학교 3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한 해동안 한국에 갔다가 돌아와 졸업하고 다시 한국에 가서 국제대학원을 다니고(영어로 공부했지만요), 졸업한 뒤에 그대로  눌러앉아  한 세 해를 한국통신에서 일을 했으니 어른이 된뒤에, 모두 여섯 해를 한국에서 보냈지요. 

 

세미나가 열리는 시간이 되자, 민족학교 여직원이 매끄러운 한국말로 사회를 보았습니다.   나날이 살기가 힘들어지는 요즈음, 무슨 도움이 될까해서 모여드는 사람들 얼굴은 걱정으로 가득찬 모습이었습니다.  한 예순 사람 남짓 모이니까 방이 꽉차서 걸상들을 좁혀 앉고 그런 난리가 없는데,  얘는 그 잘한다는 한국말을  더듬더듬하네요. 차압, 퇴거, 파산같은 무거운 낱말들을 말할때는 더욱 더듬거려요.  미국 변호사는 길게 이야기했건만, 얘가 통역하는 한국말은 짧게 나오고요. 

 

어느 덧 아이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니 사회자가 얼른 부드러운 휴지를 주더군요.  우리 부부도 땀이 밴 두 손을 꽉 움켜쥐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더듬어도 듣는이들은 눈들을 반짝이며 부지런히 묻고, 열심히 들었어요. 5십만달러를 5만달러라고 잘못 말했을때에는 마침내 모두가 웃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우리도 휴우하고 긴 숨을 내쉬며 움켜쥔 손을 풀었지요.  세미나가 끝났는데도 궁금한 것을 물으려는 사람들이 아들앞에 줄을 길게 서 있었어요.

"엄마, 아빠! 나 어땠어요?" 

"아주 잘했어."

 

나는 그 날, 두 가지를 더 깨달았습니다.

 

첫째:  매끄럽게 말을 못해도 듣고 싶은 사람은 다 들어요.  서로 '참마음과 참뜻을 얼마나 깊게 나누느냐'가  중요하지요.  쉐익스피어는 몰라도 되고, 또 잘못 말소리를 내어도 되어요. '아륀지'라는 말소리를 못내어 '오렌지'라고 해도 괜찮듯이요.

 

둘째: '한국에서 말하면, 미국동포인줄 아무도 모를만큼 한국말을 잘한다'는 착각은 아들이 누리는 자유가운데 하나라고요. 암만 잘해도 이 엄마처럼 잘 하겠냐고요.

 

 

 

2009.04.05 12:44 ⓒ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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