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믹'하고 '가련'한 '아날로그 포퓰리즘'

언제나 나를 웃고 울게 만드는 이문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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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원(jungs21)등록 2008.06.13 10:48

 이문열 씨 하면 무조건 거부감 보이시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문열 씨는 그냥 싫어라 하기엔 아까운 분이다. 내가 보기엔 참 재미있는 분 같다. 모두가 시끄럽게 떠들 때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다가, 그 화제가 시들해졌을 때쯤 느릿느릿, '뼈대있는' 양반집 후예답게 의젓하고 느긋하게 걸어오신다. 그리고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낸다. 사람들을 한순간 '뻥찌게' 한다. 하지만 본인은 진지하다. 그러니까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뭔가 심오한 말씀 같기도 하다. 시트콤에 나오는 어벙하고 엉뚱한 할아버지 같아 귀엽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잽싸고 날랜 모습으로 변한다. 이 사회의 중견 '지식인(다르게 보는 분도 많지만, 어쨌든)' 답게 교묘한 말솜씨와 세련된 논리를 뽐낸다. 정말로 도스토예프스키도 혀를 내두를 심오하고 복잡한 인간형을, 스스로를 원고지 삼아 펼치는 듯하다. 역시 최고의 베스트셀러 소설가답다. 이번에도 이문열 씨, 이 사회를 향해 '지식인'답고 '문학가'다운 말씀을 날려주셨다.

 

 이문열 씨는 언제나 자기 뜻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최고의 작가'고 '보수 지식인'이면 좀 당당해도 되련만, 그의 태도는 너무 겸손하다. 자기 생각을 다른 이의 뜻이나 '국민'의 뜻으로 에둘러 표현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그 틈새로 수줍게 본뜻을 내보이기도 한다. 11일 <초한지> 관련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한 말들도 이런 태도를 유지했다.

 

 '디지털 포퓰리즘'이니 '위대하고 끔찍한 승리'니 하는 앞의 이야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문열 씨는 히치콕 영화의 '맥거핀'처럼 앞에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진심이 아닌 이야기를 깔아두곤 하니까. 물론 자기 이야기부터 내세우는 걸 싫어하는 겸손함 때문이다. 그는 (진심이 아닐지라도)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손짓을 잊지 않는다. 물론 베스트셀러 작가고 '보수 지식인의 대표'인 자신에 비하자면, '광우병 문제를 빌미 삼아' '감정적인 문제'나 섞어대는 촛불 시위대는 실로 하찮은 우민들일 것이다. 거기다 명품 쇼핑밖에 모르는 여자들까지 나오다니! 야심작 <선택>을 쓴 뒤 뭣도 모르는 '여편네들'한테 수모를 당한 일이 떠올라 이문열 선생님, 정의의 분노가 솟구치셨으리라. 하지만 그는 사명이 있기에 참아야 한다. '정말 민심인지 의문이 드는' 촛불 시위를 '침묵하는 이들이 민의로 만들어버린' 상황에, 자신이라도 '광야에서 홀로 외치는 소리'가 되어 '침묵하는 이들'을 깨워야 된다는 사명이다(그런데 요즘 사람들, 옛날처럼 '새벽종이 울렸네' 고래고래 외쳐도 잘 안 깨어나는 게 문제다).

 

 어쨌거나 인터뷰 앞 부분은 가볍게 읽고 넘어가도 좋다. 이문열 씨가 속마음을 수줍게 드러내는 건 중간부터다. '지금 보이는 것이 정말 다수고 민심인지는 의문이 있지만...'으로 운을 뗀다. 음, 난 지금까지 촛불 시위가 '민심'과 '다수'를 명백히 대표하는 줄 알았는데, 한국 최고 '보수 지식인'께서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신다. 정말 그렇다면 큰일인데! 몇몇 '소수의 우민'이 정부를 무너뜨리는 사태가 벌어지면 큰일 아닌가(그런데 이거 몇십년 전부터 있던 일 아닌가? 군복에 별을 단 '소수'의 '어리석은 작자들'이, 한강을 넘어 '몇 놈' 죽이고...에이,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그만두자)?

 

 그렇다면 이문열 씨는 왜 이제서야 이런 중대한 '의문'을 제기하신 걸까? 만약 우리가 착각하는 거라면 '지식인'이 일어나서 진실을 선포해야지, 대통령이 콘테이너 박스 안에 유폐당할 때까지 왜 침묵했던 걸까? 이문열 씨가 움직이지 못한 이유는 이 다음에 나온다. 

 

 '그럼에도 나서지 못한 것은 침묵하는 이들이 그것을 민의로 만들고 있기 때문...'

 

 아, 이런 가슴 아픈 사정이 있었다. 촛불 집회에 나오는 '의심스런' 자들이야 '고작' 몇십만, 우리 인구의 '극히 일부분'이다. 이명박 대통령께서도 이 사실을 아니까 '고작' 몇십만 따위한테 굽힐 수 없는 것이다. 분명 정부 정책을 믿을('한낱' 외국 의사나 전문가들의 의견 따위는 단호히 물리칠!) 나머지 수천만 국민들이 있을 텐데, 그들이 죄다 '침묵'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이문열 씨의 고뇌는 이명박 대통령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문열 씨도 정부에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정말 고약한 것은 촛불시위에 대한 어떤 미심쩍음과 의심이 있더라도 그걸 다 덮을 만한 정권의 실수가 있다는 것”

 

 이문열 씨는 이명박 대통령의 잘못된 대응에도 안타까움을 표시한다('의심스런' 자들의 '불평'이 아니라, 나라를 생각하는 충심어린 '충고'다). 분명히 '민의'와 같을 리 없는 '의심스런' 시위일 뿐인데도 자기와 '지식인'들은 나설 수 없다. 경찰들도 단호하게 시위대를 때려잡지 못하고 미기적거리기만 한다. 정권이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잘못'이 아니라 '실수'다. 어쨌거나 '실수'도 잘한 건 아니니, '지식인'으로서 야단치지 않을 수 없다. '국부' 이승만도 '영웅' 박정희도 이런 아마츄어 같은 '실수', 외교 본질과 상관없는 '약간의 실수'같은 건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한편으론 이 인터뷰에서 이문열 씨의 신묘한 '테크닉'을 음미할 수 있다. 양쪽 어디에서도 비판을 받지 않을 교묘하고 애매한 문장,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꼭 나쁜 건 아닌...'으로 무한히 정리할 수 있는 문장이다. 평민들은 감히 따라할 수도 없는 중견 문학가의 필력은 놀랍기만 하다. 이문열 씨는 이후 자신의 <초한지>를 광고할 때도 또다시 신묘한 '테크닉'을 펼친다.

 

 “백성에게는 먹는 것이 하늘이고 제왕에게는 백성이 하늘이므로, 유방이 식량과 농토에 집착한 것은 곧 하늘의 하늘을 지키려 했던 것”

 

 '먹는 것이 하늘', 이명박 대통령의 '경제만 살리면 장땡'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지금 '쇠고기'를 중심으로 분노를 모으는 촛불 시위대를 옹호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행여나 '박쥐'나 '소피스트의 궤변'같은 걸 떠올린다면 큰 오해다. 우리가 감히 '지식인'이자 보수 사회 '선생님'의 깊은 뜻을 함부로 풀이하면 안 된다. 이문열 씨는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면이 있었을 것이다. '정의'와 '악'따위 시시한 구분은 뛰어넘는 지성은 나이가 들면서, '좌익이 날뛰는' 한국의 어두운 현실을 보면서, 여성이 '덕스러운 어머니'를 침범하는 '말세'를 보면서, 더욱 큰 지혜로 꽃핀 것이다. 그 결실이 <선택>이고, 조선일보에 간간히 실어왔던 주옥같은 논설들이며, 이번의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논리나 분명한 주장, 편 가르기 따윈 초월한 심오한 사상이다. 역시나 오묘한 도덕 용어로 이문열 씨를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비겁자.

 

 마지막으로, <초한지>, 역사책 아니다. <삼국지>도 그렇고 모두 대중 오락 소설이었고, 지금도 오락 소설일 뿐이다. '고전'이라고 해서 곧 인문서가 되는 건 아니다. 조조를 좋아하든 유비를 좋아하든, 항우를 좋아하든 유방을 좋아하든 취향대로 해도 된다. 게임이나 만화로 즐기는 청년들은 이 자세를 유지하므로 순수하고 유쾌하다. 문제는 '취미'를 뭔가 깊은 '신념'이나 사상인 양 내세우면서, 과거의 오락 소설을 '인간 경영'이니 '정치 철학'으로 내세우는(우리 나라 나이드신 정치가 분들, <도쿠가와 이에야스>니 <대망>타령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분들이다. 쓸데없이 어깨에 힘이 들어간 사람도 세상을 피곤하게 한다. 이문열 씨도 <초한지>나 <삼국지>따위에 매달리는 건 잘못이다. 그의 심오한 사상은 순수 문학이나 진지한 글에서 더 빛을 발할 것이다. 아직 써보신 적은 없겠지만. 정말 '순수'한 문학과 정말 '진지한' 글은 말이다.

 

 그리고 이제 나이도 지긋해지셨으니 인생의 진정한 '행복'도 고민해보셔야 될 때다. 건강에도 관심 많이 생기셨으리라. 건강하려면 유쾌해지는 것, 많이 웃는 게 최고다. 심오한 사상에만 매달리시는 것도 건강에 안 좋다. 가끔은 가벼워지고 명랑해지시라. 촛불 든  '미심쩍고' '의심스런' 무리들에게서도 뭔가 배울 수 있다. 그들은 이문열 씨를 악몽에 시달리게 했던 '좌익' 시위대와는 다르다. '쪽수'가 많은데도 노래 부르고 춤추고 웃기만 한다. 너무나 가볍고 명랑하다. '디지털 포퓰리즘'이란 말, 그들이 들으면 황송해할 것이다. 그들에겐 너무 거창한 말이다. 이런 영광의 호칭은 이문열 씨 본인이 간직하시는 게 더 낫다. 사실 이문열 씨에게 딱 어울리는 호칭이다. '디지털'을 '아날로그'로만 바꾸면 말이다. 촛불 시위대에게선 그저 명랑함과 평화, 그리고 '상식'만 배워 가시라.

2008.06.13 10:15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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