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2건의 10대에 의한 대형 성폭력 사건을 경험했다. 2004년 중고생 44명이 여중생 1명을 장기간 집단 성폭행한 밀양사건과 지난 4월 알려진 대구 초등생 집단 성폭력 사건이다. 4년 사이에 가해 청소년의 나이가 중고생에서 초등생으로 낮아졌고, 동성 간 성폭력이 수면 위로 드러났으며, 성인 못지않은 가해행위가 발생했다. 지난 14일, 16일 연달아 10대 성범죄자 대책 마련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밀양사건 이후 숱한 방안이 쏟아지고도 초등생이 성인보다 더 대담한 성범죄를 저지르게 된 배경을 밝히고, 근본적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댔다. 우리보다 앞서 청소년 성범죄자 대책 마련에 나선 미국의 사례도 공유했다.
▲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와 전교조, 대구사건대책위는 지난 14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10대 집단 성폭력 특성과 대책’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 여성신문
지난 4월 대구 초등생 집단 성폭력 사건이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던 열 살 초등학교 3학년 남학생이 동성 친구를 성폭행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성인 못지않은 범행 내용을 알고선 아연실색했다. 사람들은 성폭력을 미리 예방하지 못한 무능한 학교와 정부에 비난을 쏟아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초등생은 성적으로 무지할 것이라는 착각이 사건을 키웠다”고 말한다.
10대 여성의 성폭력 피해와 임신·출산·낙태 문제가 사회 현안으로 떠오른 것은 오래된 일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10대를 무성적 존재로 바라보고 있으며, ‘다 알려주면 위험하다’며 소극적 성교육을 고집하고 있다.
10 대의 성을 감추는 데 급급하다 보니 보호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질리 만무하다. 피해를 입어도 해결할 ‘통로’를 쉬이 알지 못하고, 피해가 드러나도 나서서 해결해주는 ‘어른’이 없다. 오히려 ‘밤늦게 돌아다니니까 당한 것 아니냐, 다른 아이들도 있었는데 왜 너만 당했느냐, 너도 즐긴 것 아니냐’는 왜곡된 시선을 감수해야 할 뿐이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미디어 매체의 발달로 자신을 성적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연령은 초등생으로 낮아졌는데 우리 사회의 성 인식은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다”며 “상황이 이만큼 모순적이라면 놀이와 폭력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권리와 책임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며, 성인의 행동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 아니었겠느냐”고 지적했다.
동성끼리 하면 성폭력 아니다?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어린 나이에 당연히 드는 성적 호기심에 의한 우연한 사고’라는 안이한 인식도 문제다.
조 윤숙 대구 학교폭력·성폭력 대책위 공동대표(대구여성의전화 대표)가 지난 14일 열린 ‘10대 집단 성폭력 특성과 대책 논의를 위한 토론회’에서 밝힌 자료에 따르면, 대구지역 A초등학교 3~6학년 남학생들은 같은 학교 1~6학년 남학생들을 항문 성폭행했으며, 자기가 당한 그대로 다른 친구에게 하도록 강요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구타를 하고 왕따를 시켰다.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일 인물이었던 이유다.
하지만 대구 남부교육청은 당시 “동성끼리였으므로 성폭력이 아니며, 자기들끼리 좋아서 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결 국 사건은 묻혔고, 가해 대상은 여학생으로 바뀌었다. 같은 반 여학생을 칼로 위협해 성폭행하고 사진을 찍어 ‘신고하면 인터넷에 공개한다’고 협박했는가 하면, 수업시간 중 화장실로 불러내 교대로 망을 보며 성폭행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러나 가해자로 지목된 초등생들은 모두 무죄 판정을 받았고, 현재 피해자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있다. 피해 여학생 중 단 한 명만이 경찰에 신고했는데, 범행 일시가 진술 때마다 달라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피해 여학생은 1년여 동안 성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날짜와 장소를 일일이 기억할 수 없다는 변론이 있었지만 거부당했다. 피해자도 있고 가해자도 있는데 처벌받은 사람은 없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밀양사건 당시 가해 중고생 44명 중에서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피의자들이 미성년으로서 충동적 집단심리에 의해 우발적으로 저지른 행위였다”는 것이다.
이 임해경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소장은 “10대 성폭력 가해행위에 대해 ‘나쁜 일인지 모르고, 어려서, 호기심에, 큰 의도가 없었다’는 어른들의 시각이 10대 가해자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하는 계기를 준다”며 “성적 호기심을 갖는 것과 이를 다른 사람에게 실천하는 행위의 다름과 경계를 정확하게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성차별적 지역사회부터 바꾸자
10대 성폭력 사건을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곳은 학교다. 대구사건도 한 교사의 관심과 적극적 문제제기로 공론화될 수 있었다.
강 보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여성위원회 사무국장은 학교 성폭력 예방을 위한 방안으로 ▲성폭력 예방교육을 할 때 학급별 교육이 가능하도록 시간과 예산을 확보할 것(강사가 아예 강당 강의를 거부할 것) ▲가장 먼저 사건을 접하게 되는 학생부장의 성폭력 예방교육 연수를 의무화할 것 ▲교육대학에 성교육·성폭력 관련 수업을 의무화할 것 등을 제안했다.
지역사회에 ‘폭력근절을 위한 네트워크’ 만들기 운동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박 신연숙 서울여성의전화 나비센터 지역조직국장은 “학교와 사회를 움직일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은 학부모”라며 “동작구의 경우 학부모들이 3년째 학교 성폭력 예방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여성단체들의 최우선 과제는 학부모들이 학교 성폭력 모니터링이나 예방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하고, 발 딛고 선 지역의 단체들에 여성주의적 관점을 불어넣어 성차별적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 로버트 한서 루이지애나대 범죄학과 교수 ⓒ 여성신문 정대웅 기자
“미국은 18세가 되면 이전 범죄기록을 모두 삭제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성범죄 기록은 그대로 남겨두는 주가 늘고 있습니다. 성범죄 근절에 대한 의지가 그만큼 확고하다는 거죠.”
미국의 청소년 성범죄 전문가인 로버트 한서 루이지애나대 범죄학과 교수(법집행연구소 소장)는 지난 16일 전국성폭력상담소·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가 주최한 ‘아동·청소년 성폭력 관련 한·미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한서 교수는 “청소년이라도 성범죄는 엄한 처벌을 받는다”며 “실제로 청소년 성범죄자는 소년법정이 아닌 성인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경우가 많고, 이런 경우 대부분 징역형을 받는다”고 말했다.
미 국은 지난 1996년 성범죄자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도록 한 ‘매건법’을 제정했다. 1994년 당시 일곱 살이던 매건 칸카 어린이가 성범죄로 두 번이나 형을 살았던 이웃집 남성에게 유인돼 살해됐으나, 이웃 주민 누구도 그 남성이 어린이 성범죄 전력자임을 몰랐던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10대 성범죄자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은 18세 이하 청소년이라도 성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으면 성범죄자로 등록한 후 범죄경력과 주소, 사진 등의 정보를 온라인에 공개한다.
2001 년 조사결과 미국 성범죄자 가운데 20% 정도가 18세 미만의 청소년이었고, 강간 가해자는 절반에 달했다. 거칠게 표현하면, 성폭력 피해를 입은 10대의 절반이 또래 10대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청소년 성범죄자에 대해서는 ‘처벌’보다 ‘치료 후 사회복귀’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한서 교수에 따르면, 청소년 성범죄자의 치료와 사회복귀를 위해 총 3명이 움직인다. 지역사회 감독관은 청소년이 각종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돕고, 일주일 간격으로 위험 상태를 법원에 보고한다. 성범죄자 치료사는 일주일에 한번 청소년을 만나 상담치료를 한다. 거짓말탐지기 검사관은 검사를 통해 얻은 정보를 치료사와 감독관에게 전달한다.
실제로 텍사스 주에서는 ‘성행동에 문제를 가진 청소년들에 대한 치료와 평가 기준’ 등 청소년 성범죄자의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 여러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운용하고 있다.
한서 교수는 “성인과 달리 청소년은 치료를 통한 행동개선의 효과가 크다”며 예산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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