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보의 선구자 이스라엘 "카차오" 로페스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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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현(altar)등록 2008.04.11 13:42
10년 전에 살사 라고 하면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2008년 이제는 살사가 특정한 장르의 춤과 음악이라는 것이 상식인 시대가 왔다. 한국에서는 다소 기형적으로 춤은 보급되었으나 음악에 대한 이해는 매우 낮은 편이다. 반면, 쿠바의 음악을 기반으로 여러 라틴 음악들이 섞이면서 살사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뉴욕과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음악과 춤은 필수불가결하게 함께 존재하고 발전해 왔다.

살사는 문화현상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소위 포괄적 용어(umbrella term)이다. 우산처럼 그 밑에 비슷한 것들을 모두 모아 놓고 하나의 이름을 부여하는 셈. 따라서 살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상업화된 팝발라드 살사 음악이나 춤이 아니라 살사라는 장르가 만들어지기 위해 기여했던 수많은 선구자들의 "음악"을 약간이라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맘보, 차차차, 손, 단손 등이 대표적인 이름들. 왜냐하면, 그 음악들이 여전히 살사 음악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로 한 곡의 중간에 맘보가 삽입되기도 하고 쿠바의 룸바가 삽입되기도 하고 쿠바나 푸에르토 리코의 전통 음악이 중간중간 들리기도 한다.

잠깐, 여기서 왜 '음악과 춤"이 아닌 "음악"이냐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춤을 만들고 그에 해당하는 음악을 만들라고 하는 편이 쉬울지, 만들어지는 음악 중 춤출만한 음악에 맞춰 춤을 만드는 게 쉬울지? 특히 라틴 음악에서는 음악가들은 부단히 춤을 추는 대중들을 고려하면서 음악을 만든다. 그리고 춤추기에 좋은 음악이면 바로 그 음악에 잘 어울리는 춤이 만들어지고 대중화되어 왔다. 이의 대표적인 예가 맘보이다.

맘보는 1930년대 후반에 쿠바 태생의 이스라엘 "카차오" 로페스(Israel "Cacaho" Lopez)와 그의 동생 오레스테스 "마초" 로페스(Orestes "Macho" Lopez)가 만들고 대중화시킨 음악이다. 두 사람은 단손(danzon, 쿠바의 우아하고 느린 춤곡)의 즉흥연주 부분을 변형하여 맘보를 만들었다.

"우리는 교대로 피아노를 치며 이것저것 시도해 봤어요,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냈지요. 우리가 시도한 리듬이 새로운 것이란 걸 알고는 있었어요. 처음 만들었던 당시에는 지금보다 아주 빠른 음악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춤추기에 지나치게 빠른 음악이었다는 거죠. 덕분에 우리는 6개월 동안 이 음악을 연주할 기회가 없었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음악의 속도를 좀 늦추고 춤을 출 수 있게 만들었지요" (마이애미 헤럴드, 1993)

1993년 앤디 가르시아(Andy Garcia)는 "카차오.. 세상에서 카차오의 리듬을 흉내낼 수 있는 이는 없다(Cachao ... Como Su Ritmo No Hay Dos)"라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만들면서 카차오를 쿠바 음악계에 영향을 끼친 주요 인물로 평가했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라틴 음악계의 큰 별 카차오가 3월 22일 마이애미의 병원에서 89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신장 관련 합병증으로 쓰러진 뒤 22일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코랄 게이블즈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카차오의 죽음에 대해 가르시아는 음악사에 있어 중요한 한 시기가 마감되었다고 평하면서 카차오가 물려준 음악의 유산을 언제 어디서든지 사람들과 공유하겠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2004년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한 카차오의 대표곡인 <아오라 씨! (Ahora Si!)>의 동영상을 감상해 보자.

http://www.youtube.com/watch?v=-Jzl6FHzPyk&eurl=

빠른 당김음이 있는 맘보는 다마소 페레스 프라도(Damaso Perez Prado)와 쿠바의 음악인들 및 재즈 음악인의 노력으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맘보가 살사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1950년대에는 카차오와 동료들이 재즈와 아프로 쿠반 음악을 접목한 떠들썩한 잼 세션인 "데스까르가(descarga, 스페인어로 방출, 해방이란 의미)"를 유행시키기 시작했다. 재즈 음악에서 각 연주자들이 기량을 뽐내는 즉흥연주 부분보다 좀 더 타악이 많이 강조된 분위기로 현대의 살사의 라이브 연주에서도 데스까르가 파트를 넣는 경우도 많다. 

카차오는 1962년 쿠바를 떠나 스페인으로 옮겼다가 곧 뉴욕에 정착해 팔라디움 나이트 클럽에서 연주활동을 벌였고, 미국에서 티토 푸엔테(Tito Puente), 티토 로드리게스(Tito Rodrigues), 마치토(Machito), 치코 오파릴(Chico O'Farrill), 에디 팔미에리(Eddie Palmieri ), 글로리아 에스테판(Gloria Estefan)등의 유명 음악인들과 작업을 했다.

카차오는 1918년 쿠바 아바나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는 부모님의 3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한때 카차오의 안에는 베이스 연주자가 35명이나 되기도 했다고 한다. 클래식 음악의 베이스를 공부하고 8세에 무성 영화에 배경음악을 연주하는 연주단에서 연주하고 십대에 아바나 교향악단에서 연주를 시작해 30년여 동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오스트리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러시아), 에이또르 빌라-로보스(Heitor Villa-Lobos, 브라질) 등을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카차오는 쿠바의 밴드와 교향악단을 위해 쿠바 음악인 "손(son)"에 기반한 수백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전 음악인입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에요. 명성에 대한 환상은 없었어요. 유명해지려고 꿈꿔본 적도 기대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단지 연주를 했을 뿐이고, 그 이후 일어난 일은 그냥 따라 생겨난 것 뿐입니다. (마이애미 헤럴드)"

카차오 사진: http://www.latimes.com/media/photo/2008-03/3710822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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