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마음으로 떠나는 지중해 여행

[서평] 방송작가 홍수정이 펴낸 <마음이 자라는 그곳, 지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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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국(yong5801)등록 2008.12.25 19:20
한 해의 문을 닫는 크리스마스다. 바야흐로 여행이 시작되는 계절이다. 그러나 당장은 외환사정이 여의치 않아 해외여행이 어려워 진 시절이니, 아쉽지만 마음과 발품을 팔아 야무지게 쓴 여행기를 읽는 것도 큰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해외여행을 꿈꾸지만 패키지 여행이나 배낭여행 등 주로 보름 정도의 여행을 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환율이 다락같이 오른 올 겨울의 상황은 꿈꾸기조차 어려워지고 말았다. 그래서 방송작가인 홍수경이 펴낸 <마음이 자라는 그곳, 지중해>(도서출판 책 만드는 집, 대표 김영재)라는 책이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느릿느릿 여유 있게 자그마치 100일 동안 지중해 연안국을 돌아 볼 수 있었다니 샐러리맨으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운 이야기다.

서른두 살의 허기를 아득하게나마 여행이라는 끈으로 이어보려 결심했고 100일이라는 시간을 잡고, 지도를 펼쳐놓고 무작정 눈에 들어오는 지중해 라인을 따라 밑줄 긋듯 대충 루트를 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잘 짜여진 패키지 여행, 혹은 철두철미한 계획적인 여행과는 사뭇 다른 자취와 냄새를 풍기는 여행기라서 발길이 가는 대로, 눈길이 머무는 대로 감정의 움직임을 따라 다음 목적지를 잡았기에 그녀의 여행에는 눈부신 자유로움이 있다.

방송작가인 그녀가 개편이 돌아오는 6개월마다 급격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100일의 공백을 갖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감성의 움직임과 게으른 듯싶을 정도의 여유가 있다. 여행 루트는 스페인의 세비야-코르도바-그라나다-바르셀로나로 이어지고 남부 프랑스에서는 님-아비뇽-니스를 지나간다. 그리고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를 지나가는 지중해 여행이다.

홍수정의 여행기는 풍경의 감상이나 에피소드의 나열에 그치는 다른 여행기와는 색다르다. 글은 분명 시간과 장소가 옮겨가는 대로 흐르고 있지만, 읽다 보면 어느새 그녀의 마음이 점점 부풀어 가는듯한 과정을 엿보게 된다. 서울에 두고 온 일과 가족, 친구들을 머리에서 놓지 못해 헤매던 여행 초반의 모습에서 진정한 채움을 위해서는 비움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여행지에서 순간순간 느끼는 그녀의 사유가 독자로 하여금 함께 마음의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이끌고 있음을 본다. 그 과정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처음 만난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스페인 청년과. 같은 숙소에 머물게 된 다국적 친구들, 기차 안에서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황혼의 여인, 말없이 눈물을 받아주던 이탈리아의 한 수녀님 등 많은 사건들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한다.

분위기 있는 밤 시간 품격있는 음악방송 작가가 되고 싶었던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김흥국 박미선의 대한민국 특급쑈>·<두 시 탈출 컬투 쑈> 같은 가벼운 프로그램에 투입된 그녀. 오랜 기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보듬어 왔기 때문일까. 그녀의 초점은 관광 명소보다는 일반 서민들의 사는 모습에 맞춰져 있다.

여행이 길어질 수록 어느 한 도시의 과거보다는 지금의 시간을 좇는 데 관심이 많아진 그녀는 콜로세움의 로마보다는 트라스테베레 근처의 로마가 마음에 들었고, 아크로폴리스의 아테네 보다는 플라카 지구 작은 골목의 아테네가 더욱 좋아진 것 같았다. 여행지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과의 추억을 가슴 벅차게 간직할 줄 알고 평범한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을 사랑할 줄 아는 그녀의 여행기는 따듯하다.

또한 각장의 끝에 나홀로 여행족들을 위한 실속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그것 또한 재미있다. 여행 중 한국이 그리울 때 간편하게 향수를 달랠 수 있는 음식 만드는 법과 여행하기 좋은 차림 및 빨래 노하우 등 각종 정보가 빛난다. 숙박시설에 대한 정보, 짧은 영어로 간단히 의사소통 하는 법, 저가 항공 등 각종 교통편과 여행 필수품들에 대한 조언이 알차게 들어 있어서 양념으로 읽을 만하다

그녀가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도 재미있다. 멋진 풍광보다는 늘 사진 속에 사람이 많이 들어가 있는 모습들에서 그녀의 다정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가수 박진영은 표사에서 20대에 만났던 그녀가 이 여행기를 통해 새롭게 다가왔다고 말했고, 가수 변진섭도 매일 밤 방송 스튜디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원고들의 뿌리들이 이 안에 숨어 있었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어느 유명한 시인이나 작가의 여행기도 아니고 전문 여행가의 기록물도 아니어서 홍수정의 여행기는 더 맛이 있다. 가수 MC몽이 "머언 여행길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이라며 미당의 표절로 웃겼던 말이 실감나는 여행기이다. 경제위기가 엄습한 2008년의 혹한기에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별난 글이 그 속상한 심사를 많이 풀어 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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