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땅’ 과 소주

정을 가지고 비논리적으로 살아가기---

검토 완료

박중신(papagoat)등록 2009.03.29 12:27
    군 복무를 마친 해 7월 1일부터, 일반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직장은 농촌지역 면 소재지에 있는 남자 중, 고등학교였다.

  첫 해엔 전임 여선생이 맡았던 학급(중학교 1년)담임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다음 해엔,'한 참 팔팔한 총각선생 이다.' 며, 고 1 학급담임으로 배치되었다.

   비록 면 단위에 있는 인문 고등학교였지만, 그 지역 중학생들은  군청 소재지에 있는 다른 인문 고등학교 보다 선호 했었다.

  전문성이 없는 일반인들이 학교 평가를 소박하게 할 때, 제일 큰 비중을 두는 것은 대학 진학 성적이다.  그런데 그 면단위 소재 학교의 진학 성적이  월등하게 앞서 있었기 때문으로 보였다.

   또 버스 왕래가 매우 드믄 지역이다 보니 그 지역 학생들에겐 ,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는 가까운 통학 거리 역시 큰 매력이겠다. 

   그 뿐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가 같은 캠퍼스 안에 있게 되면 , 여러 인연 때문에 같은 재단 소속 고등학교를 선택하도록 영향받기 마련이다.

   도시 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교 규모가 작았다. 그래서 학생 수가 적었기에, 학생들 생활 파악에  도움이 되었다.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몇몇 신입생들에 대해선, 얼굴은 물론 심지어 중학생 시절 학교생활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중, 고등학교가 구분 없이 교무실을 합동으로 사용하는 것도 학생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곧 바로 중, 고 교사들 사이 정보 교환에 의해  풀릴 수 있었으니까--.

   새 학급 명단을 받은 날이었다. 전년도 중 3 담임이었던 분이 호기심 때문에 그 명단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안면 있는 학생들이 발견될 때마다, 병아리 교사인 나를 위해 간략하게 인물평을 해주었다. 

    한 학생에 이르러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이 애가 우리 학교에 입학했다고 해서 어느 선생님 반에 들어갈까 궁금했는데---  올해 선생님 관심을 듬뿍 받고 자랄 학생이 하나 선생님 반으로 들어왔네요."

 " 누구인데요?"

 " 여기 김 정한이란 학생--,  혹시 모르세요?  그동안 교무실에 자주 불려오곤 했는데---. "

  " 글쎄요.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데요. 왜 그리 불려오곤 했지요? "

  " 우선 중간고사, 기말 고사를 볼 때마다, 학년 전체에서 꼴지를 도  맡아 하지요. 게다가 고집이 워낙 세어서---. 아마 올 1년은 머리 좀 아플 겁니다."

     새 학년에 대한 밝은 기대를  어긋나게 만드는 내용이라서 차라리 듣지 않은 만 못했다.

    그 당시 시험 점수가 나쁘다는 것은, 학생 잘못 탓으로만 여겨졌었다. 따라서 점수가 나쁜 학생들에 대한 체벌이,'학생에 대한 교사의 열성과 관심'으로 용납되던 시기이기도 했었다.

   첫해였다. 가을에'학교 시험'이라는 제목으로 교내 백일장 대회가 있었다. 심사를 맡은 국어 선생님 중 한분이 '호기심을 일으키는 작품'이라며 교무실에서 한담을 나눌 때 보여준 작품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충격적이었다.

     예리한 관찰력이나 진핍성이 돋보이는 듯해서, 다시 주의 깊게 읽으며 검토해보니, 전체 구성에 약간 흠이 있어보였다.

     흠이라 느끼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은, 'C8'이란 표현이었다. 욕설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잦은 사용 때문이었다.  불필요한 부분에 그 단어가 끼어있음으로 해서 , 앞, 뒤 내용상 연결이 약해졌고, 그래서 결국 구성에서  매끄러움이 희생되고 말았다.

   ' C8. 중간고사가 이제 끝났다. C8, 요 며칠 동안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가니까 뒈지게 좋았는데--. 그리고 교련도 없고---, C8. 그렇지만 내일부터 나는 죽었다, C8.  국어 시간에 운이 좋으면 30대  C8, 영어, 수학은 빵점이니 각 60대  C8, 독사 시간엔 ---아, 끔찍한 독사.  짝찢죽. 짝찢죽. C8,C8,C8,C8,C8----.'

  시험을 본 후 약 3-4일 동안은 학교가 그 학생에겐 지옥으로 보일 것 같았다.  점수가 나빠 각 과목 시간에 맞는 매를 하루 단위로 통계 내면--- 그 숫자가 적어도 백대는 훌쩍 넘을 거라 짐작되었으니까.

  심사를 맡은 선생들은,'낙서와 예술 사이에서 곡예를 할듯하다가, 그만 공중변소 낙서로  확실하게 전락 해버렸군.'하며  못내 아쉽게 여겼다.

    내 학급 학생이 된 김 정환에게선  이런 면모도 없었다. 하지만 시험 후 느끼는 육체적 고통이나 ,그로인한 정신적 스트레스는  낙서에 나온 그대로 일 것 같았다.

   지금도 교육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담임은, 각종 시험에서 자신의 학급이 1등을 차지하면,  자신의 유능한 지도 덕분이라 착각한 나머지 자랑 하고 싶어 안달하는 듯 보인다. 그들은 대개 잔치 방법을 이용한다. 

    우선 1등한 학생이면서 재력 있는 집이다면  학부형이 한 턱 내도록 유도한다. 

    그것이 안 되면?  '교육에 관심이 부족한' 혹은 '성의가 없는' 부모라고 포기하고,  자신이 직접 한 턱을 내는 경우도 있다. 

     대중에게 '1등 했다' 는 소식을 널리 알리며 부모가 의기양양하게 한턱을 쏘았는데, 다음 시험에서 연이어 일등을 못하면 그 아이는 부모와 선생들을 볼 때 어떻게 될까 ? 

   명예욕에 사로잡힌 나머지 둔감해진 그들 눈에 그런 정신적 부작용이 보일 리 없다 !

    그 당시는 비평준화 시기였기에  성적 경쟁이 더욱 강렬했었다. 그래서 학급 평균 점수를 낮추게 만드는 학생은 과목 담당 선생은 물론 담임에게도 매우 달갑지 않은 편에 속했다.

    그런데 전교 꼴등을 꾸준하게 유지하는 성적 부진 학생이 내 학급에 있다니!  평균 성적과 관련해서는 아예 큰 기대를 비워야한다는 징조였다.

    새 학년 첫 주부터였다. 그는 거의 매일 지각을 하고 또 잊혀질만하면 결석을 했기에, 줄곧  내 관심을 끌었다.

   교과 학습과 관련된 숙제를 해온다는 것 또한 전혀 기대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담임 과목 숙제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그 때문에 꾸중을 들어도, 태도 변화가 없는 듯 했다. 보다 못해 , 학교에서 미리 숙제를 마치고 가라며 종례 후 남겨 본 적도 있었다. 꾸중만으로는 고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도망 가버리곤 했다.

    그로부터 약 15시간이 지나 다음 날 아침에 담임과 마주치면 자신에게 엄청난 고통이 따를 수도 있는데--- 15시간 앞을 내어다 보는 일 따윈 안중에 없었다. 미래를 보면 불안, 초조가 따르기 마련이니, 마음의 평화를 위해선 그저 현재 이 순간만 바라보자는 뜻이었는지---.
    똑 같은 잘못의 반복으로 계속 쌓인 괘씸죄 크기는, 가난한 집이 파산 선고 받기 직전  빚 덩이 크기에 비유 될 만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매달 내는 수업료를 기간 내에 내지 않다 보니, 교장실에 나를 불려가게 만드는 2-3 명 학생 중에 끼어있었다. 하루 24시간 중, 내 관심을 자신에게 묶어두는 시간 크기에 있어서,  애인과 경쟁하는 듯 했다. 

   그 정도 이다 면 교사는 당연히 부모를 호출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친 부모임에도 불구하고 담임 요구에 응답이 전혀 없었다.

   처음엔, ' 전달을 안했나 보다.'라고 의심했다. 그래서  정직하고 충실하기에 꼭 전달해주리라 믿어지는 학생을 통해, 그의 부모들 앞으로 서신을 보내어 봤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들과 부모 모두 '듣는 귀가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그 아이에 대한 문제점 교정 노력은 포기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죽을병 걸린 환자에게 병을 치료해줄 처방전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만약 그 환자가 약을 먹지 않으면 아무 쓸모없기 마련이니까--. 

   일반 학생들에게서 바라는 바는,' 오늘 보다 낳은 변화- 즉, 발전'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바라는 것은 ,  그저 더 이상 다른 문제점이 눈에 띄지 않기만을 바라는  '오늘과 똑 같은 나날'- 즉, 변화 금지'였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그 애 아버지가  점심시간에 나를 찾아왔었다.

   만나고자 했던 갈망이 컸기 때문이었는지---.  그의 얼굴을 보자 반가웠다. 상담요구를  깡그리 뭉개 버렸던 행위에 대한 섭섭한 감정은, 그 반가움에 의해  신기할 정도로 말끔하게 밀려나가 버렸다.

   그를 상대로 그동안 그의 아들이 애를 먹인 내용을 하나, 하나씩 나열하기 시작했다. 듣는 부모 입장에선 매우 불편한 내용이련만---. 그러나 막상 바로 내 앞에서  듣는 그의 표정은  겉으로 보기엔 큰 흔들림이 없이 평온해 보였다!

   다른 부모들과 달리 염려하는 낌새가 전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문제의 심각성을 아예 모르는 것 같았다.

   5감 중 어떤 분야이든 감각이 무디어진 사람에게, 느낌을 전달하려는 의욕이 강하게 있다면, 자극의 강도를 높이기 마련이다. 심각성을 어떻게 해서든지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려다보니, 내 발언수위가 자꾸 높아졌다.

   끝 무렵엔 거의 규탄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것은 이미 상담이라 말할 수 없었다!

    내 발언을 모두 듣고 난 그는  짧게 사과 했다.

" 애가 공부에는 워낙 뜻이 없어서, 선생님들이 매우 힘드실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을 뵈려면 죄송합니다."

  보통의 학부형이라면, 뒤이어'그런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교사의 의견을 물어 보련만--- 그런 것을 물어 볼 사람도 아니고 또'교사가 내린 처방'에 해당되는 의견을 달갑게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았다.

   그와 나 사이에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학부모에게서 바라는 바가 매듭 되었으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는 '잘 가시라.'고 인사하는 과정만 남아있는 셈이었다. 그가 일어서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머뭇거리며 그가 말을 덧 붙였다.

 " 실은, 오늘 부탁을 하나 드리려 왔습니다."

 " 무슨 내용 인가요 ?"

" 저의 집 생활이 너무 어렵다보니 매월 납부금 마련이 너무 힘에 겨운 편입니다.  그래서 면사무소에 가서 극빈자 증명서를 떼었는데요. 납부금 면제를 좀  받을 수 없을까요?"

    머리를 한 대 강하게 맞은 기분이었다.  결국 그를 학교에 나오게 만든 힘은, '아들 문제 해결을 위한 교육 상담이 아니라, 교육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였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몸뚱이 키워 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머리를 키워 놓는 것도 중요하다 는 사실을 모르는 부모는 없으리라! 그러나 몸 키우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차다보면 , 정신 키우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런 사정을 자주 보아왔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 너그러워져야 하련만---,'납부금에만 신경을 쓰다니!' 라는 섭섭한 생각만 머리에서 맴돌다보니 떨떠름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도와주고 싶다는 뜻이 있고 또 진지하다 면, '얼마나 심하게 가난한지?'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 준비가 있어야 교감, 교장에게 면제의 타당성을 설명할 때 도움이 되니까---.

  그러나 아들 교육에 대해 그가 진지하지 못해 보이듯이, 그에게 경제적 도움이 되는 일에 대해 나 역시 진지함이 없었다.  그래서 예의상 극빈자 증명서를 받아 책상 서랍에 넣으면서 말했다.

  " 일단 교장 선생님이 결정할 내용이니 올려보긴 하지요.  그러나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운이 좋아 만약 면제받을 수 있게 되면, 알려드리지요"

  그 애 아버지와 면담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그가 떠나고 난 뒤, 극빈자 증명서를 꺼내 놓고 곰곰이 바라보았다.  괘씸죄가 쌓일 대로 쌓인 아이와 학부형에 대한 불쾌감이 새삼 떠오르며, 면제를 위한 노력이 내키질 않았다.

   그러나 그 애 아버지의 초라한 행색을 돌이켜보면, 연민의 정이 일어났다.

   그 연민의 정 때문일까?  '불쾌감이 마음 한 쪽 편에 도사리고 있다 보니 도와주기를 싫어하는 것이지?'라는 비난의 울림이 자꾸 내 마음 속에서 메아리쳤다. 불성실하게 처리하는 것은  보복 행동이었고, 그런 행동이 습관화 되면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한 인간으로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어느 듯  학생들은  모두 떠나고 선생님들은 교무실에 남아 퇴근 때까지 잡무를 처리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교장 선생도 한가로운지 교무실에 들려 선생님들과 한담을 나누었다. 그래서 적절한 틈을 보아 그 문제를 끄집어냈다.

  " 저, 교장 선생님. 한 가지 여쭈어 봐도 되겠어요?" 

  " 무슨 내용 이지요?"

  " 오늘 오후에 제 학급 학부형 한분이 극빈자 증명서를 가지고, 납부금 감면을 바라고 찾아 왔어요. 처음 겪는 일이라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학생 성적은 어떻습니까?"

   " 등수로 말하는 것이 이해하는 데 빠를 것 같습니다만---. 전교 학생 중  끝에서 1등을 다투는 편입니다."

    " 그래요? 그럼 근태는 어떻고?"

    " 매일 지각을 하고, 일주일에 하루 혹은 이틀은 결석을 하는 편입니다."

     " 그 정도라면--- 납부금 면제 혜택을 베풀기엔 학교 재정이 너무 빈약한 것 같습니다."

    그 때, 교감 선생이 말을 받았다.

     "  학년 초라면 그런 문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 이미 새 학기가 시작하고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학부형에게 이미 너무 늦었다고  말하면 어떨까요?"

     " 문제는 제가 그 아이를 지금 까지 지독한 골치 덩어리로 여겨왔다는 점인데요. 이 순간에도 제발 우리 반 학생이 아니면 정말 좋으련만-- 하고 생각하니까요. "

      " ---------. "

      " 그래서 제가 이 문제 검토에 성의가 부족해 보이면, 그동안 품어온 얄미운 감정 때문에 불리하게 처리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또 제 자신에게도 나중에 마음에 걸리는 일 중 하나로 될까봐 부담스럽습니다."

      교장은 매우 너그러운 분이었다. 그는 나이 어린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

      " 제가 가정을 방문해서 형편을 한번 살펴보는 절차라도 거친 후에 결정했으면 좋겠습니다."

       " 그렇게 한번 해보세요."

  다음 날이었다. 아침부터 그 학생 집을 기습적으로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종례를 하기 전에 그 학생 집 부근에 사는 다른 학생을 불렀다.  그리고 그 마을에 들릴 곳이 있다며 길 안내를 부탁했다.

   종례 후 20여분이 흘렀다. 이미 학생들은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운동장에서 축구 시합을 하는 소수의 학생들만 보였다.  그래서 교실에 들려 안내를 맡은 학생을 찾았다.

  빈 교실에 혼자 있기에 심심했는지, 그는 부근에 사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결국 밀행(密行)이 아니라, 공개(公開) 행차가 되어 버렸다.

  시골 길을 자전거로 4킬로 정도 달려갔을 때였다.  안내를 맡은 학생이 굽이진 숲길 가에서 자전거를 멈추더니 말했다.

   " 저기 산 밑에  집이 하나 보이지요?  그것이  그 애네 집이여요. "

    산자락 끝 양지 바른 곳에 큰 무덤들이 보였지만 집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 학생이 묘지를 가리키며 말하는 것만 같아 차가운 기운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 응? 어디?  어디에 집이 어디 있다고 그래? "

    " 저기 무덤이 보이지요?  그곳에서  오른 쪽으로  보면 소나무 숲이 있고요.  그 가지들에 가려졌지만 저기 지붕이 약간 보이잖아요?!  장독도 하나 옆에 있고요."

    '장독'이라는 말을 듣고, 장독을 먼저 찾아 그 주위를 자세히 보았다.  무덤들로부터 오른 쪽 50 여 미터 지점 숲 사이에 , 서부 영화에 나오는 인디언 천막처럼 생긴 원통형 물체가 하나,  보일락 말락 서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농촌에서 일반적으로  집이라고 부르는 건축물과 너무 다르기에 곧 바로 알아보지 못했나 보았다.

  '인디언 천막 형'이다 보니 가로를 지르는 대들보가 필요 없고 , 또 길이와 넓이가 삼 미터 미만인 흙집이다 보니 기둥들이 필요 없어보였다.

      함께 온 학생들 모두가 들어갈 공간이 없어 보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매우 초라한 자신의 가정 모습이 친구들 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그 아이에게 고통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즈음에서 아이들을 보내 버렸다.

    논둑길을 따라 그 집에 도달하기까지, 그 안에선 어떤 인기척도 없었다. 주변에 마을도 없는 외 딴 곳에 살면서 개 한 마리도 키우지 않는 것 같았다.

   해 저문 시각, 숲속 무덤 앞에 선 기분이랄까---. 그곳에 다가 갈수록  주변의 정적에 압도된 나머지 '어쩐지 사람을 만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지만 일단 이곳까지 왔으니  허실 삼아 이름이라도  불러 보아야했다.

    " 정환아 !  김 정환이 집에 있니 ?
    그런데 의외였다. 곧 바로 '예'하는  소리와 더불어 2-3초 간격을 두고 출입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아이가 얼굴을  내밀고 나를 보자 당황하는 표정을 머금은 채 고개를 꾸벅 했다. 그리고 안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 아버지,  아버지 ! 담임선생님이 오셨어요. "

    " 어 ?  선생님이 ?"

    그 애가 나온 출입문을 살펴보니, 각기목과 비료 포대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었다. 그 하나 만으로도 그 집의 빈곤이 너무도 뚜렷했고 마음 한 쪽이 싸- 하니 아렸다.

    그의 아버지도 곧바로 나왔다. 잠을 자다 나왔는지 얼굴이 부스스 했다.
    " 안녕 하세요. 선생님.  아니!  무슨 일로 갑자기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그를 향해 ' 납부금 면제 여부를 결정하려면, 얼마나 심하게 가난한 지 알아야하는데, 지금 그 가난한 크기를 담임인 내가 조사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런 낌새를 알아챈 나머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까봐 염려 되었다.

    그러다 보니 순간적으로 엉뚱한 내용들이 답변 형식으로 튀어 나왔다.

  " 오늘 이 부근에 좀 들릴 일이 있는데--, 마침 어제 부탁하신 일의  결과를  알려드리기도 해야 하겠고----, 또 정환이가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 첨 저 첨 헤서 왔습니다. "

   " 아, 그래요. "

     그러나 다음에 전달해야할 내용이 문제였다. 가정 형편을 보니 납부금 면제를 꼭 받아야할 것 같았다. 그러나  어제 교장, 교감 선생의 말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면제받기는 어려워 보였다. 면제받게 하려면, 담임인 내가 부담 할 것을 각오해야할 것 같았다.

   내가 부담할 경우 손실 크기를 어림잡아 보았다. 대략 내 봉급 실 수령액의 7-9% 정도에 해당되는 듯 했다. 그 정도라면 하숙비를 지불하고 남는 몫에서 떼어 내어도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어 보였다. 그래서 체념하듯 작심하고 말했다.

     " 교장 선생님께 오늘 조금 전에 말했는데, 학교 형편이 어렵지만 허락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궁금하실까봐 이왕 지나는 길에 전해 드리고 가려고요."

      " 아이고. 정말 고맙습니다.  더구나 이 멀고 누추한 곳까지 직접 오셔서 알려주시다니--. 이럴 것이 아니라 잠시 들어오시지요."

    바라던 대로 일이 풀려 그 에겐 매우 반가운 만남이겠지만 , 학교에서 면제 불가 결정이 내려지면,  내 봉급의 7-9% 가량을 잃게 되는 상황이기에 나에겐 매우 찜찜한 만남이었다.

    게다가 극히 초라한 집안 모습을 담임에게 보여주는 것에 대해 그 아이가 괴롭게 여길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자리를 빨리 떠나고 만 싶었다.

     " 아닙니다. 원래 계획하고 온 다른 일들이 있으니 이제 어서 돌아가야 하지요. "
     
      " 그래도 잠시만 들렸다 가세요. "

  그는 내 손을 잡고 안으로 끌었다. 그래도 나는 바쁘다는 말을 되 뇌이며 당기는 힘에 저항을 보였다.

        " 하기야 집이 워낙 누추해서 ----."

    그는 내 손을 놓으면서 아쉬운 듯 말했다.  그런 그의 태도를 보자, 그냥 가는 것이 '가난해서 지저분한 곳을 피하는 무시'로 비추일 우려도 있어 난감했다. 

  '하기 싫은 일은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배웠는데---.  머물기 싫은 곳이니까 반드시 머물러야 하나보다. 그리고  가난을  무시하는 생각이 나에게 없다면 가난한 참상을 내가 본다고 해서 괴롭힘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라고  자신을 달래었다.

     " 그러면 잠시 쉬었다 가도 폐가 안 되겠습니까?"

     그는 활짝 웃으며 반가와 했다.
     
      " 폐 끼치다니요? 하지만 누추한 살림에다가 워낙 집안이 어지러워진 상태이니 이해 해주세요. "

       " 아무 연락 없이 불쑥 찾아온 제 탓이니 염려 하지 마세요."

   아이와 그가 나온 출입구는 대문이자 부엌문이었다. 채 반 평이 못되는 반원형인 그 부엌 공간에 들어서자 시어버린 김치 냄새와 젓갈 냄새가 가득 고여 있었다.

   밥솥이 걸려있는 아궁이 위쪽은 신발들을 벗어두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보다 30 센티 정도 높은 곳에 방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자 , 두 평 남짓한 방이 하나 있었다.  그 집 전체는 원통형 구조였으니까, 부엌 공간이 빠지고 보니 반원 이었다. 동생 셋, 부모, 그리고 그, 애의 삶 형태를 유지해주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일반적으로 창문이란 환기와 채광 두 가지 기능이 있다. 그 집에도 창문 시늉을 낸 부분이 있었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고 닫다 보면 찬 기운이나 습기도 바람과 함께 밀려오기 마련이다.  가난한 집이다 보니 환기의 이점보다 찬바람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인지---. 환기를 아예 포기한 것 같았다. 그래서  토벽에 고정식 창으로  박혀있었다.

    채광만을 바라고 낸 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투명한 유리 대신 비료 포대에서 나온 두터운 비닐을 사용 하고 보니, 빛마저도 거의 차단되었다.

   그래서 밖에서 그 안에 들어서면, 어둠에 적응해서 동공이 확대되기 까지, 한 동안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사람이 나가고 들어올 때 공기가 따라 들어오기 때문에, 질식하지 않는 점을 제외하면, 무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존재 양식 또한 내 눈엔 송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 역시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아왔기에 가난에 익숙한 편이지만, 이들의 참상은 충격적이었다.

      원래 좁은 곳이자 또 물건들이 널려진 상태라서  마땅히 앉을 만한 곳을 찾기도 힘들었다. 물건들을 대충 밀어내고 간신히 앉을 공간을 마련해주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어둠에 익숙해져 사람 얼굴을 이제 막 알아볼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아이가 내 뒤에서 '아버지!'하고 불렀다. 나를 마주하고 앉은 그는 아들을 향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싸인이 오고간 것 이었다.

     교사 생활이 겨우 2년차에 접어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 알고 있었기에 어색하고 불편했다.

      미리 가정 방문 계획을 알리고 가면 ,  어떤 가정에선 촌지라는 봉투를 마련하였다가 내밀곤 했다.  형편이 어려우면 음료수라도 대접하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 때가 묻지 않은 신임 교사들은 얼굴을 붉히며 쩔쩔 매기 마련이다. 더구나 생활이 궁핍한 농촌 가정에서 그런 모습이 보이면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바로 그런 폐단을 막으려, 가정 방문이 필요한 경우 기습적인 방문을 시도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난한 집에서 그런 접대 준비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 시도를 막으려면 가능한 한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앞세워 빨리 일어나야한다.
  
    " 퇴근해야하는 선생님 자전거를 잠시 빌려 타고 왔기에 곧 가야합니다.  아이 지도를 위해 제가 꼭 알아 두어야할 내용이라도 있다면, 최대한으로 간추려서 말씀해 주시지요."

      곧 바로 떠난다는 것을 정중하게 암시했는데 , 아이는  벌써 방문을 나서 버렸다.

  '떡줄 사람은 생각이 없는데 김치 국부터 마신다.'는 말이 있는데--- 지레 짐작으로 공공연하게, '나를 위한 접대 준비하지 말라.'고 아이에게 말 할 수도 없었다.

   이런 내 생각의 흐름을 간파한 그는 누에고치 입에서 실이 나오듯 끊이지 않는 이야기로 나를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20여년을 더 살은 그의 노련함을 도저히 내가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통해 , 그 아이와 그 가정에 대한 이해의 폭이 상당히 넓혀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바심 가운데 그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 우리 집 가정 형편이 매우 초라하지요? "

  " 사람 살아가다보면  여러 가지 형편에 마주치기 마련이겠지요. "

  "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도 없다보니, 어렵게  겨우 가정을 꾸렸는데---  그만 제가 폐병에 걸려 3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다보니 더 이상 노동을 할 수도 없고--."

   " 그랬었군요. 무엇보다도 어서 빨리 건강이 회복되셔야 겠습니다. 그렇다면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하시는지요? "
  
   " 이제 뭐 제 병이 호전되기를 바랄 단계는 지났고요---. 그저 덜 고통스럽게 가기만을 바랄 뿐이지요. "

  " 그래도 부양해야할 아이들이 있으니 용기를 내셔야지요."

   " 그런 면에선 애들 엄마가 이제 모두 처리해 가고 있어요.  오히려 내가 있으면 , 집안 경제면에서 부담만 될 뿐이지요. "

   " 정환이 엄마가 직장에 나가나요? "

   " 직장은 아니고요---. 새벽이면 여기 바닷가 포구에 나가 생선을 받아 행상을 합니다. 하루 종일 떠돌다 보면 집안을 손 볼 틈이 없지요. "

   " ----------------. "

   " 저 녀석이 제 일 큰 녀석이다 보니, 제 어미 대신 집 안  일 하느라  애쓰지요. 우리 집 형편으로 보아서는 저것이 계집애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

   " ---------. "

   " 지각하는 날이 많지요? 아침에 일어나 밥 지어  어린 동생들 먹여서 학교에  먼저 보내다 보면 제 시간 내에 학교에 가기가 힘들 겁니다.  더구나 초등학교는 바로 옆에 있지만 고등학교는 먼 면 소재지에 있어서 ---"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지각했을 때 꾸중했던 일들이 떠오르며 불편했다.

   " 아, 지각 이유가 그래서였군요."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라면 친구들과 어울려 뛰놀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인데--- 더구나 여학생이 아닌 남학생이 온종일 떠돌이 행상하는 어머니대신, 밥 짓고, 빨래하며 병구완하기가 몇 년이라니!  정말 힘든 시련으로 보였다.

  이른 봄엔, 수업을 마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집까지 잰 걸음으로 갈지라도 저녁 밥 짓기에는 늦은 시각이겠다. 숙제 때문에 종례 후에 잡아두어도  도망간 이유가  아마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생들 저녁먹이고 설거지를 마친 후에야 , 책을 펼칠  수 있을 터인데--- 그 좁은 공간에서 호롱불 하나 달랑 켜놓고 동생들과 공부를 한다한들  욕심 많은 교사들의 기대를 얼마나 채워주랴 !

  '선생님!  제 실정에선 공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라고 하소연이 섞인 항변 한번 못하고, 황소처럼 두 눈만 깜박 깜박이며 점수 나쁘다는 잘못(?)대가로  매 맞는 고통을 참을 뿐이었다.

    굶주림과 마찬가지로 , 이것 역시 여러 생활 고통 중 어느 하나이려니 ! 하고 수긍해온 온순함--- 그 모습들이 너무 측은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지각이나 결석 때문에 꾸중했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 때마다 피할 수 없는 가정 형편을 떠올리면 서러움에 겨워 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겠다. 그런 서러움을 불러일으킨 원인의 일부가 담임으로써 학생 생활 이해 부족이라 생각되자,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여러 면에서 볼 때, 그의 이야기를 중간에서 적절하게 자를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기회만을 기다리는데  어떤 틈새도 보이지를 않았다. 

    조바심만 치는 사이, 어느 듯 밖에서 그 아이 인기척이 다시 들렸다. 그리고 조금 더 있다가 그 애는 술상을 차려 들고 왔다.  술을 받으러 구멍가게가 있는 먼 부락까지 달려갔다가 온 모양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그것도 남학생이 차린 술상이 오죽하랴! 상위엔 막걸리 냄새가 나는 주전자와 술 사발로 사용할 대접 두 개, 그리고 풋고추 몇 개와 가무잡잡한 색깔의 젓갈이 담긴  반찬 종기가 하나 있었다.

    "시골이라서 변변치 못합니다.  대포라도 한잔 하고 가셔야할 것 같아서 ---."

     " 원래 저는 술을 전혀 못합니다.  괜히 부담을 드려서 죄송하기만 합니다. 하숙집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추기도 해야 하니, 차라리  그냥 이제  일어서야할 것 같습니다 만---."

      " 무슨 말씀을요. 그냥 가시면 저희가 너무 미안하지요.  이왕 보아온 술상이니,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딱 한잔만 하고 가시지요."

       " 정말 제가 술을 못해서 그러는데---. 그냥 떠날 수 있게 이해 해주시면 더 고맙겠습니다만--. 대신 따스한 정과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아이에 대한 장점을 마음에 잘 담아 가겠습니다."

       " 우리가 실수를 했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맥주를 한 병 가져오는 것인데---. 정환아 ! "

    그는 아이에게 다시 가게에 가서 맥주를 한 병 가지고 오라고 시킬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듣자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을 매라면 일찍 맞는 것이 낳듯이, 마셔야 만이 벗어 날 수 있다면 차라리 빨리 마시는 것이 낳을 것 같았다.

    "그러면  성의를 생각해서 딱 한잔만 받겠습니다. "

   내 말에 그는 활짝 웃으며  철철 넘칠 정도로 대접에 가득 부었다. 답례로  내가 그의 잔에 부으려 주전자를 잡았을 때였다. 그는 환자이니 마실 수 없다면서 따르는 자체를 처음엔 극구 말렸다.

   그러나 학부형과 학생을 구경꾼으로 삼고 선생이 혼자 술잔을 드는 것은 너무  어색할거라 직감했나 보았다. 그는  형식적으로 거의 한 모금만 따르게 했다.

   "술을 드실 수도 없는데, 이렇게 억지로 대작을 하시다니 --- 오늘 찾아온 것이 이렇게 큰 실수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이 한잔만 비우고 일어서겠습니다."

   그와 나는 잔을 들었다.

    평소 체질상 술을 싫어했었다. '여자처럼'이란 비아냥대는 표현을 들어도 술을 마시지 않곤 했다.
    그래도 도저히 피할 수 없어 마시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때 가장 거북스러운 술이 막걸리로 여겨졌었다. 우선 량이 많다보니 위장에 저장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둘째로 마시고 나면 항상 뒤 머리가 빠개질듯이 아팠기에 ,보기만 해도 몸서리치며  겁을 잔뜩 먹곤 했었다.

  음료수야 맛을 음미해가며 즐기지만, 약은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단숨에 마시기 마련이다.  막걸리가 나에겐 음료수가 아니라 빨리 지나쳐야할 고통이었다. 그래서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 모습이 그만 큰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그는 잽싸게 또 한잔을 따르려 했다.  그래서 그의 손을 잡고 만류했다.

  " 그만 따르시지요. 저 정말 술을 못합니다.  그냥 일어서기가 어려워 한잔 마신 것입니다. 더구나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추어 가야하니 이해 해주십시오."

   " 아이 , 선생님도. 생각보다 약주를 잘 드시는 구만요.  저는 환자라서 마시지도 못하고 또 애 어미도 술은 못 마시는데 ---. 남은 술을 마실 사람이 없어요. 그러지 말고 딱 한잔만 더 하시지요. 한 잔만 마시면 정이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

   그는  다시 잔을 가득 채웠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가난한 자의 힘에 밀려 한 되나 될 법한 주전자의 막걸리를 거의 혼자 마시고 겨우 풀려나올 수 있었다. 

    워낙 많은 량이, 그것도 단지 몇 분 만에 위장 속에 한꺼번에  밀려들어가니, 미처 위장에서 내려가지 못하고 남은 막걸리들은 걸을 때 마다 배속에서 출렁 거렸다. 불편을 넘어 아주 큰 고통이었다.

    그 날 밤, 저녁을 먹기는커녕 , 간간히 밖에 나가 토해내느라 밤새 끙끙거리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성적, 근태, 나아가 자칫하면 학비 부담까지 떠맡기는 처지이기에 달갑지 않은 집에서, 억지 술까지 먹여 고생까지 얹어주는 그  인연이 참 지겹게 느껴졌다.

   다음 날이었다. 교장 선생님에게 주거 환경과 어머니 대신 가정 살림을 꾸려나가는 점을 중심으로 방문 결과를 보고했다.

   이어서 그 학생 경우엔 공부 못하는 것,  또 결석이나 지각 심지어 무단 조퇴가 결코 죄가 될 수 없으며, 그러한 사정을 모르고 험하게 꾸중한 담임의 죄가 크다는 점에서 사죄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납부금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주제에, 학급 학생 납부금 면제를 거의 강요하다 시피 하는 발언으로 들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개인 부담을 각오한 터이니, 불허 결정이 내려진다 해서 큰 불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아이  납부금 때문에 교장실에 더 이상 불려갈 필요가 없다 생각하면 오히려 후련하기도 했다.

   그런데---상황이 묘하게 변했다. 교장 선생은 내가 바라는 바를 부담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반갑게 여기는 기색 이었다!

   " 좋아요. 면제 해주기로 하지요. 대신 조건을 하나 제시할게요."

    " -------. "

    " 학교 재정이 어려우니 무조건 면제는 힘들고---. 불우 이웃 돕기 차원에서, 담임선생이 담임 수당을  낸다면 나도 제 1개월 교장 직책 수당을 보탤 의사가 있는데----  그렇게 해서 납부금을  면제해주면 어떻겠어요? "

     그 당시 담임 수당이라고 하는 것, 막걸리 한 되 값이나 될 법했다. 그 정도 비용으로  납부금이 면제된다면  횡재였다!

   " 교장 선생님 !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가 세상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도록 저도 성의 것 지도하겠습니다."

  경제적 손실이 막아지고 , 납부금과 관련 교장실에  불려가는 부담이 확실하게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애 덕분에 '공부 못하는 것이 반드시 학생 죄는 아니다.'는  깨우침까지 덤으로 얻었으니, 관련된 사람들 중 내가 가장 크게 이득을 본 존재가 되었다.

    아무튼 학생 평가에 있어서 성적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인식이 바뀌자 성적이 나쁘다고 꾸중까지 하는 어리석음은 그 이후에야 비로소 가셔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애 지각을 바라보는 내 눈길도 부드러워진 듯 했다. 예전과 달리 따뜻한 격려로 꾸중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 후 몇 달이 지나 늦가을에 접어든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막 시작되는 순간에 그 애 아버지가 또 찾아왔다.

    " 선생님,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몸이 부실하다보니 그동안 찾아뵙고 인사 한 번도 못해 죄송합니다. "

     " 안녕하셨어요?  몸은 좀 좋아졌나요? "

     " 뭘요. 그저 마음 편하게 지내려 하지요."
    
   그와 대화를 하면서도 , 내 머리 속에선  '이번엔 또 무슨 부탁을 해올 까?' 하며 미리 겁부터 났다. 

    하지만 괜히 지레 짐작에 불과했다.

    " 오늘은 요---.  그동안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점심이나 한 끼 대접해드리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시골 면 소재지에서 점심 대접이라야 장터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이면 족할 터였다.  그러나 그 정도 지출도 그에게는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 만 같아 꺼려졌다. 

    " 고맙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하숙집 할머니가 특별히 반찬을 마련해 주셨기에 도시락이 음식점 밥보다 훨씬 좋을 것 같아요.  이런 날 매우 드믈 어요. 또 점심  시간이 너무 짧다보니 음식점에 오고 가는 시간 , 음식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  이러다보면  매우 불편하고---."

   "  ---------. "

   " 부근에  가정 방문하다가 들리면 전에 마신 것처럼, 차라리 농주 한잔 주시지요. "

  " 하지만 오늘은 꼭 점심을 접대해야겠다고 모처럼 시간을 내어 왔는데---."

  " 기회가 또 있겠지요. 오늘은 제 뜻을 좀 따라 주시지요. 그러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도시락을 꺼내어 그 앞에서 열어가며 금방이라도 식사를 시작해야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 태도에서 예전과 다른 완강함을 발견했는지, 그는 자신의 뜻을 마지못해 접는 것 같았다. 

    그 포기하는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 교무실 밖으로 안내해서 작별 인사를 서둘렀다.

   " 이것 어쩐다? 참 섭섭해서---."

   " 받아야할 사람이, 이미 받은 것으로 여기며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면 접대하신 것과 똑 같잖아요.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세요. "

    " 그래도-- 그냥 가자니  미안해서-- .  그럼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 예, 어서 살펴 가시고---, 몸조리나 잘 하세요. "

     그냥 발길을 돌리기 어려운 듯, 그는 교문을 향해 가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곤 했다. 그런 그를 향해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서 가라,'는 뜻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다시 꾸벅하곤 했었다. 꼭 내 친족을 전송하는 기분이었다,

   그럭저럭 짧은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식사 후 양치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다시 돌아오는 그의 모습이 창밖에 보였다. 그는 내가 점심을 마쳤는지 확인하느라 밖에서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며,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내 책상에 도시락이 없자 안심이 되는지 문을 열고 곧바로 내 자리로 다가왔다.

   "선생님 ! 그냥 가려니 어찌나 서운하던지요 ---.  지난번에  보니까 약주를 잘 하시기에 밖에서 점심 대접은 못하지만,  이것이라도 한잔 드시라고 가져왔습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누런 가게 봉투를 내밀었다. 그 속에는  소주 한 병과 안주로 사용될 라면 땅 과자가 한 봉지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 한쪽이 싸하게 아려왔다. 한편 목 너머로 벅찬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며 눈시울이 자꾸 따가워 지는 것 만 같았다.

    " 아니! 뭐 하러 이런 것까지 사가지고 또 오셨어요? 어서 집에 가서 몸조리나 잘 하실 것이지--. "

    " 그냥 성의로 알고 딱 한 잔만 드시고 수업 들어가세요."

    술 마시고, 얼굴이 붉어진 상태에서 수업 들어가는 것을 매우 싫어했지만 그 날 만큼은 주저하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의 손을 잡고 숙직실로 들어갔다.

     그 순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하지만 교실에 들어가는 것을 약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숙직실이다 보니 소주잔으로 쓸 그릇은  없었다. 그래서 커다란 물 컵을 들었다. 그는 예전에  막걸리를 권할 때처럼, 만류에도 불구하고, 잔에 철철 넘치게 따랐다. 그 한잔은 거의 소주 반병 비슷했다. 그는 술병을 내려놓고 라면 땅 봉지를 따서 옆에 조심스럽게 놓으며 마시기를 권했다.

  지난 번 가정 방문 때처럼 , 내가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게 배려하기 위해서였나보다. 대접받는 나만 마실 수는 없기에 그에게 다른 컵을 내밀며 권하자 '병자이다' 는 점을 새삼스럽게 되 뇌이며 예전처럼  받기를 사양했다.
  
    그럭저럭 잔을 다 비우자 그가 다시 채우려 했다. 

  " 이제 수업에 들어 가 보아야 합니다. 65명이란 학생이 수업을 못 받는 점을 고려해야 하니까요. 대신 아직 남은 술은 제가 하숙집에 가지고 가서 출출할 때 마셨으면 합니다만--."

   " 아, 그렇게 하시지요, 선생님.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잖아요. 선생님이 이렇게 소주라도 한잔  드시는 것을 보니 제 마음이 매우 편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바로 그 때였다. 숙직실 문 밖에서 인기척과 더불어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업해야할 학급의 실장 학생이 얼굴을 내밀었다.

  "  오늘 여러 가지로 죄송했습니다. 아무튼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 그럼 수업 때문에 멀리 배웅을 못하겠습니다. 살펴 가시고 몸 조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교문을 향해 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도 급히 교실로 향했다.  수업 시간은 이미 10분이나  지난 후였다.

   그 날 수업은 '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오 헨리의 단편 부분이었다. 

   크리스마스 전야--- , 가난한 아내는 머리칼을 잘라 남편 시계에 어울릴 시계 줄을 사놓고 , 퇴근하던 남편은 시계를 팔아 아내의 금 빛 머리칼에 어울릴  값 비싼 머리 빚을 사오는 내용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물질적인 빈곤이 원인이 되어 집안에 짜증이나 갈등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 집의 가난은 정반대로 순기능을 하기에 의외였다.

    마음을 훈훈하게 데워주는 온도는, 가난의 크기에 비례했다. 그리고 조금 전 내가 만끽한 마음 훈기는, 그 부부들이 느낀 훈훈함 못지않아 보였다.

    가르쳐야할 내용에 교사가 먼저 감동을 받고 보니, 표현에 있어 주저하는 어색함이나  긴장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감흥들이 자연스럽고 적나라하게 줄줄이 쏟아져 나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순간의 강의가 아마  교단에 섰던 이래  가장 즐겁게 펼친 강의였던 것 같다.  
   
    점심 식사 이후 노근함에  술기운이 더해지고, 또 지난 몇 일간 시험 출제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이었나 보다. 지금까지 풀이한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고 의심이 가거나 아직 이해가 부족한 부분이 발견되면 질문하라고 지시했던 것 같은데-- 학생들이 본문을 검토하는 동안 나는 교탁에 엎드린 채로  그만 잠이 들었나보았다.

   원래 술을 마시지 못하니 술에 취한 것만으로도 힘겨울 터인데--- 정에 까지 취해버렸으니,  잠이 몹시 깊었나 보다.  

    목이 마른 상태가 고통스러울 정도로까지 느껴지며,  잠에서 깨어났다. 잠자리가 생소해서 둘러보니 숙직실이었다. 창밖은  이미 짙은 어둠에 뒤덮여 있었다.

   어느 곳에서인가  굿을 하는지, 늦가을 싸늘한 밤바람을 타고 , 무당의 괭가리 소리와 북소리가 덩더꿍 덩더꿍하고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추어 옛날에 본 무당의 한풀이 춤사위가 바로 내 눈앞에서 넘실거렸다.

    뒤 이어, 펄럭이는 무당의 옷자락이  자꾸만 새벽 갯바람을 맞으며 서있는  어느 한 많은 생선 장수 여인네 치마폭으로  어른 거렸고-- !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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