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에게 87년 혁명은 아직 오지 않았다.

서평:<골리앗 삼성재벌에 맞선 다윗의 투쟁>(삶이 보이는 창, 김성환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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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태(dchjt)등록 2007.05.27 12:48
“우리는 군사독재 아래에서 살고 있지 않지만 거대자본의 지배 아래에서 살고 있다. 재벌의 독재 하에서 민주주의란, 이름만 민주주의일 뿐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지금은 재벌로부터 독립을 위한 투쟁이 과거 군사독재를 끝내기 위한 민주화 투쟁에 못지않게 험난한 여정임을 남편을 보며 뼈저리게 느낀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확립되었다고 보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위와 같은 말은 대체 누가 한 것일까. 바로 얼마 전 <한겨레> ‘왜냐면’에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의 부인 임경옥씨가 기고한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87년 민주화 항쟁과 노동자 투쟁 이후 대부분의 기업에서 노조를 인정한 반면에 사기업 중에서는 유일하게 삼성만이 현재까지도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중매체를 통해서 알려진 삼성의 무노조 방침은 노조가 없는 대신 타기업에 비해서 높은 수준의 임금과 근로환경을 보장하는 것으로고 알려져 있다. 이는 필자의 학창시절만 하더라도 그런 줄로 알고 있었던 신화에 불과하다.

이러한 신화는 삼성공화국의 진보보수매체를 가리지 않는 엄청난 물량의 광고를 풀어냄으로서 가능해진 허상이다. 이 허상으로 인해서 결정적인 순간인 삼성X파일사건에서도 정작 분노할 줄 모르는 일반 서민들의 그 허위적 정서를 유지토록 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국내최대 광고주인 삼성에 실질적으로 종속된 한국 언론환경에서 과연 김성환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삼성의 노조탄압을 고발한 <골리앗 삼성재벌에 맞선 다윗의 투쟁>(삶이보이는창)이 얼마나 널리 소개됐을지는 독자들의 추측에 맡기고자 한다. 필자가 알아본 것만으로는 뉴시스, 미디어오늘, 경향신문이 한줄 서평까지 포함해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의 전부였다. 반면에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출간하는 문고판 수준인 SERI 에세이의 경우에는 어떠한 홍보를 받는 지를 상기해보시라.

이번에 소개하는 <골리앗 삼성재벌에 맞선 다윗의 투쟁>은 먼저 출간됐던 삼성노조탄압사례모음집 <벼랑 끝에서 희망을 움켜쥐고>와 달리 현재 삼성으로부터 명예훼손 고발로 감옥에 갇힌 김성환 위원장의 법정, 감옥 투쟁, 옥중서신과 함께 김 위원장의 석방을 촉구하는 몇몇 진보진영 인사들의 글들이 함께 실려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 백미중의 백미는 단연 첨부자료로 실린 삼성의 인력구조조정T/F에서 작성한 <인력 구조조정에 따른 시나리오 및 대응 방안>이라는 내부 지침서다. 이 지침서의 앞표지에는 “절대 복사 유출 금지”라는 문구가 박혀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지침서에는 삼성 내부에 노조결성 움직임에 대한 갖가지 가상 상황별 대응 시나리오를 예상해서 사태가 일어났을 경우(그러니까 노조결성움직임이 있을 경우)에 대처 방안이 마련되어 있다. 가령 사내낙서 유인물 살포시에는 “낙서발견장소 폐쇄, 발생장소 감시조 배치, 유인물 채증, 주동자 격리, 대상외 인력 안정화 작업, 사내순찰강화” 등이 있고, 노조결성 움직임이 포착되면 “리더급(주동자)파악 및 설득, 반발자 개별면담, 격리” 등을 시행한다. 덧붙여 ‘대외 정보망 강화’ 혹은 ‘관공서 업무담당자 내사람화’는 노동부, 정보기관(기부사, 안기부, 검찰청), 노동계, 언론계 등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X파일 사건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지침서에 밝혀진 수준만 보더라도 황당함을 느끼는데 실제 이를 적용한 사례를 일독한다면 독자들은 지금이 군부독재정권 시절인지 민주화 정권인지를 혼동하게 될 것이다.

“삼성그룹이 이달 1일 새로 선보인 TV광고 시리즈 '고맙습니다'가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중략) 새 광고는 평소 소홀하기 쉬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고마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주된 내용이다. (중략)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관계자는 "지난해까지는 삼성그룹이 사회공헌을 어떻게 하고 있나를 소개했다면 새 광고는 삼성을 넘어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제작한 것"이라며 "상반기 5개의 테마에 이어 하반기에도 5개의 테마를 새로 발굴해 국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한국경제신문> 07.05.04)

전경련기관지의 다름 아닌 <한국경제신문>에 실린 본 기사가 과연 기사인지 광고인지 혼돈스러웠던 필자는 다행히도 기사 끝에 기자이름이 밝혀진 것을 보고서야 ‘기사’임을 알았다. 87년 체제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노사관계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는 데에는 삼성의 무노조 방침이 적잖이 기여했음을 상기하면 삼성의 ‘사회공헌’을 언급하는 광고에 가까운 기사를 쓴 기자의 의도는 속이 뻔히 보인다.

삼성이 ‘평소 소홀하기 쉬운 주변의 소중함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진정 있었다면 정작 삼성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자사의 직원들이 상식적인 사회에서 당연히 존재해야하는 노조를 결성한다는 이유만으로 협박, 납치, 구금, 도청, 매수를 시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여기서 못다 언급한 탄압사례들은 책에 소상히 밝혀져 있다.)

삼성의 효자상품인 핸드폰은 이러한 세계적인 IT 기술이 고작 노조를 조직하려는 노동자들을 추적하는 데 이용하는 것을 보면 씁쓸하기 그지없다. 정녕 뛰어난 기술과 함께 합리적인 노사관계 구축을 통해서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 기업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홍세화 선생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만으로도 삼성의 무노조 사수라는 괴물은 노동자의 힘으로 제거해야 한다. 이 점에서,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김성환 위원장은 몰상식의 시대를 온몸으로 저항하면서 싸우고 있는 늠름한 민중의 표상이다.”라고 말했다. 결국에는 <시사저널>사태, X파일사건을 남의 얘기로 들을 것이 아니라 삼성 일변의 미디어 환경에서 노동자 스스로 각성해서 풀어야 할 문제임을 지적한 것이다.

김성환 위원장은 옥중에서 쓴 ‘독거방’이란 시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갈음했다.

“0.98평 독거방에 갇혀 있어 더 큰 반역을 매일 꿈꾼다.”

87년의 뜨거운 혁명이 지난간지 20주년인 2007년 대한민국은 여전히 노조결성이 ‘반역’인 시대다. 민중에게 87년 혁명은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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