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견 시비로 아들을 총살한 아버지

제자식 목숨이 개만도 못해서야

검토 완료

김상순(quaynews)등록 2008.04.25 12:55

                       애견 시비로 아들을 총살한 아버지

 

 

 지구상에 인간이 너무 다양한 탓일까. 아니면 각박해진 세상살이로 정신적 장애가 생긴 때문일까. 세상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충격적인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독일에선 남매가 부부를 이루어 결혼상태를 유지하다 법정에 섰다. 호주 남쪽 아들레이드에선 아버지와 딸이 혼인관계를 유지하며 딸까지 낳아 기르고 있다. 딸은 외손녀이자 자매이기도 하다. 이 부녀 부부를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어쩌다가 그런 근친상간의 불행한 늪에 빠졌으면 수치심에 행여 남이 알까 숨길 일이지 TV 인기프로에 아이까지 안고나와 온 천하에 공개하느냐다. 생활이 궁색해서 돈이 목적이었다해도 정신적 장애가 아니고는 설명이 안된다. 그들도 인간이라서 자책감에 많이 시달렸을텐데.

이런 근친상간은 대단한 충격이지만 고대 이집트 파라오를 비롯한 몇몇 왕족의 순수 혈통 보존을 위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기에 일시적인 험담 정도로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사건은 아무리 상상을 동원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호주에서 자기집 개가 세살짜리 아들을 공격해 죽음 일보 직전에서 생명을 건진 사건이 신문에 났다. 하늘이 도와 살았지 한번만 더 공격했으면 생명이 위태로웠다는 것이 전문가 의견이다. 송아지만한 세파드가 공격해 16바늘이나 꼬멘  눈두덩이 상처는 보기에도 아찔했다. 상처는  완치 후에도 흉터가 남아 인상마저 바꾸기에 충분했다. 엄마가 빨래를 널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런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인간을 공격해  살상한 개는 법으로  사살된다. 동물보호소 직원이 공격한 개를 데리러 집을 방문했으나 애기 엄마가 한사코 내줄 수 없다며 반대했다.

“폴라(개의 애칭)는 나의 가족이다. 먹이를 먹는데 아들이 귀를 잡아당겨 화가 나서 문 것이다. 잘못은 내 아들에게 있다. 이제 서로 매우 친해져서 그런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가족인 폴라를 죽도록 내줄 수 없는 일 아니냐.”

애기 엄마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동일한 보호자였다. 직원은 피해자로서의 의견을 존중해 개 사살을 고집하진 않았다.

상처 아래 아기 눈동자가 너무 천진스런 윤기를 띠었다. 개와 맺은 각별한 애정이 자식 생명 이상이란 말인가. 철모르는 아들의 상처를 보면 아찔함에 두 번다시 보기 겁나는 것이 정상적인 모정일 것이다. 앞으로 아들 안전에 확신 찬 모습이었지만 겨우 세살바기가 한눈 파는 사이 언제 다시 먹는 개의 귀를 잡아당기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정상적인 엄마라면 몸서리치는 아찔함에 자청해 사살을 요구했어야 했다. 

같은 또래와 장난치다  가벼운 상처로 피를 흘렸다면 이 엄마는 철 모르는 상대 아기에게도 이처럼 관대했을까. 만약  남편이나 친지가 애를 보다 한눈 파는 사이 이런 사고를 당했다면?  문책은 물론 엄청난 소동을 피웠을 것이다.

이런 비뚤어진 애견에 대한 애정은 동물보호 한면으로 얼마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 사건은 부모와 자식을 맺어주는 연결고리가 아무리 약해진 현대사회지만 너무 잔인하고 혹독하다는 생각이 든다.

“애견 때문에 다투다가 아들을 총살한 아버지” 텔리그랖 4월 16일자 기사 제목이다. 기사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  어제 최고법원에선 맬레이라 부르는 애견을 놓고 언쟁 끝에 아버지가 아들을 총살한 살인 사건의 심리가 있었다. 아버지 호와드는 23살의 아들 딕비를 사살하기 전 아들과 애견 문제로 말다툼이 있었다. 부자가 집 근처  주유소에 들렀는데 이때 아들은 자기 애견을 사무실 문 밖에 앉혀 놓았다.  CCTV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사건의 발단은 아버지가 주유 대금 지불 후 사무실 문을 나오면서 애견을 원래 아들이 앉혔던  자리에서 한쪽으로 옮기면서 시작됐다. 이 애견의 무단 옮김 때문에 부자간에 말다툼이 일어나 점점 격해지고 아버지가 칼을 휘둘러 아들 목에 대고 위협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펀치볼에서 도로를 사이로 마주보고  사는 부자는 휴전 후 일단 귀가했다. 그러나 밤 늦게 아들은 아버지 집을 찾아갔고 다시 언쟁이 격해지더니 급기야 화난 아버지가 아들을 집안 차도에서 사살하고 만다. 검찰에 의하면 먼저 가슴을 맞고 땅에 누워 있는 상태의 아들을 아버지는 다음 탄환을 머리를 향해 쏘았다는 것이다.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사망자의 할머니요 범인의 어머니였다.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범인은 아들 시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기까지 했다”

개 죽음보다 못한 23살의 짧은 인생이 허무하게 끝난 것이다. 인간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자식보다 귀여운 존재가 세상에 그 무엇이 있을까. 아버지와 아들이 적군과 아군으로 대치했던 것도 아니다.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는 그런 급박한 상황도 아니다. 두 사람 중 어느 한 생명을 선택해야만 할 절박한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23살의 아들과 자기 생명을 맞바꾸어야 옳았다.

심리를 계속 들어보자.

“ 기소장에 의하면 아버지는 맥주 세병을 마신 후 발에 피가 묻은 체 아들 집으로 가서 방금 내가 딕비를 죽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가슴에 총을 맞고 땅에 누워 있는 아들 머리를 다시 쏘아 확인사살을 한 셈이다. 체포 후 경찰  진술에서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협박성 메세지를 여러 번 받았는데 그로 인한 생명 위험을 느껴 자위 수단으로 사냥총을 구입해 침대에 항상 대비해 두었다는 것이다.” 

부자 관계란 결코  끊어질 수 없는 혈연 관계다. 태어나면서 본능적으로 쏟아붓게 되는 사랑스런 분신인 아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힘은 대체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이 살인은 부지불식간의 순간적인 충동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애견을 놓고 농담 한마디로 웃으며 끝낼 사소한 일을 아버지는 악의에 찬 증오로 토끼 사냥하듯 쏘아 버린 것이다.  이 상황에서 그는 아들을 싸안고 천하가 뒤집히는 미움도 부정으로 달래야 했다. 설령 맞아 죽는 한이 있다해도 참아야 했다. 왕권 유지를 위해 아들을 뒤지에 가둬 죽인 역사적 배경을 가진 나지만 살벌한 충격을 한동안 떨쳐내기 어려웠다.  범인의 진술은 계속된다.

“ 아들이 접근하자 먼저 머리 위로 위협사격을 한방 쏘았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접근하며 위협했다. 그래서 눈을 감고 두번째 세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눈을 뜨고보니 아들이 죽어 땅에 누워 있더라.”  

 아들 생명을 한순간의 결정으로 끝낸 아버지의 진술이다. 확인 사살은 증오에 찬 악의에서 나온다. 제 자식 생명의 소중함은 몰라도 원수에게 분풀이하듯 망자 머리를 쏘는 확인사살은 인간 도리에 어긋남을 알았을까.  방아쇠를 당기면서 그래도 눈을 감은 걸 보면.

 인류 역사상 자기 자식을 살해한 아버지는 과연 몇이나 될까. 조물주가 흙을 구워 영혼을 불어넣을 때 자식 죽이는 증오를 넣지 않아서  극소수일 것이다.

 이 살인자는 수천년 자기 조상들이 지은 죄보다 더 무거운 아들 죽인 죄를 무슨 수단으로 갚을 것인가. 평생을 두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도 터럭만큼도 못 갚을 것이다. 

 호주에서 사형제도가 폐지된지 오래다. 아버지는감옥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죄의식으로 차라리 사형제도를 그리워 할지도 모른다.

 선고는 7월에 있을 예정이다.

 

2008.04.25 13:00 ⓒ 2008 OhmyNews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