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 시인 함민복의 새 산문집 ‘미안한 마음’

-함민복 산문집『미안한 마음』(풀그림,2006)

검토 완료

이종암(bluewind65)등록 2007.03.12 16:11
@BRI@ 요즘과 같은 열악한 문학 시장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업시인으로 살아가는 젊은 시인이 있다. 강화도 화도면 동막리에서 혼자서 시의 밭고랑을 일궈가고 있는 함민복 시인이 바로 그다. 함민복 시인을 전업 시인이라 부르지만, 그가 시만 써도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높은 고료의 작가여서가 아니라 아무런 직업도 없이 한 달에 겨우 몇 십 만원으로 힘겹게 생을 밀고나가는 시인이기에 부르는 말이다.

충북 중원이라는 산골짝 촌놈 시인이 바닷가 강화도에 자리를 튼 것은 1996년이었다. 우연히 찾은 강화도 마니산 끝자락에 보증금 없이 매월 10만원에 살 수 있다는 폐가 한 채를 발견하곤 그곳에 당장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말았다. 그는 10여 년이라는 강화도 생활에서 『말랑말랑한 힘』이라는 시집 한 권과『눈물은 왜 짠가』『미안한 마음』이라는 두 권의 산문집을 수확했다. 지난 해 연말에 도서출판‘풀그림’에서 나온 그의 두 번째 산문집『미안한 마음』이 전업 시인의 생계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산문집 맨 첫머리에 산문「텃밭」을 읽어본다. 시인 함민복의 삶의 진면목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버려져 있다시피 한 폐가에 딸려 있는 텃밭과 한 그루의 고욤나무와 함께 한 함민복 시인의 1년 동안의 삶을 들여다보자.


마당에는 네 평 정도 되는, 수첩만 한 텃밭이 하나 있습니다. 고욤나무 아래 송판 한 장으로 만들어놓은 긴 의자에 걸터앉아 텃밭을 바라다봅니다.
겨울
먹을 것 없는 새들 날아와 먹으라고 털지 않은 고욤이 눈 내린 텃밭에 듬성듬성 떨어졌습니다. 검고 쪼글쪼글하지만 단 고용 알. 텃밭은 누가 봉송으로 돌린 백설기 한 켜 같았습니다.

작은 밭을 삽으로 파 일궈놓고 무엇을 심을까 즐거운 고민을 참 많이 했었습니다. 신맛, 쓴맛, 매운맛, 단맛, 짠맛 나는 다섯 종류 야생초를 심어볼까. 푸른색, 흰색, 붉은색, 검은색, 황색 야채들을 오방색으로 심어볼까. 뿌리, 줄기, 잎, 열매, 꽃 중 하나를 먹을 수 있는 다섯 종류의 채소들을 심어볼까. 아니면 먹을 것을 포기하고 텃밭을 꽃밭으로 만들어볼까. 고민 끝에 고추 이십 포기, 피망 두 포기, 가지 네 포기, 토마토 열 포기, 상추 오십 포기를 심었습니다.
여름
고추야, 고맙게 잘 자랐구나. 잘 자랐다고 말하고 나니까 조금 민망스러워졌습니다. 눈을 조금 돌려 바로 옆 밭 고추들과 비교해보면 제가 기르는 고추들은 순전히 애기였습니다. 밭고랑에 비닐도 안 씌우고 비료를 안 줘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할 수 없이 무공해야. 농사도 안 짓는 놈이 뭐 있어야 주지.” 집에 놀러온 친구들에게 이웃 밭 고추와 내 텃밭 고추가 대조되는 것 같아 우스갯소리를 던져보기도 했습니다. 고추도 그렇고 다른 열매 채소들도 처음 달린 열매를 따줘야 열매가 많이 달린다는데 따지 않았습니다. 첫 자식이 잘 커야 고추들도 스트레스 안 받고 뭐, 보람이 있어야 잘 자라고 건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이를 ‘식물심리농법’이라고 이름 붙여보았습니다.
가지가 걱정이었습니다. 무당벌레들이 날아와 가지 잎사귀를 갉아먹었습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가지와 보랏빛 가지꽃에 빠져 예쁜 무당벌레를 죽였습니다. 가지 몇 개 먹자고 무당벌레를 죽이나!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원통형 과자 ‘꿀짱구’를 낚싯줄에 꿰어 가지 잎에 걸쳐놓았습니다. 개미가 모여들자 무당벌레들이 떠났습니다.
가을
조심하세요. 토마토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향기로 경고를 합니다. “곁순을 따줘야 토마토가 많이 달리지.” 겁이 많은 토마토. 마실 온 우웃 형이 곁순을 따주었습니다. 하루 내내 토마토 향기가 구구절절했습니다. 며칠 지나자 다시 곁순이 본줄기보다 더 잘 자랐습니다. 곁순을 더 잘 키우는 토마토가 잡념을 더 잘 키우는 나와 친구 같아 악수도 청해보았습니다.
토마토 밭 앞 고욤나무 그늘에 앉아 토마토를 먹다가 토마토에게 미안한 맘이 들기도 했습니다. 토마토는 내가 먹는 것보다 까치가 쪼아 먹는 걸 더 좋아하지 않을까. 씨앗을 위해.
북상하는 태풍에 토마토 섶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고 끝물이고 해서 토마토를 베었습니다. 밑둥치를 바싹 쳤습니다. 다음날이었습니다. 토마토 포기마다 한 뼘 정도 되는 땅이 동그랗게 젖어 있었습니다. 누가 물을 주었을까. 살펴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잘린 토마토 줄기가 젖어 있었습니다. 토마토 뿌리는, 없는 줄기를, 가지를, 꽃을, 열매를 포기하지 않았던 거였습니다. 태풍은 비켜 지나가고 한낮은 뜨거웠습니다. 토마토 포기 주위 흙이 낮에는 말랐고 아침이면 다시 젖어 있었습니다. 토마토 뿌리를 뽑고 무를 심으려던 계획을 나는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내 토마토 뿌리를 뽑아낼 수 없어 무를 심지 못했습니다. 고욤나무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열매만 가득 매달고 있습니다. 식물들은, 멀어도 가지 끝인 텃밭에 열매를 가꿉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살고 사십대 중반이 되었어도 나는 아직 손길 눈길이 많이 가는 어머니의 텃밭이라는 생각을 텃밭이 길러준 한 해였습니다.
-「텃밭」전문.

위 글에는 함민복 시인의 내면 일기가 촘촘히 그려져 있지만 산문집『미안한 마음』에는 강화도 동막리 바닷가 개펄의 풍광과 그곳 사람들의 때묻지 않은 삶의 이야기가 시적 문체로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현재란 시간의 섬이다. 세월이 가는 길, 세상 모든 ‘멈춤들’의 정거장인 시간은 현재의 뭍이다.”는 표현과 나무들의 모양이나 꽃들의 빛깔을 두고 “태양에서 떨어져 나와 나무 속으로 들어간 빛들이 태양을 그리워하며 하늘 쪽으로 가지를 뻗어 오립니다.”고 한 표현, “내가 살고 있는 동막리에도 꽃이 돌림병처럼 피고 있다. 땅 아래 색깔 둑이 무너졌나 보다. 북쪽으로 자라는 백목련, 응달에 모여 붉은 진달래, 줄 잘 서는 노란 개나리, 가출 직전의 흰 벚꽃… 둘러보다 집 뒤 우물가에 물고기 비늘처럼 지는 살구꽃잎에 뺨을 맞아본다. 발가벗고 물을 뒤집어쓰고 차렷 자세로 서서 온몸에 살구꽃 비늘을 붙여보고 싶다. 비늘 방향 앞뒤로 나누어 붙여 과거와 미래로 자유롭게 헤엄치는 사람물고기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라는 이러한 시선은 시인의 눈빛이 아니고는 그려내기 힘겨운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반죽인 뻘을 두고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나라/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라는 표현은 또 얼마나 큰 말씀인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선정한 ‘2007년 2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선정되기도 한 함민복의 산문집『미안한 마음』을 두고 방송인 이금희는 “밥처럼 따뜻하고 감사한 그의 글을 많은 분들이 뱃속 든든하게 접하길” 소망한다고 했다. 그렇다, 함민복의 산문집이 영혼이 배고픈 우리 현대인들에게 큰 양식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함민복 시인에게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든 것은 왜일까?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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