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 Secret Sunshine, 뻔뻔한 기독교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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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chullee1)등록 2007.07.02 14:56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웠던 사울은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다. 비극의 발단은,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법궤’를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전쟁터로 옮겼던 데에 있다. 사울은 이전의 전투에서처럼 법궤를 앞세우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서둘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사울은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늦게 도착한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호된 질책과 함께 자기의 세 아들과 같은 날에 전사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 후 이 말은 실현된다.

이 일은 ‘소유의 하나님’과 ‘관계의 하나님’에 대해서 중요한 것을 하나 알려 주고 있다.

‘소유의 하나님’과 ‘관계의 하나님’

여기서 ‘소유의 하나님’이란 신자(信者)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하나님을 말한다. 이 때 하나님은 어리석고 고집 센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이다. 당장은 자식의 소원을 들어주면서도 후일에는 자식이 변하기를 바라는.

‘관계의 하나님’이란, 하나님이 신자(信者)와의 관계에서 최선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신자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성품을 갖추게 되기를 바라는 것을 말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사실 ‘관계의 하나님’이다. 많은 신자들이 자기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소유의 하나님‘에 감격하고 있기만 한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입장에서 ‘소유의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반면, ‘관계의 하나님’은 최종목적이다.

이 땅의 많은 불행, 특히 기독교 신학의 빈약함은 ‘소유의 하나님’을 이기적으로 ‘활용’하는 데에만 몰두할 뿐, ‘관계의 하나님’의 단계로 넘어가려 하지 않는 수많은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의 옹졸함에서 비롯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법궤)을 자기의 뜻대로 이동하려 했던 사울은, 어쩌면 훗날의 수많은 이기적인 신자들을 대표해서 벌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밀양(密陽), Secret Sunshine, 나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

올해 칸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Secret Sunshine’이라는 부제 혹은 영어제목이 붙어 있다. 경남의 밀양이 아니라 ‘비밀스런 빛’,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은밀하게 비춰주는 빛’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밀스런 빛’은 신애(전도연 분)에게도, 그녀의 아들을 죽인 웅변학원장에게도 비춰졌다. 문제는 두 사람 다 ‘소유의 하나님’, 즉 ‘나의 하나님’, ‘나만을 위한 하나님’만을 알고 있었던 데에 있다.

조용하게 지나가버린 클라이맥스는, 신애가 아들의 살인자와 교도소 창살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신애는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했던 ‘용서’를 철천지원수에게도 나누어주려 면회를 신청했던 것이다. 이 때 살인자는 담담하게 말한다. 자신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며, 비록 몸은 갇혀 있지만 하루하루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고 있노라고.

이게 뭔가? 이게 말이 되는가? 어린 생명의 살인자가 그 어미에게 할 수 있는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눈물을 쏟으며, 죽을 죄를 졌으니, 제발, 한번만, 용서해주십사, 엎드려, 애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의 어처구니없이 뻔뻔스런 ‘신앙고백’은 그가 ‘무례한’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나의 하나님’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며,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보여주었던 비상식적이고도 몰염치한 언행의 중요한 원인은 한국 기독교 교회와 신학의 얕음에 있다. 기독교인이 되는 순간 ‘나의 하나님’에만 몰두하며, 사람들에게는 무례해지는. 때로는 잔인해지는.

신애는 반란을 일으킨다. 하나님에 맞서서. “네가 뭔데, 나보다 먼저 그놈을 용서해줬어!” 하나님에 맞선 신애의 반란은 정당할까? 정당하다. 용서의 우선 권한은 하나님이 아니라 신애에게 있다. 물론 하나님도 이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신애보다 먼저 그를 용서해주었을까? 혹자는 대답이 옹색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용서를 빌 때 용서를 미룰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앞에 용서를 구하는 이를 용서해주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잘못되었을까?

웅변학원장의 절반의 회개. 하나님의 용서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믿어버리는 철없음. 무심함. 뻔뻔한 자기도취. 그리고 그를 전도했을 목사의 짧은 신학과 그런 목사를 길러낸 한국교회.

하나님과 신애의 엉켜버린 관계는 어떻게 될까? 이창동 감독의 대답은? ‘밀양(密陽)’, Secret Sunshine!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햇빛이 거울에 반사되어 어수선한 신애의 시골집 마당에 비취고 있다. 한 뼘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은 종찬(송강호 분)의 손에 들려 있다.

종찬은 신애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흑기사로 나섰다. 종찬은 신애의 면박에도 아랑곳 않고 신애 주위를 맴돈다. 그는 신애가 몸으로 유혹하려 했을 때는 오히려 신애를 질책했다. 영화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했던 종찬이 ‘관계의 하나님’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인지 모른다. Secret Sunshine을 반사해주는.

뻔뻔한 기독교인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무심함과 배려심 부족을 포함하여)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들의 반사회적 언행들에 대해서 비기독교인들께 송구스런 마음을 숨길 수 없다. 대표적인 보기를 두 가지만 들겠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말이나, 수백억대 재산가이면서도 의료보험비를 일이만원만 납부하는 파렴치함, 선거법을 위반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출마,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시멘트로 덮어버리겠다는 단순무지한 발상, 경영했던 회사가 부도를 맞았는데도 사적 기자관리로 얻은 ‘경제대통령’이라는 허위이미지에 힘입어 대권을 탐하는 행위는 교회의 장로님으로서 하실 일이 아니다. 장로님 대통령은 종합적 사고력을 위한 정신적 건강보다 육체적 건강을 더 중요시했던 ‘IMF 대통령’ 한 사람으로 족하다.

이번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에서 사학법 개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던 국회의원들을 총선 낙선대상자로 지정했던 일도 엽기 그 자체다. ‘한기총’이라는 단체가 결성된 것이 이미 ‘소유의 하나님’을 자기의 욕심대로 끌고 다니겠다는 발상에서 비롯했으니, 그 단체에게서 무슨 선한 것을 바라겠는가마는, 이번 일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

하나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허락한 이후로 정치영역에 대한 주도권을 인간에게 넘겨주었다. 정치활동은 종교인들이 하나님과 교회의 이름을 걸고 뛰어들 영역이 결코 아니다. ‘무모한’ 한기총 목사님들은 이 때 정치적 권리는 주장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 최대한 이기적인 스탠스를 골라잡는 ‘꾀’를 발휘하였다. 그야말로 ‘나의 하나님’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기심의 극한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가 언급한 것조차 나의 권한에 속하는 일은 아닌 것이니. 하나님은 이들에게도 ‘비밀스런 빛’을 비치고 있을 것이다. ‘관계의 하나님’의 단계로 넘어가기를 애타게 바라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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