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딸, 딸, 딸, 딸?” “딸, 딸, 딸, 딸,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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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옥(syo0116)등록 2007.12.07 15:42
서윤옥 기자는 충남대학교에 재학중입니다.

딸, 딸, 딸, 딸, 딸?

어릴 적, 나는 우리 가족에 대해 묻는 것이 싫었다. 내가 막내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막내가 아니었다면 언니든 동생이든 한 쪽만 말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막내이기 때문에 형제를 물으면 ‘언니 네 명 있어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번은 ‘언니가 있어요’라는 말만 했는데, ‘몇 명?’이라고 묻는 것이다. 역시나 그 질문을 피하지 못했다. 내가 ‘언니가 네 명 있어요’라고 하면 사람들은 같은 반응이다. “딸만 다섯??”.

 

딸만 다섯??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딸만?’이다. 왜 딸만 있으면 안 되는 건가? 왜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리 말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 -_- ’... 졸지에 우리 자매는 잘못 태어난 아이, 축복받지 못한 아이가 되어 죄인 취급을 받는다.
우리 집은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엄마에게 아들을 원한 사람은 없었다. 엄마가 아들을 원한 것이었을 게다. 내가 태어난 1987년 1월 16일, 엄마의 바램이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날이 되어 버렸다. 내가 태어난 날 엄마는 얼마나 실망했을까? 나는 ‘얼마나’라는 말을 사용한다. 엄마가 실망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날 TV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광경이 일어났을까? 딸이 태어난 것을 보고 우는 엄마, 밖으로 나가 담배만 뻑뻑 피우는 아빠.

 

1987년 1월 16일

엄마는 나를 낳으려다 돌아가실 뻔 하셨다고 한다. 우리 집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산부인과가 아닌 할아버지 방에서 태어났다. 마을의 산파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엄마의 분만을 도왔는데, 엄마의 태반이 다 나왔는데도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11살이던 큰언니의 말을 빌리자면, 방바닥에는 피가 범벅이었고 세숫대야에 피가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피가 멈추지 않자, 긴급히 119를 불렀고 엄마는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가셨다. 나는 엄마의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며칠을 보냈다고 한다. 아빠는 갓 태어난 나의 젖먹이를 위해 심청이 아버지가 되셨다. 나를 데리고 아기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산모를 찾아다니셨다. 이를 보면 우리 아빠는 TV에 나오는 담배를 뻑뻑 피는 아빠가 아니셨나 보다. 아, 우리 아빠는 담배를 피우지 못 하시는구나.

 

정말 죄인이 될 뻔한 것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나의 자격지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때 이 사실을 듣고 만약 내가 아들로 태어나서 나를 낳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면 그때는 죄인이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딸로 태어나서 엄마를 돌아가시게 했다면 마을 사람들이 수근됐을 거라는 생각도 함께 했다. 마을 사람들은 엄마가 불쌍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아찔함을 느낀다.
나는 엄마를 보면서 ‘아들을 원하시는 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엄마는 다섯 딸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셨다. 아들을 원했다는 생각도 추측이었을 뿐 엄마가 행동으로 드러낸 적은 없다. 엄마는 친구 또는 마을 사람들의 아들을 보고 부러워하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한탄하지도 않았다. 내가 아들로 태어났으면 하는 생각과 자격지심을 만들어낸 것은 주변 사람들과 TV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엄마는 아이를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딸, 딸, 딸, 딸, 딸!

 

초등학교 때까지는 나의 자격지심 때문에 아들로 태어났으면 했다. 아들로 태어났으면 엄마가 행복했을 것이고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크면서 사라졌다. 왜냐하면 내가 아들로 태어났으면 언니들의 구박으로 신데렐라보다 더 심한 생활을 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엄마의 사랑을 포기할 만큼 언니들의 구박이 무서웠다. 언니들은 막내를 빼앗길 때마다 울었다고 한다. 언니 넷 모두가 한 번씩 울었다고 보면 된다. 아마 막내를 빼앗긴 동생을 보고 언니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너도 별 수 없다’는. 막내를 빼앗긴 것에도 분노를 감추지 않은 언니들이 아들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언젠가 나를 땅에 묻으러 산으로 데려갔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언니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되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하하하.

신데렐라 보다 더 심한 시절을 보냈더라면 백마 탄 공주님이 나를 구해줬을까?

 

‘딸만?’이라는 말을 들어본 지가 오래되었다. 내가 싫어하는 티를 내서도 아니고 나를 신경 써서도 아니다. 이제는 딸이라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남아선호사상이 이제는 완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들을 낳기 위해 아이를 많이 낳는 일은 없다. 둘까지 낳아보고 아들이 아니면 그만이다. ‘α-girl’이라는 신조어가 이제는 어색하지 않다. 정계를 비롯한 많은 분야의 주요 직책에서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성차별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분야에 있어 남성과 여성이 동등해지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여성은 세상을 변화시킬 잠재력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사람들의 가치와 생각의 변화로 ‘딸보다 아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제는 사람들의 반응이 바뀌었다. ‘딸만’이라는 말은 쏙 사라졌고 ‘다섯?!’이라고 놀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다섯 명?!
놀랄 일이긴 하다. 내 또래 형제들은 외동, 많으면 3명이니 그러할 만하다. 나는 가족을 묻는 질문에 당당해졌다. 우린 다섯 명이나 된다고 떵떵거리며 자랑한다. 막내인 내가 이제 대학교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부모님 걱정을 던 셈이다. 아직 취업의 문이 남았으니 걱정은 여전하신 건가? 여하튼, 가족이 많은 우리 집이 참으로 좋다. 주변의 사람들도 재밌겠다며 부러워한다. 형제 많은 집은 이제 찾기 힘드니 말이다. 이제는 부의 상징을 나타내기 위해 셋째 아이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셋째야”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가 태어난 시기인 1980년대 가족계획은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출산억제 정책이면서 남아선호사상을 막기 위한 가족계획 광고 문구를 보면 우리 집은 참으로 정부의 말을 안 들은 것 같다. 지금은 출산 장려 정책을 펴고 있는 정부에게 드디어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악당을 물리치는 정의의 독수리 오자매.

‘악당아 물럿거라.’

우리 5자매는 무적의 정의의 용사!! ⓒ 네이버 포토앨범


나는 어렸을 때 몸이 약했다고 한다. 지금은 어디다 버려놔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악도 있고 너무 튼실한 팔뚝과 허벅지가 있지만, 어릴 때는 병에 너무 잘 걸렸다. 홍역 때문에 걷지도 못하고, 영양실조도 잘 걸리고. 소극적인 성격에 친구들의 괴롭힘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럴 때면 언니들이 나의 용사님이 되어주었다. 모든 악당을 물리치는 용사님에게서 나오는 후광이 언니들에게는 항상 있었다. 물론 지금도 언니들은 나의 용사님들이다. 그리고  나의 후원자.

 

집안의 어려움으로 언니들은 대학을 가지 못했다. 내 위에 있는 4명의 언니들 모두 상업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졸업하자마자 생산직에 취직했다. 언니들은 일찍이 사회에 나가 우리 집의 기둥이 되었다. 아무도 부모님께 불평 한번 한적 없었다. 꾸미고 놀러 다니고 싶을 때에 언니들은 돈을 벌어 꼬박 꼬박 월급을 붙여 왔다.

 

이제 언니들은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아르바이틀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준비해 가며 늦각이 대학생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러면서 언니들은 나를 항상 돌봐 준다. 언니들 역시 빠듯한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나를 먼저 챙긴다. 그래서 언니에게 미안하다. 나의 뒷바라지는 언니들이 다 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인문계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진학할 수 있었던 것도 언니들 덕분이었다. 학원비며 기숙사비며, 언니들은 나에게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만들어 줬다. 내가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 것,  돈 걱정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든든한 후원자인 언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니들이 참으로 고맙다.


'다섯'에 놀라는 사람이 많아져서 ‘딸만?’ 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만약 나에게 이러한 반응을 보인다면 한 방 크게 쳐줄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비행기로 세계 일주를 다섯 번이나 할 수 있어요!!"

 

 

서 윤옥 syo0116@hanmail.net

2007.12.06 16:5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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