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 아내는 수다쟁이 “유다르크”
부제: 학창시절 아내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남편인 저와 제 아내가 만난 건 80년대 학창시절 이었습니다. 같은 단과대의 선후배로 만나 소설 속에 나오는 운명 같은 사랑을 했었습니다.
“불의와 모순을 보고도 피가 끓어오르지 않는다면, 어찌 이 땅의 청년학생이라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시대와 상황의 요구 앞에 저와 아내는 온전히 순수하게 그 시절을 가슴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집회와 시위, 그리고 늦은 밤부터 새벽녘까지 이어지는 장시간의 회의와 치열했던 격론의 시간을 아무런(?) 주저함 없이 그저 당당하게 맞이하며 보냈던 청춘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학창시절에, 저는 고참 선배랍시고 후배들 앞에서 언제나 선배로서의 모범을 각성하기 위해 제 스스로에게 더욱 단호하고 엄격하려 하지 않았던가 생각해 봅니다.
선배로서 깊이 사색하고 고민하는 모습.
후배들을 따뜻이 품어 감싸는 자상한 모습.
투쟁 앞에 부끄럼과 두려움 없는 강인한 모습.
그런 모습들을 자신에게 강박으로 다그치며 그 시절을 보냈던 미숙했지만 값진 한 자락의 추억이 있습니다.
▲ 아내는 수다쟁이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마냥 웃음으로 행복을 감염시키는 아내 ⓒ 이성한
오래 전, 당시 저와 아내 사이에 있었던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이야기 한 토막이 아련하지만 생생하게, 희미하지만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어느 날 하루일과를 마치고 늦은 새벽에야 저는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한창 겨울이라 몹시 추웠습니다. 썰렁한 학생회실 스치로폼 바닥에 누워 얇은 이불로 몸을 덮고서 쪼그려 잠이 들다, 문득 아침에 깨어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 노오란 귤 한 봉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아무런 흔적도 기척도 없이 말입니다. 그 며칠 후엔 또 T셔츠 상의 한 벌이 종이 백에 얌전히 담겨 역시 머리맡에 놓여 있었습니다. 누군가 제가 곤히 잠든 새벽에 들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몰래 가져다 놓고서 새벽을 스치는 바람처럼, 안개처럼 사라져 갔던 모양입니다. 마치 이름 없는 산타처럼 소리 없이 은밀하게 말입니다.
“누가 이런 걸 갖다놓고 가는 걸까?”
“선배가 하도 찔찔해 보여서 후배 녀석들이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아무튼 저는 궁금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제법 생기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드디어 이름 없는 산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산타는 바로 저보다 2년 아래인 ‘유 아무개’(지금의 제 아내)여자 후배였던 것이었지요.
피곤에 지쳐 잠든 어느 날 새벽, 목이 말라 잠시 일어나 물 한 모금을 마시려는데, 또 머리맡에 편지와 공중전화 카드 한 장이 예쁘게 놓여있었습니다. 솔직하고 애잔한 마음으로 써 내려간 단문의 편지 한 장은 순간 저를 동요하게 만들었고, 한 줄 한 줄 반듯하고 가지런한 글씨는 선배인 저를 번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꼭 필요할 때 쓰시라.”며 함께 봉투 안에 넣어준 공중전화 카드 한 장은 마침내 제게 뭉클한 감동으로 멍하니 밀려들어 왔습니다.
그렇게 저와 제 아내의 사랑은 소설처럼 쓰여 지고, 한 편의 아름다운 영화처럼 쉴 새 없이 필름으로 돌아갔습니다.
▲ 아내와 쌍둥이 딸 아내는 내게 다가와 보석같은 쌍둥이 딸도 주었습니다. ⓒ 이성한
이제 결혼한 지 만 13년.
아내는 저에게 보석 같은 쌍둥이 딸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아내는 동네 아줌마들에게도 싱싱한 입담과 수다로 행복을 전파하는 씩씩한 행복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공부방 선생님으로, 독서지도 교사로, 자상한 아이들의 엄마로, 착한 며느리로, 그리고 무엇보다 부족한 남편의 빈 곳을 채우는 우리 가족의 지킴이로 “유다르크” 아줌마가 기꺼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녀는 눈물도 많은 여자입니다. 간혹 TV 드라마나 비디오 영화 한 편을 함께 보다가도 흑! 흑! 거리며 금새 눈물 콧물을 훔치는, 마음이 여리디 여린 그녀의 이름은 여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당찬 여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현명한 자신감을 발휘할 줄 아는 여자입니다. 뭇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는 제가 보기에 천부적 친화력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숨 가쁘게 일과를 무사히 마치고서, 이웃한 그녀의 열렬한 팬들에게서 쉴 틈 없이 걸려오는 전화기에 매달려 웃음으로, 수다로 깔깔 호호거리며 하루를 마감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남편인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습니다.
그녀의 몹시도 밝고 긍정적인 표정.
그녀의 맛깔스럽고 재미난 입담.
그녀의 유머러스한 애교를 비타민처럼 매일 공짜로 얻어먹고 사는 저는 아마도 복 터지게 행복한 남편인가 봅니다.
저는 수다쟁이 아내가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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