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성공한 방책이라도, 필요하다면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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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형(machiave83)등록 2007.06.30 17:04
신들은 더 이상 있지 않았고, 그리스도는 아직 있지 않았으므로 인간이 홀로 있었던, 바로 키케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까지의 유일무이한 순간들이 있었다.

플로베르 서간집 중에서.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인다고 했다. 플로베르의 저 말 역시도 그 사람이 살아왔던 과정, 그리고 모든 개인이 생각하는 능력에 따라서 각자 다르게 비추어 질 수 있다. 그러한 권리에 힘입어서 나는 플로베르의 저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신들이 사라져가고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았던 시대. 인간은 홀로 있었어야 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고. 외롭지 않았기에 신이 없었어도 인간은 홀로 있었다. 플로베르는 그 시기를 키케로 때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까지로 규정한다. 시오노 나나미가 ‘안정성장기’로 규정지었던 시기다. 지중해 세계에 팍스 로마나가 구축되고 유지되었던 그 시기를 플로베르는 인간이 외롭지 않았던 시기라고 말했다. 왜 그때 인간은, 정확히 로마인은 외롭지 않았을까.

로마인들이 외롭지 않았던 이유는 서로에 대해서 의지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인간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진다. 타인에 대한 확신이 없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것은 결국 절대존재. 즉 ‘초월적 지위’의 존재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자 하는 심성으로 이어진다. 바로 절대 신의 등장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등장한 이후 현재까지 인류는 바로 이 절대 신과 같이 하고 있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타인을 믿지 못하는 인간들의 ‘나약한 심성’이 빚어낸 결과이다. 로마인은 바로 그 나약한 심성을 2c동안 강건하게 유지했다. 이건 팍스 로마나와 멀지 않다. 로마. 제국이라는 한 국가가 굳건하게 국가를 유지하고 평화를 유지하고 번영을 유지했기 때문에 그 안의 공동체 구성원들은 결코 절대 초월적 지위를 가진 ‘신’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플로베르의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그렇다면 로마는 어떻게 이런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고 이 확신은 어떻게 깨어졌는가.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듯이 로마가 그렇게 성장하고 죽어간 것에는 이유가 있다.

감히 단언하건데 로마가 융성했던 이유는 유연성이다.

생각해보자면 로마인이 가지고 있는 덕목 중에서 가장 빛나는 덕목이 바로 이 유연성이다. 패자와도 동화하는 정신도 바로 이 유연성이라는 덕목에서 나오는 건 아닐까. 자신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서슴없이 도입하는 그들의 유연성이 로마라는 대 제국을 탄생시켰다. 예를 들자. 한니발 전쟁 당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자신을 괴롭혔던 에스파냐 원주민의 칼이 실용성이 있자 주저 없이 로마 중장병의 제식병기로 도입했다. 그 이전에 1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어땠는가. 해전의 자신감이 없었던 로마인들은 배에 ‘까마귀‘를 붙여서 카르타고와의 해전에서 이기는데 성공했다. 로마인들의 이 유연성은 그들이 성장하는 동안 끊임없이 발휘되었다. 몸젠이 극찬한 로마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기병뿐만이 아니라 게르만인들까지 수하로 삼아서 기병세력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사례는 끝도 없이 많다. 이것은 단순히 국가의 엘리트계층만이 수행했다고 이루어질 수 없다. 한두 명의 지도자가 유연성을 발휘한다고 해서 국가의 방향자체가 바뀐다고 하면 그 국가는 시대를 제패할 자격조차 없으니까. 로마인의 유연성은 로마인 모두에게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지도자들도 ’유연성‘을 발휘했다고 보는 게 더 올바른 판단이다.

자신보다 낫다는 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도입해서 자기화 해버리는 것. 이는 로마라는 국가가 애시 당초 무(無)에서 출발했던 국가라는 걸 알려준다. 남들보다 뒤쳐져 있었던 나라였기에 주저 없이 베끼는 것에 열중할 수 있었으리라. 동시에 이는 로마라는 국가의 구성원들이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해준다. 남의 것이 무조건 옳다고 해서 베끼기만 하면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고 타성화에 길들여 무너지기 십상이다. 로마는 그러한 길을 걷지 않았다. 걷기는커녕 자신보다 나은 것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서 더 좋은 것들을 만들어 냈다. 바티칸 박물관에 가면 라오콘 군상이라는 작품이 있다. 로도스가 한참 전성기였을 때 만들어진 그리스 예술의 걸작품 인데 바티칸의 라오콘 군상은 로마시대에 모작을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술의 걸작성은 결코 원본에 비해서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지금 원본은 사라지고 없지만 복사본을 보더라도 원본보다 미치지 못하리라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나는 라오콘 군상에서 로마가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는지 그 원동력을 생각해 본다.

남의 것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 시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극대화된 ‘자신감’이 아니면 이루어 낼 수 없는 경지다. 아피아가도로 상징되는 로마의 ‘길’도 마찬가지다. 로마는 외적이 그 길을 따라 들어올 것이라는 걸 뻔히 예상하면서도 가도를 깔고 다리를 놓았다. 이는 외적이 들어와도 물리칠 수 있다는 그들의 자신감을 상징하는 동시에 길을 놓아서 자신과 다른 우수한 외부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유연성을 상징하는 건 아닐까. 즉 유연성은 자신감 없이는 이루어내지 못한다. 경직되어 있고 딱딱하게 굳어져서 유연할 줄 모르는 사고방식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믿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결과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 없이는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독선이고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

로마인 이야기를 쓰면서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지도자들끼리의 배턴 터치가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차세대 지도자들이 원활하게 공급되는 것에 대해서 감탄했는데 내가 생각하는 로마의 ‘유연성’에 비추어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연한 사람은 독선에 민감하기 마련이고 타인의 재주를 이용하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결국 이는 궁극적으로 타인과의 공존공영으로 이어진다. 로마라는 국가가 유연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결코 운이 아니었다. 국가를 구성하고 있었던 구성원들이, 그리고 그들을 이끌어 나간 엘리트와 지도자들의 유연성이 국가의 유연성으로 이어졌고, 로마는 계속해서 발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그들의 확고한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자신감이 없는 국가와 구성원들은 결코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로마의 안정성장기. 지중해세계에 ‘팍스’를 구축한 로마인들에게 그때까지 도와준 신들이 곁에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그들의 유연성과 자신감은 로마를 세계제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그 유연성과 자신감이 사라지는 순간에 로마는 하강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로마가 내리막길에 접어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만 로마가 몰락하게 된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나는 전혀 다르게 본다. 유연성과 자신감이 제국 동력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시기는 제국의 최 전성기 오현제 때부터였다. 제국의 몰락은 그때 움트기 시작했다. 시대는 변했고, 그 시대에 로마는 맞출 수 없었다. 이는 누구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한 국가가 영욕의 세월을 마감하는 필연적인 절차이다. 역사는 종종 아이러니를 빚어낸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이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 역사상 최고의 시대라던 세종대. 역설적으로 세종이 승하하고 난 뒤 조선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이는 세종 후대 임금들의 책임들도 있지만, 세종의 책임도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인간의 한계다. 로마인 역시 바로 그 인간의 한계에 봉착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그 한계를 늦추는 것뿐이었다. 결국 그 한계에 도착하여 로마인의 유연성과 자신감이 사라져버렸을 때, 제국이 몰락해버린 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유지하는 고유의 가치를 잃어버렸을 때 종말을 맞는다. 세계의 패자로 군림했던 로마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건 무엇인가. 단순히 옷깃을 여미고 그들의 역사를 지켜봐야하는 것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로마인이 가지고 있었던 바로 그 유연성과 자신감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이 뛰어난 실적을 거두어서 우리가 닮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시대가 바뀌면 그 시대를 살아갈 방법도 틀려야 한다. 로마인을 우리가 닮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의 죽음 이후 등장한 절대적 의지로 상징되는 신은 더 이상 세계와 시대를 지배하지 못한다. 이는 인간이 의지할 대상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며, 궁극적으로는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시대, 지구는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공유화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는 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단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 길을 잃어버렸다. 기술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정신을 방황하게 만들었다. 혼돈의 시대. 우리는 이제 젖을 막 뗀 어린아이처럼 벌판에 홀로 남겨졌다. 우리 옆에는 신이 아니라 우리가 있을 뿐이다. 허황되고, 때로는 다투고, 짜증나고 싫증나기까지 하는 ‘우리’ 들이. 플로베르가 말했듯이. 키케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이후로 다시 인간은 홀로 놓여졌다.

시대가 바뀌었고, 인간은 홀로 서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외롭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나는 로마인의 유연성과 자신감을 설명할 때 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예를 든다. 기원전 206년. 로마의 집정관으로 임명된 그는 자기보다 적어도 20살은 많은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자신의 정책을 설득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 그때 그는 새하얀 대리석 처럼 빛나 있었으리라.

“지금까지 성공한 방책이라도, 필요하다면 바꾸어야 합니다.”

나는 이 말에서 로마가 성장하고, 강대해지고, 평화를 확립했으며,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아직까지 살아 숨 쉬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동방 어떤 나라의 한 여인에게 영감을 주어 15년 동안 글을 쓰게 만든 원인을 찾는다. 그 유연성과. 자신감을. 그리고 우리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말한 것처럼 ‘필요한 시기’에 와 있다. 우리의 유연성과 자신감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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