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랑은 어떻게 변한다.

[영화감상기] 허진호 감독의 <행복>

검토 완료

이대암(blurrytie)등록 2008.09.26 10:15
지난주만 해도 늦더위에 외출 후 집에 돌아오면 얕게 땀이 밴 옷을 벗어야 했는데 오늘, 확연히 바람이 서늘해졌다. 풀죽은 내 방의 창으로 불어드는 밤바람은 벌써 나를 이불 속으로 움츠러들게 만든다. 반팔, 반바지 복장의 나는 이제야 옷장을 열어 긴팔, 긴바지들의 안부를 확인한다. 조금의 쾨쾨함을 감수하며 긴팔로 갈아입고 창문을 반 이상 닫는다. 이제 좀 괜찮으려나. 아, 그런데 왜일까. 밤이 깊어질수록 바람은 더욱 서늘하게만 느껴진다. 정신의 뺨을 꼬집으며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서늘해진 바람이 내 마음 속으로 치고 들어 뱅글뱅글 맴도는 것 같다. 안되겠다. 마음, 너무 서늘하다. 마음을 안아주려 허진호 감독의 영화 <행복>을 다시금 꺼내 본다.
역시나, 영수(황정민)는, 나빴다, 못됐다, 지독히 이기적이었다. 영수는 은희씨를 배신한다. 배.신. 이 두 음절 속에 담긴 그 잔인한 칼날. 배신에는 엄연히 가해자-피해자의 구조가 설정되어지게 마련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각기 아픔의 색상이 다를지언정, 즉 가해자 또한 마음의 상처를 입을지언정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아픔의 깊이 차는 감히 비교할 수가 없다. 칼로 베는 사람의 고뇌와 칼에 베이는 사람의 고통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이미 ‘배신’만으로 피해자 측은 비틀거리게 된다. 그런데, 은희(임수정)씨는 어떠한 사람인가? 폐병과 8년이라는 긴 시간을 싸워오며 늘 죽음을 목전 가까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 누군가의 보살핌이 정서적일뿐만이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필히,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사람, 그러한 자신에게 오래도록 안정적인 환경을 보장해주던 ‘희망의 집’을 영수와 함께 꾸려갈 희망을 좇아 박차고 나온 사람, 이렇게 말해버리면 은희씨에게 미안하지만, 약한 사람. 그러하기에, 은희씨가 그러한 사람이기에 영수의 배신은 더욱 아프고 아리게 다가온다. 싸한 아릿함. 은희씨의 비틀거림의 진폭이 걱정되어 내가 먼저 쉬이 좌절해버릴 것만 같다.
또한 아픔의 수용과 치유를 더욱 어렵게 하는 건 배신의 과정에 있다. 영수는 배신의 과정 속에서 비열하고 소심하고 파렴치한 모습을 보인다. 본인의 마음속에선 이미 은희씨에 대한 감정이 정리되었음에도, 아니 적어도 은희씨와의 관계에 대해 결심을 굳혔음에도 불구하고 영수는 은희씨 앞에서 그저 전전긍긍하기만 한다. 그러한 서늘한 고백의 용기를, 과중한 부담을, 목젖의 찢어짐을, 터질 듯 한 눈물을, 그러한 잔인한 책임을 은희씨에게 떠넘기려고만 한다. 그저 슬슬 눈치만 보며, 그저 쌀쌀 눈치만 주며. 결국 헤어지자는 말을 입 밖으로 먼저 꺼낸 사람은 은희씨가 되고 만다. 오, 할렐루야! 이런 기적이! 이로써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이 뒤바뀌었다(물론 얼핏 외관상만으로의 뒤바뀜이지만.)! 영수는 아마도 그런 생각으로 자위했을 것이다. 물론 영수도 마음 아팠겠지, 잠 못 이루고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렸겠지. 허나 그는 은희씨의 상처, 아픔, 눈물을 생각하기에 앞서 본인이 상처를 덜 받기만을 일순위로 바란 것이다. 본인이 상처를 덜 받음으로써 은희씨는 상처를 그만큼, 아니 그 이상 더 받을 것임에도... 이렇게 그의 배신은 고차원의 배신으로 승격되고야 만다.
아, 그러나, 그러나 어찌하랴. 과연 어찌할 수 있을까. 낭만적 사랑이란 것의 불완전한 속성을, 인간이란 존재의 불완전한 속성을, 한껏 꿈을 꿀 수는 있으되 늘 꿈과 현실 간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괴리를, 우리의 사랑이 한껏 빛나고 영원하리라 믿는 ‘꿈’과 사랑이 시간을 타고 시들시들 변해만가는 엄연한 ‘현실’의 차이를.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영화 ‘봄날은 간다’ 중)라고 간절히 외칠 수는 있지만, 사랑은 어떻게 변한다. ‘꿈’의 눈으로 영수를 볼 때엔 속 시원하게 비판하고 비난하기는 쉽지만, ‘현실’의 눈으로 영수를 볼 때엔, 과연 어떠할까. 앞서서 난 꿈의 눈을 통해서는 영수를 마구 비난했지만, 현실의 눈을 통해서는 그를 마음 놓고 욕하고 때릴 용기가 차마 솟질 않는다. 현실의 사랑에 있어서는 나 또한 그와 같이 배신하고, 믿음을 짓밟고, 지독히 이기적이고, 충분히 비열해질 수 있음을, 그러한 가능성을 가득 품고 있다는 ‘현실’을 감히 부정할 수 없기에. 현실의 사랑에서는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으므로. 인정하긴 싫더라도. 남을 향해 손가락질을 할 때에 결국 세 손가락은 나를 가리키고 있듯, 영수를 향한 손가락질은 결국 나 자신, 우리 자신에게 닿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러한 맥락에서 난 은희씨를 떠나간 영수가 영화에서처럼 현실에서 흔들리고 무너져내리기보다는 그의 클럽 사업을 통해 노후 자금 4억7천만 원을 문제없이 모아가고 그의 ‘애인’과 고도 자본주의화, 도시화된 풍족하고 사치스런 일상을 착실히 꾸려가며 가끔씩, 아주 가끔씩만 은희씨를 떠올리고 걱정하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영수의 모습을 그려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그러한 영수의 모습이 우리의 현실을 더욱 차갑게 꿰뚫을 수 있지 않을는지, 관객의 가슴을 더욱 서늘하게 관통하지 않을는지......
그나저나 영수가 떠나간 후 은희씨는 어떻게 살아갔을까, 하루 이틀 한 시간 두 시간을 어떻게 꾸려나갔을까. 영화에서는 그러한 은희씨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영수가 은희씨를 떠나간 후 영화는 줄곧 떠난 영수의 삶만을 조명한다. 은희씨의 일상에 대한 궁금증이 너무 커 가슴이 먹먹했었다. 그런데 불현 듯 영화 초반부에 은희씨가 영수에게 건네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같이 살래요? 나중에야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럼 그때 헤어지죠, 뭐.” 그러한 담담함. 현실에 대한 용기를 수줍게 허나 당차게 담아둔 그런 담담함. 바람 한 줄기에도 쉽게 흩어져버릴 사랑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자, 그럼에도 그 사랑을 붙잡으려는 자. 조제(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중)는 알지만 피하지 않았다. 혹시 은희씨도 조체처럼, 알지만 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영수가 떠난 후의 은희씨에게, 츠네오가 떠난 후 홀로 담담하게 전동 휠체어를 타고 거리를 나아가던 조제의 뒷모습을, 살기위해 홀로 담담하게 반찬을 만들어가던 조제의 뒷모습을 그려보는 건, 그저 나의 낭만적인 기대일까. 
지금껏 은희씨에겐 ‘씨’라는 존칭을 붙이고 영수에겐 ‘씨’라는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 은희씨에게 보내는 ‘씨’에 존중과 위로를 담고 싶었다, 존중과 위로와 응원을. 은희씨, 부디...... 아, 고백하자면 실은 영수에게도 줄곧 ‘씨’자를 붙여왔다, 그럴지도 모른다, 다만 생략했을 뿐. 다만 영수에게 붙였던 ‘씨’는 은희씨에게 보낸 ‘씨’와 다르다. 영수의 ‘씨’는 못마땅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내뱉는 말, 씨. 나에게도 내가 ‘씨’자를 붙여준다면, 과연 어떤 ‘씨’를 선택하게 되려나. 나 또한 영수처럼 현실 속에서 현실은 어쩔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나 스스로에게 영수의 ‘씨’자를 붙여가는 삶을 살아가려나, 그런 삶을 만들어가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어떠할까,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당신은 당신에게, 당신의 사랑에, 당신의 삶에 어떠한 ‘씨’를 붙여줄 수 있나요? 묻고싶다, 내 가슴이 먹먹해오는 그만큼.

덧붙이는 글 <행복>(2007), 감독:허진호, 주연:임수정/황정민, 제작:영화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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