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다며 책들을 '내어다 버리며'

이사가 남긴 상처들을 쓰다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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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석(pleamore)등록 2008.08.03 12:03

쓸모없다며 책들을 '내어다 버리며'

이사가 남긴 상처들을 쓰다듬다

 

이사는 처음부터 그리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옮겨 살아야 이유가 분명하다고 판단하기도 했지만, 내게 환경의 변화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천성적으로 제약을 싫어하는 내게 정든 곳을 떠나는데 어떤 제약도 있을 수 없다는 걸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다. 거주이전의 자유. 그건 내게도 확실히 보장돼 있었다. 떠나는 건 떠나는 것일 뿐..... '떠나는 것'이 남긴 상처들은 쉬 가시지 않는다.


정든 보금자리를 벗어날 기회를 생각보다 빨리 잡았다. 세간을 내 몸과 마음보다 훨씬 늦게 옮기어 가는 과정에서 그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주섬주섬 모아 생각해 볼 기회도 잡았다.


내 몸과 함께 움직이지 못해 망설이던 나의 사랑하는 개, 나와 7년여를 한 집에서 살아온 '보리'는 오늘 기어이 개 20여 마리를 치시는 형님 댁으로 보냈다. 보리는 기를 쓰고 그곳에 남지 않으려 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을 보며 그를 다시 데려갈까,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내게 그를 맡겨두는 일밖에는 다른 수라고는 없었다. 그래 나는 그에게 정말로 미안해하며 그를 떠나왔다. 수년 동안 난 개를 방치하였을 뿐, 그에게 사랑을 보내지 못하였다. 그를 남겨두고 오는 길. 그에게 푸대접, 무 대접하였던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본다. 말 못하는 그를 우습게 여겨온 나의 '부끄러운' 시간들을 돌아다본다.

그가 생명이거나 무기물이거나 나는 이즈음 내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내가 성실히 대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깊이 후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나를 보고 꼬리를 흔드는 걸 보고도 나는 그를 못 본 체 하며 돌아선 날들이 몇 날이었던가. 작년 여름엔 그의 집 주변 잡초를 뽑아주지 못하여 그에게 진드기들이 까맣게 붙어 있었다. 난 그걸 알면서도 '나의 하루들'을 가려고 그의 애절한 눈빛을 피하여 대문을 나서고 또 나섰다. 그의 몸에 까맣게 붙은 진드기는 내 사랑하는 사람의 성화에 못이겨 작업에 들어갔고 화장실에서 두 사람이 꼬박 세 시간 여 그의 몸에 붙은 진드기를 떼어내면서 그의 가려움과 애처로움은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가 사람이었다 해서 내가 더 잘 대해 주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익숙한 삶의 자리에서 내가 '잃어버린 날들'이라 생각한 시간들이 한두 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버려진 날들 동안 나는 '나의 일' '나의 가치 실현'이라는 구호들에 묻혀 살았다. 내 우매한 소견과 시야에 묻혀 내 주변에 있는 소중한 존재들의 아름다움과 그것들이 자신의 존재와 그 의미를 이어가는 데 내가 쏟아야 할 에너지와 정성들을 전혀 보태어 주지 못하였다.

그를 남의 집에 맡겨 놓은 지금. 보리에게서 자꾸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 그에게 그런 환경밖에는 마련해 줄 수 없는가, 묻고 또 물어본다. 나는 바보이다. 우리 집 어떤 사람 이야기처럼.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 뭐 하나 미안하지 않게 하면 되지." 그렇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니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아니다. 지금 이라도 그렇게 하면 되는데 그걸 못하는 것이다.


이사를 한다며, 나는 수년 동안 내가 빌어 썼던 사무용 탁자며 책장들을 고물상을 불러 버리면서도 나는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한다. 그간 애지중지 하지도 못했던 점. 그들을 처분하면서 깊이 고민하지 못하였던 점. 아무렇게나 발로 차고 부수었던 기억들에 대해서도. 하지만 이런 마음도 역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일 뿐. 현명한 선택은 아니다. 변명이다.


이사가 남긴 상처들 가운데 더 깊은 것은 역시 고물상에 자루에 담겨 실려 간 내 사랑하는 책들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모았던 책들..... 대학시절엔 사둔 것들로 지나친 나의 욕망들까지도 서리어 있는 책들을 나는 쌀자루에 담아 보냈다. 사 오백 킬로가 안 되면 기름 값에도 미치지 않아 고물상은 나오지 않는다 하였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기는 책들부터 주섬주섬 자루에 담았다. 400kg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수필집들이 자루 맨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세로글로 쓰인 세계문학전집류들이 그 뒤를 이었다.

1970년대 햇빛을 본 문고본들도 무심결에 내 손이 닿자 자루에 쏟아져 내렸다. '부생육기', '정당론' 서문문고에서 나온 '이상전집', 삼중당 문고본들도 기억에 새롭다. 작은 책이라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인가. 오래된 거라 그렇단 말인가. 책을 버린 지 하루도 더 지나서야 다시 묻는다.

심심풀이로, 어떤 건 지적욕구 겸해서, 어떤 건 허위의식으로 닥치는 대로 쌓아두었던 녀석들이다. 점심값을 아껴 샀던 고영복 선생님의 사회학개론도 자루에 들어갔다. 그들이 21 세기 말, 말끔한 하드커버, 산뜻한 디자인에 크고 정갈한 글씨체를 하고 쏟아져 나오는 2008년에 나온 책들에 그 가치가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한 게 과연 정당한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들 안에 들어있는 번역 솜씨가 지금보다 떨어진다 하자. 그 안에 일본책을 다시 번역한 흔적들이 분명하다 치자.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다시 이사를 한다면, 난 더 깊이 생각하려 한다. 이렇게 많은 상처들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다. 책을 산다면, 난 그와 더 오래 씨름하려 한다. 그에 대한 예의와 의식을 치른 뒤에야 난 그와 작별하려 한다. 한 마리 개를 내 옆에 두고자 한다면, 나는 더 많이 고민하며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려 한다. 내가 고른 옷들과 가구들도 예외일 수는 없다. 나의 무지와 선입견, 나의 끝없는 욕망과 허위의식 때문에 내 옆에 있는 존재들이 상처 입는 일이 최소한으로 그치도록 스스로를 살피려 한다.

만일 그들이 나와 같은 '사람들'이나 조직이라면, 나는 정말로 깊이깊이 스스로를 파악하고 난 뒤에 그들과 함께 하여야 할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보다, 내가 하는 일보다 더 급한 건 내가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아니 가꾸어 오지 못한 '따뜻한' '성실한' 인간성을 가꾸어가는 일이라며 이사로 해서 생긴 상처들을 어루만진다. 오랫동안 스스로를 알지도,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2008.08.03 12:10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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