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깨드리는 장정일의 '단상' 모음집

[요즘 읽은 책]장정일의 〈생각〉

검토 완료

민병욱(minpower)등록 2008.02.18 18:17

생각 . ⓒ 행복한책읽기

연말부터 이어지는 어수선한 분위기. 마음이 어째 뒤숭숭하다. 영 책이 손에 안 잡힌다.

3주 전, 마산도서관에서 〈주은래 평전〉과 장정일의 〈생각〉(生覺: 살면서 깨닫다)을 빌렸다. 〈주은래 평전〉은 책 표지만 몇 번 만져보고 말았는데 〈생각〉은 분량이 적어 자투리 시간 틈틈이 읽었다. 아무튼, 하루면 족히 읽을 책이건만 20일 넘게 걸렸다.

〈생각〉은 부제처럼 장정일의 단상을 엮어 놓은 책이다. 짧으면 200자 원고지 1매, 길어도 5~6매 정도의 분량의 글이 주종을 이룬다. 그렇다고 얕잡아 봐서는 안 된다. 양이 반드시 질을 담보하는 건 아니니까. 제목처럼 정말 '생각을 깨는 글'이 많다. 더불어 간간이 나오는 축축(야한!)한 글과 시도 읽을거리라면 읽을거리겠다. 일전에 읽었던 장정일의 〈공부〉에서 본 몇몇 글의 실마리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 부분인 '나의 삼국지 이야기'를 읽고서는 〈삼국지〉에 대한 막연함과 두려움 따위를 '깰' 수 있었다. 당연지사, 장정일의 〈삼국지〉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건 모르겠는데, 5년 만에 〈삼국지〉를 탈고했다고 하니, 어찌 아니 읽어 볼 수 있단 말인가.

아무튼, 〈생각〉을 계기로 장정일에게 제대로 꽂힌 것 같다. 엊그제, 창동 학문당서점으로 달려가 장정일의 〈독서 일기 1~7〉를 주저 없이 사 버렸다는 말씀! 그이의 자유로운 책읽기(물어본 건 아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책읽기도 없지 않을 게다.),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생각과 주장이 참 마음에 든다.

하므로 이 책에 대해 더 덧댔는 건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마음에 드는 몇 대목 소개하는 걸로 마무리하련다.



'무임승차'(8쪽)
사회의 어떤 분야에든 무임승차는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컴맹이라는 사실에 안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동차 운전면허를 딸 생각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너도나도 컴퓨터를 하게 되고 자동차를 몰며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면, 나 하나쯤 그런 것들에 대해 무지하거나 소유하고 있지 않아도 쉽게 빌려 쓸 수 있다. 예컨대 긴요하게 전화가 필요한 급박한 상황에서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도움을 준다. 자동차의 경우도 그렇다. 무거운 오디오를 바꾸러 갈 때 택시를 부르기가 귀찮으면 친구에게 "야, 차 좀 가지고 나와" 하면 된다. 그것의 보급과 사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우리나라의 경우 핸드폰이나 자동자를 빌려쓰는 것보다 무임승차하기가 더 쉬운 것이 컴퓨터와 관련된 사항들이다. 배울 필요도 없고 소유할 필요도 없다.

안 보이는 곳을 쳐야 한다. 보이는 곳을 치는 글은 하수다. 급소란 대개 안 보이는 곳에 숨어 있는 법이다. 안 보이는 곳, 급소를 찾아내는 눈을 갖춘 사람이 유단자다. (24쪽)

아내의 평소 지론에 의하면 인생이란 즐기는 것이다. 책이나 공부는 어떤 권리를 얻기 위한 패스포드일지는 몰라도 결코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해변가의 모래밭에서 햇볕을 쬐거나 물장구치기, 산에 올라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는 거나 절 구경을 하는 것, 맛있는 음식이나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것, 비오는 날 아무것도 안 하고 게으르게 창 밖을 바라보는 것, 공원의 벤치에 누워 햇빛에 물든 나뭇잎의 변화무쌍한 푸름을 즐기는 것,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며 이야기하는 것, 분홍신을 구해 신고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갈 정도로 춤을 추는 것,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록 세 끼 식사를 걸러가며 사랑하는 사람과 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온종일 입맞추는 것 등등. (38쪽)

'말과 글'
아는 것은 많은데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은 된다. 예를 들어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사람은 방송에 나가서 주눅이 들 수도 있다. 말할 내용보다 자신의 사투리를 의식하게 되면 말을 못하게 된다. 그 뿐인가. 무대나 대중에 대한 공포증이 그 사람의 목을 죌 수도 있다. 그러나 아는 건 많은데 글을 못쓰는 사람은, 말이 안 되지만, 우리나라엔 참 많다. 대개의 글쓰기에는 마감 기간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고 얼마든지 자료를 참조할 수 있기 때문에, 글 못쓰는 학자는 용서할 수 없다. '말하기'와 달리 시간과 자료가 주어진 '글쓰기'의 경우란, 비유컨대 수능시험장에서 사전이나 인터넷을 사용해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은 운 좋은 수험생이나 같다. 내가 아는 선배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길 "우리나라에 삐리한 정치가와 교수가 많은 것은,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도구인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되어 여기 적어 둔다.(97~98쪽)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경남도민일보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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