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서울대에 갈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성공할 '기회'를 가져야 할 '무지의 베일'을 가질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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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형(machiave83)등록 2007.07.24 09:21
흔히 고등학교때 하는 농담으로 이런게 있다. 1학년때는 무조건 서울대 가는 줄 알았고, 2학년때는 그래도 연고대는 갈 줄 알았고, 3학년때는 서울에 있는 대학만 가자. 라고 생각했는데 수능성적표 받아보면 대학교 가는것만으로도 가슴을 쓸어내린다고.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웃으면서 아니었다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고3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사실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 그중에서도 유력한 대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은 소수이니까. 그중에서도 '서울대'는 특별한 위치에 속한다.

아무리 서울대가 정원을 늘린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은 서울대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되기에는 서울대가 너무 좁을 뿐더러 그렇게 된다면 서울대라는 '프리미엄'이 형성되지 않으니까. 고1때 우리가 서울대는 당연히 들어갈거라고 생각했던 건 우리나라에는 서울대라는 대학교만 존재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대학교 다운 대학교'는 서울대 밖에 없다는 세간의 인식을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소위 명문대는 제한된 엘리트들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명문대가 된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서울대만 나오면 대접받는 이유는 여기서 파생된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이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서울대로 상징되는 대한민국의 명문들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소리높여 주장하기도 한다. 서울대와 연고대같은 이른바 대한민국의 명문은 사회를 좀먹는 세력이며 자기들끼리의 카르텔을 구성해서 사회불평등세력을 억압하려 한다고 한다고 말이다. 뭐 맞는 말일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든 기득권계층은 다 그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득권세력이 가장 잘저질렀던 짓이 뭘까? 바로 근친이다. 결혼관계를 근친끼리 수행함으로써 거대한 가족집단을 만들어 자신들만의 권력을 오래도록 향유하려 발버둥친다. 그건 단순히 '말이 통해서'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결혼의 이유이다. 씨족사회와 부자관계를 거치면서 근친은 사라진듯이 보이지만 외척관계를 더듬어 올라가면 지금까지도 거대한 가족집단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엘리트계층의 폐쇄적인 카르텔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반복되어지는 성향이다. 가족집단의 카르텔이나 명문대학끼리의 카르텔이나 별다른 차이점은 없다. 학연이나 혈연이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어느 나라나 다 존재하는 성향이다.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

우리 모두는 서울대 생이 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서울대생이 될 수 없다. 이는 명확한 현실이다. 여기서 서울대라는 단어를 도쿄대나 칭화대. 또는 하버드나 옥스퍼드로 바꿔도 이 명제는 완전한 참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지능이 부족해서 어떤 사람은 시간이 부족해서 또 어떤 사람은 모든 걸 만족하고도 돈이 없어서 명문대생이 되지 못한다. 참으로 불평등하지만 인간현실이란 원래 그런거니 어쩔까. 나는 서글프지만 이러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작 중요한 점은 서울대,연,고대만을 통과해야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이다. 스카이라는 체제는 폐지된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카이의 체제가 강고하게 유지되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요새 스카이의 아성을 위협한다고 선전하지만 그건 결국 스카이에서 한글자만 바꿔지는 결과를 낳을뿐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이러니 스카이의 체제는 더욱더 공고해질 수 밖에 없다. 점점 더 사회는 복잡해지고 있기때문이다. 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됨을 의미한다. 즉 정보 하나 하나를 가지고 판단하는 사회에서 정보의 질을 가지고 판단하는 시대로 접어든 셈이다. 이는 결국 신용사회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누가 '보증'해주냐에 따라서 그 정보의 진위가 가려지게 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누가 그 정보의 진위를 보장해줄까? 정부? 결국 취업시장에 진출한 수많은 인재를 걸러낼 '정보'는 학벌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무도 아무를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 중요한 건 신용뿐이니까. 동네 슈퍼마켓에서 파는 두부는 왠지 믿음스럽지 못하지만, 저멀리 이마트에서 파는 두부는 훨씬 비싸도 믿을만한 것처럼 .

불량품 양산 시스템

우리 모두는 고만고만할지 몰라도 스카이라는 벽은 동네 시장보다는 이마트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또다른 아이비리그니 칭화대니 도쿄대니 하는 식으로 또다른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달라진 건 없다. 장벽이 좀 더 높아졌을 뿐이다. 흔히들 다변화된 국제사회에서 더이상 학벌만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없다고 하며 학벌만으로 취직할 수 없다고 한다.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계화 되면서 스카이가 칭화대, 도쿄대, 하버드대가 되었을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벽을 치고 우리를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것은 스카이가 쳐놓은 벽보다 훨씬 높을 수 밖에 없다. 보증의 질 자체가 틀리니까. 그리고 그 밑에는 다시 스카이가 있고, 그 밑에는 다시 대학이 존재하고, 고등학교가 존재한다. 앞에서 서울대 연고대만을 통과해야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은 앞의 주어만 바뀌면 똑같이 쓰일 수 있다. 해외 유명대학을 통과해야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앞의 문장이 잘못되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정아 동국대 조교수 사건은 바로 그 문장이 얼마나 위력을 발휘 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단순히 이 사건이 해외 유명대학을 맹신하는 국내 풍토때문에 벌어진 일일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방점은 해외 유명대학이 아니라 맹신에 있다. 결국 대학은 그 맹신을 지키고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좋은 '양산형제품'을 찍어내는 공장으로 전락했다. 신정아 조교수사건은 그 양산형제품에서 불량품이 나오게 됨을 의미한다. 어쩌다 한번씩 나오는 시그마 제로가 아닌.

계층의 세습화라는 이런 우울한 단어는 쓰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산주의사회처럼 아버지의 직업을 아들이 강제로 물려받는게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닥쳐오고 있다. 단순히 이것을 개인의 창의력 부재라던지, 도전의식의 쇠퇴따위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교육은 사회를 건전하게 돌아가게 해주고 계층을 순환시키게 해주는 마지막 보루이다. 이 보루가 무너져가고 있다. 아니 이미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 불량품이 등장하는 것은 시스템이 건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질투는 사교육의 힘

중요한게 뭐냐고? 위에서 말했다. 우리 모두는 서울대를 가지 못한다. 그렇기때문에 서울대를 가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게 해야한다. 현재와 같은 이러한 상태로는 죽었다 깨놔도 대학교, 그중에서도 명문대를 나오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의 부모들, 그리고 어쩌면 세뇌된 우리들까지도 기존 질서에 얽매여서 우리 모두는 서울대에 가야한다고 눈먼채 소리친다. 그것이 가장 편한 길이라면서, 이게 가장 어려운 길이다. 관악산에 50만명을 집어넣으면 또다른 서울대가 생겨날 뿐이다. 아니 그 이전에 다들 신경쇠약으로 죽을껄? 이미 그 전초는 마련됐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대가 큰소리 쳐도 아무 소리 못하고, 서울대가 중요하게 본다는 시험에 목매달고, 그리고 결국 조기흥분증후군에 걸려서 옆집 아줌마가 애 낳자 마자 영어교육을 시키면 자기는 애를 배자 마자 남산만한 배에 영어 테이프 소리를 쩌렁 쩌렁 들려주게 된다.

남들이 하면 자기도 하고 싶어서 안달을 한다. 타인에 대한 신뢰는 커녕 질투가 교육현장에서 만연한다. 신정아와 같은 불량품은 그 질투에서 생성된다. 사교육시장이 공교육을 압도하는 나라가 어떻게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건가. 옆집 철수가 학원 하나 다니면 우리집 영수는 학원 두개 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대한민국의 교육이 어떻게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건 미친짓이다. 잘못된 사회체제를 고치기는 커녕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지도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미친짓의 근본원인에는 스카이, 그리고 명문대라는 '보증'만 잡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깔려있다. 스카이가 왜 아이비리그로 대체되었겠는가. 신정아가 왜 예일대 학사학위를 조작해야 했는가. 더이상 스카이만으로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질투가 확산되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보증의 질은 점점 강해진다. 정보화 사회. 정보를 더이상 믿지 하는 현대 한국인의 불행한 초상이다. 이는 중증이다. 암이다. 그리고 이를 해결해야할 의무가 있는 교육부는 암환자에게 감기약을 주고 있다.

해결책- 무지의 베일

대한민국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거나 본 적이 있다는 맨큐의 경제학이라는 책에 재미있는 이론이 있다. 나는 대학교 1학년때 이 부분을 읽고 한참을 천정만 쳐다보았던 기억이 있다. 바로 존 롤즈의 '정의론'이다. 자세한 내용은 빼고 여기서는 간단하게 모 블로그에서 소개한 내용을 절췌하겠다.

롤스는 사회안에서 각 개인이 완전히 평등할 수는 없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는 오랜 전통의 사회계약론을 현대화하여 사회계약론의 전제조건인 '자연상태'를 '원초적입장'으로 변형시켰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 즉 지위와 직업 등을 전제한 상태에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으므로 이 상태에서는 정의로운 결정을 내릴 수 없고 자신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무지의 베일]에 가려진 원초적입장을 가정한 상태에서 내려진 결정을 기초로해야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했다. 원초적입장에서(자신이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날 지 모르는 태아의 상태를 가정하면 쉬울 것 같다) 인간은 첫번째로 사상의 자유, 신체의 자유, 사유재산권 등 기본권을 지지할 것이고, 기회의 균등을 전제할 것이다. 자신이 부자의 자식으로 태어나리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앞으로 살아갈 사회의 기본구조를 짜야 한다면 부자에게 더 많은 부를 누리게 하기 보다는 위험을 최소화 하기 위한 선택. 즉 최하층의 소득과 기회를 보장하는 선택을 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이렇게 무지의 베일속에서 세워진 사회제도가 바로 '정의'이다.

나도 이러한 존 롤즈의 사상에 적극적으로 동감하는 편이다. 갑자기 왜 뜬금없이 존 롤즈 타령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실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 되풀이해서 말한 이야기와 존 롤즈의 '무지의 베일'을 연결시켜 보라. 하나의 가느다란 실선이 생겨나지는 않는지.

우리 모두는 서울대에 갈 수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성공할 '기회'를 가져야 할 '무지의 베일'을 가질 자격이 있다. 적어도 최소한 달리기를 할 때 총소리는 같이 들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한계때문에 출발지점은 서로 다르더라도 적어도 같이 뛰게는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살아가야할 사회는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그런 사회를 물려줘야할 책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한다. 사회구성원들간의 합의가 질투에서 시작되어서는 안된다. 더이상 신정아와 같은 불량품을 양산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대충 문제가 외국 맹신주의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표피적인 문제해결에만 집중해서는 안된다. '보증'에 집착하는 이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한다.

앞에서 말했지만 교육은 사회를 순환시켜주고 계층간의 갈등을 완화시켜주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한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나라의 교육구조는 더욱더 개선되어야할 필요성이 있다. 존 롤즈가 말했듯이 '정의'를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존 롤즈의 '무지의 베일'에 모두 요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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