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인생 조영남

let it be 인생 조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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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aigo)등록 2007.02.22 12:21
스님 중광, 시인 천상병, 작가 이외수.

세인들은 이들을 일컬어 한국의 3대 기인이라 불렀다.
@BRI@
사람들은 아직도 중광스님이 분명 어디선가 너덜대는 누더기를 걸치고

별 희한한 방법으로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다닐 것이고

그 유쾌한 시인은 또 누군가를 불러 세워 “오백 원만, 천 원만!” 하며

“깔깔” 웃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슬프게도 시인과 스님은 이미 오래전에 천상으로 이사를 했다.

작가 이외수도 평생을 살던 춘천을 떠나 화천으로 이사를 했지만

오직 그만이 여전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그이들의 기가 막힌 삶의 여정에 대해 누구나 한 두 가지쯤의 장면은

들어본 바가 있을 것이다.

백사장 모래알 같은 범인에 불과한 필자가 매우 세속적으로 그이들의 공통점 한 가지를 들먹여 본다면 “술” 얘기를 꺼내고 싶다.

천시인은 돈 생기는 족족 밥 대신 술만 먹고 살았는데, 그 말도 안되는 동백림 사건에 엮여

심신이 황폐해지고 시립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을 당했고 거기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바

있다.

그때 지인들은 사라진 천 시인을 궁금해 하다,

“통제라! 천재는 단명이라더니, 벌써 갔더란 말이냐!” 땅을 치고는 부조대신

시집 “새”를 출간하여 하늘에 있을 시인에게 갔다 바쳤다.

훗날 세계최초로 유고시집을 받아본 시인이 “으하하하하!” 목 놓아 웃었음은 안 보고도 알만하다.

중광스님은 그 술로 인해 병원대신 백담사로 들어갔다.

작가 이외수는 술로 떡이 된 어느 날, 어쩌다 경찰서로 잡혀 갔는데

그곳도 술집으로 착각하고 “어라, 이집은 꼭 경찰서처럼 꾸며 놨네!” 하며

경찰을 웨이터로 알고 “여기 술 좀 더 가져와” 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그 유명하고 오래된 가수 조영남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느 책이고 어떤 인터뷰에도 밝혀 놓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조 선생! 오늘 나한테 술한잔 사시요!” 할 길이 없는 필자의 한계다.

다만 kbs 조영남이 만난 사람을 진행 할 때 했던 우스갯소리로 그 또한 애주가임을 추측 해 본다.
자니윤 쇼 게스트 시절에 무의식 적으로 주머니에 손이 갔고 거기에 엊저녁 안주로 먹다 남은 오징어 다리가 있었다.

아무생각 없이 그걸 오물대며 “안녕히 계십시오.” 했다가 다음날 바로

잘릴 뻔 했는데 재수가 좋아 경고로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때 받은 경고는 그전에 이미 무수히 받았던, 훗날 무수히 받게 될 또 한 장의

개나리꽃잎으로 봤을 것임은 분명하다.




호적에 그는 44년 황해도 남천 출생으로 올라있다.

하지만 그건 1,4 후퇴 때 전 가족이 충청도 예산으로 피난 후 그의 아버지가

일괄적으로 호적 정리를 하면서 대충 써낸 결과 일 것 이라 말했다.

그의 가족들이 기억하는 출생년도는 대략 45년 여름 일 것 이란다.

그렇다면 가수 조영남은 언제 생일상을 받아먹었을까?, 안타까운 맘도 들지만

오히려 그것이 나이를 잊고 자유롭게 사는 원천 일 수 있겠단 생각도 든다.

고단했을 그 시절에도 그의 학력은 일류를 넘어 대한민국의 초일류 급임에

빈틈을 찾을 수 없다.

한양대와 서울대를 다녔고 덧붙여 트리니티 신학대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68년, 드디어 대중가수 조영남이 만천하에 공개 된다.

밤 깊은 골목길 그대 창문 앞 지날 때 ... 토미존슨의 노래 딜라일라를 들고서,

닭장에 못질하는 손짓을 연신 해대면서 말이다.

이후 그의 여정은 대한민국 3대 기인의 그 파격의 삶에 비추어

조금의 모자람도 없었다.




71년 때마침 무너진 와우 아파트를 빗대 “신고산이 우르르르 와우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했다가 다음날 바로 군대로 끌려가기도 했다.

초기엔 주로 번안 곡을 불렀고 그래서 히트 곡 하나 없는 가수란 소리도 듣지만

한국말로 된 “제비, 고향의 푸른잔디”등은 많은 이들의 18번이기도 하다.


한때 그는 미국을 수시로 오갔는데 세인들은 돈 떨어지면 한국 온다고

입방아를 찧었다.

80년대 중반 KBS 100분 쇼 말미에 예의 그 뿔테 안경을 걸치고 나타나

이선희의 J에게를 즉석에서 작곡 개사하여 불러 댐으로써 또 한 무리의 안티를

양산해 낸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부인과 이별을 고하고 20년 가까이 나이차가 나는 젊은 여인과

또 다른 출발을 했을 때, 찔러대는 무수한 시선에 얼마나 아팠을지 짐작은 간다.

오래지 않아 두 번째 이별을 했고, 당시의 심경은 2001년 발표한 은퇴의 노래에

잘 나타나 있다.

이후에 쏟아냈던 거침없는 말들은 “조영남표”라는 특권을 달고 아슬아슬 넘어갔다.

많이 늦은 나이에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딸을 얻게 되기도 했다.

2005년 환갑을 맞은 그가 콘서트를 열고 "거국적으로 저의 환갑을 축하해 주시는

여러분 감사합니다"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그무렵이 거칠것 없던 그의 인생에 가장 절정의 순간 이였을것 이라고 필자는 단정한다.

화무 십일홍 이라, 모든건 차면 넘치는 것이 만고의 순리 란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기어이, 개나리 꽃잎 같은 엘로카드에 콧방귀도 안 뀌던 그는

어느 날 가시성성한 붉은 장미 꽃잎 한 장을 받게 된다.

이른바 산케이 신문 사건이다.

방송에서 쫓겨났고, 공연과 전시회는 취소되고 중단 됐다.




20006년 MBC 지금은 라디오 시대, MC로 조용히 복귀한 그는

일년이 훨씬 넘는 세월동안 반성과 숙고의 세월을 보냈노라고 밝혔다.

며칠 전 KBS 설 특집 빅쇼에 출연한 조영남은 그 다운 모습(?)을 보이려,

여장을 하기도하고 유머를 구사하기도 했지만 예전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게서 느껴보지 못했던 나이의 연민을 처음으로 느끼기도 했다.

2004년 러시아에서 열렸던 열린 음악회에서 털모자를 휘두르며 화개장터를

열창 하던 순간이 그의 기운이 가장 충만한 순간 아니었을까, 꼽아본다.




신화학자 이윤기 씨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국형이 조영남이라 했고

도올 김용옥 선생은 최고의 친구라고 가수 조영남을 추켜세운바 있다.

오래전 KBS 음악프로에 출연한 도올 선생이 팝송 LET IT BE를

열창하고서 “좋은 노래요, 제발 그대로 내비 둬, 그냥 놔도! 렛잇비가 그런 뜻 이죠”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수이자 화가이며 독특한 문장의 에세이 작가이기도 한 조영남이 그 LET IT BE를 힘이 넘치게 한번 부르는 모습을 봤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21세기는 개성 시대라 하지만, 오히려 더 획일 의 시대 아닌가? 자문해 본다.

드라마의 어떤 배우가 걸친 옷이 다음날 불티가 나고, 방송의 누군가가 툭 던진 말을

제때 반복하지 못하면 구세대라 웃는 요즘이다.

어떤 무리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듯 보이면 총력으로 공격해서 왕따를 만드는

세상이기도하다.

밀리면 끝장인 이 칼날 같은 세상에서, 허공에 한숨을 날리는 이들에게

조영남의 삶은, 그래도 잠시의 여유를 주고 있지 않은가? 질문을 던져본다.


위글은 조영남 에세이 "놀멘몰멘" "넌 노래 부르지 마" , kbs 조영남이 만난사람
ebs 도올강의, 목순옥 여사가 지은 "날개 없는 새 짝이되어"
등을 참고하여 쓴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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