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關東)대진재가 일어났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 일본인, 한국인, 재일한국 조선인이 함께 밝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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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kcse21)등록 2007.09.01 15:48
                                                                                                                                     
                                                                                                다카하시 신코
                                                                                   일본 아시아하우스 대표

일본은 지진이 아주 많은 나라입니다.
2004년 10월 23일의 츄에츠(中越)지진에 이어, 올해 2007년 3월 25일에는 노토(能登)반도지진, 7월 16일에도 츄에츠오키(中越沖)지진이 발생하는 등 일본에서는 인적피해를 동반하는 큰 지진이 근년에 수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12년 전인 1995년 1월 17일에 코베를 중심으로 한신지방을 엄습한 한신․아와지(阪神淡路)대진재에서는 6434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진재해에 의해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84년 전,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간토대진재는 사망자・행방불명자가 14만 명을 넘은 큰 재해였습니다. 이 간토대진재가 일어난 9월 1일을 일본에서는 방재기념일로 정하고 학교・직장 등 여러 곳에서 피난훈련 등의 행사가 대규모로 행하여집니다.

사실상 간토대진재 때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되었다는 기술은 일본의 대부분의 역사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토대진재 시 조선인학살이 있었다는 인식은 적어도 일본인, 일본사회 속에는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일본의 공적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학살의 사실에 대하여 일본이 국가적으로 진상규명을 위한 충분한 조사를 해오지 않았고, 또한 희생자에 대한 공적인 사죄조차도 하지 않았다는 현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일본인시민의 수는 극히 소수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2003년 8월 23일에 일본변호사연합회는 당시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총리대신 앞으로 「간토대진재 직후의 조선인, 중국인에 대한 학살사건」에 대하여 사죄와 진상규명을 하고 원인을 밝혀야 한다는 권고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권고를 받고 일본정부가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나 사죄를 실시하였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습니다.

수도가 괴멸되어, 지진 후의 대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방화하여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 등의 유언비어가 흘러, 군인 등 공권력의 입장에 있는 자들만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인시민-민중이 만든 자경단에 의하여 수많은 조선인・중국인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이 가지는 중대한 의미가 얼마나 사회 속에서 인식되어 왔는가를 생각할 때, 그것은 아주 애매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의 한신・아와지대진재는 84년 전의 간토대진재처럼 대도시권에 들이닥친 거대한 지진이었습니다. 그 당시 72년 전에 일어났던 간토대진재를 상기하게 하는 역사적인 큰 재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집, 빌딩, 고속도로가 부서져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겨우 살 수 있었다 해도 집을 잃고 재산을 잃은 많은 이재민들이 가까운 학교, 공민관 등에 피난하였습니다.

한신지역은 일본에서도 특히 재일한국 ․ 조선인이 많이 사는 지역입니다. 수많은 재일한국 ․ 조선인이나 외국인도 또한 똑같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때 재일한국 ․ 조선인의 아동, 학생들이 다니는 조선학교도 진재 후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피난처로 되었습니다. 여기에 피난한 사람들 속에는 재일한국 ․ 조선인만이 아니라 근처에 살았던 많은 일본인이 있었습니다.

진재 직후에 조선학교 사람들에게 주먹밥을 받고 감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재일한국 ․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협력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에서 보도되었습니다. 이 조선학교라는 피난소를 무대로 하여 일본인과 재일한국 ․ 조선인들이 서로 도와주는 광경이 몇 번이고 전국에 보도되었습니다.

진재 전, 조선학교와 근처의 일본인사회는 희박한 관계성 속에 있었는데 진재 직후에 여기는 일본인과 재일한국 ․ 조선인이 음식이나 물자를 서로 나누고 서로 협력하는, 말하자면 교류의 장으로도 되었던 것입니다.

72년 전과는 180도 다른 진재 후의 모습이 거기에서는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폭동도, 물론 학살도 없었습니다. 진재 후 효고현에 생긴 「외국인학교회의」나 「어린이다문화공생센터」, 코베시에는 7개 국어에 의한 FM라디오국 개설을 비롯하여 지역 속에서의 일본인과 재일한국 ․ 조선인을 비롯한 재일외국인의 연대는 크게 확대되어나가고 있습니다.

한편 현재에도 고령이 되신 간토대진재 이재민 분들 중에 진재가 일어났을 때에 육친, 지인을 학살에 의해 여읜 분들이 계십니다. 또한 당시 마을사람들이 자경단이 되어, 어렸을 적의 자기 눈앞에서 조선인을 학살하는 장면에 조우한 분이 계십니다. 이 분들의 마음의 상처는 지금까지도 치워지지는 않습니다. 간토대진재 시의 조선인학살사건은 “시민이 시민을 죽인다”는 너무나도 비통한 사건이기도 하였습니다. 학살되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왜 죽음을 당하기에 이르렀는가,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깊이 그것에 대하여 배워야 합니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 두 번 다시 이러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시민들은 소리를 높여나가야 할 것입니다.

고령인 재일한국 ․ 조선인시민의 무연금문제 등, 침략전쟁 종결 이후 6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재일한국 ․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인 인권 상의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일본사회에 엄연하게 계속 남아있습니다.
이번의 간토대진재와 조선인학살에 관한 기획은 일본, 한국, 재일의 시민들이 함께 발신하는 시작의 집회입니다. 현재에 이어지는 84년 전의 진실을, 한신 ․ 아와지 대진재 후를 겪은 지금 바로, 일본인, 한국인, 재일한국 ․ 조선인이 함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하게 죽어간 분들의 명예를 회복하여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다카하시 시코(47)씨는 1923년에 일어났던 간토대진재(관동대지진) 당시 일어났던 재일조선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일본측의 대표입니다. 도쿄 신오쿠보에서 아시아인들의 교류와 평화를 위해 아시아하우스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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