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후보 대학 선거, 열렬한 지지냐 획일화의 저주냐.

- 학생회 선거의 단독 입후보가 시사하는 작금의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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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likewind)등록 2006.11.28 15:38

▲ 2006년 11월 모대학의 투표용지, 찬반만 기입돼 있다. ⓒ 이지은



선거는 언제나 바람을 일으킨다. 그것이 열띤 경쟁의 바람이든 참여율 저조란 불명예의 바람이든 어쨌든 선거는 선거로 남아진다.

그러나 무풍지대도 남기는 한다. 그곳은 바로 11월의 대학가!
공약과 유세, 곳곳의 대자보가 지금의 이곳도 선거임을 말하나 어쩐지 이곳은 공허해 보인다. 게다가 후보는 왜 이리 '침착'한가, 단순히 베짱이 두둑한 덕일까? 헌데 그들이 고루 갖춘 ‘침착’이 어째서 마냥 씁쓸한 것일까.



문제는 선거가 아니라 대학이다!

위의 사진은 작금의 대학을 대변한다. 기호가 없는 대학의 선거, ‘단일후보’만이 입후보한 선거의 양상, 그것이 바로 지금의 대학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게는 기호가 없고 용지의 공간도 퍽이나 여유롭다. 여러 입후보로 채워질 공간에 ‘찬 ․ 반’만 넣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 문제의 대학 학생회선거 입후보단의 현황. ⓒ 이지은


△ 맨 위표에 재기된 문제의 대학은 이미 5년여 동안 단일후보만을 배출해 왔다.
▲ 서울 상위3개 대학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모 대학 선거의 입후보 구성표, 게다가 06년 경영대 학생회 선거의 경우 투표율이 겨우 15%에 불과하나 투표율에 관한 회칙이 없어 단독후보로 당당히 당선까지 확정된다.
*는 자료부족으로 입수하지 못한 부분.

위 표는 서울의 4년제 모 대학이 지난 5년간 배출한 학생회 선거 후보단의 상황표다. 문제의 대학이 그래도 아직은 신입생 유치경쟁에서 자유로운 서울소재 4년제 대학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결코 학생 수 자체의 빈곤에서 온다는 둥의 인과관계로 설명하기 어려움을 말한다. 게다가 이러한 양상은 곳곳에서 포착된다.

하단의 표는 소위 상위3개 대학이라 여겨지고 있는 서울소재 모 대학의 선거 후보 구성표다. 이곳은 지난 2005년 단대 선거에서 두 개 팀 이상의 입후보외에는 배출하지 못했으며 그나마 두 팀을 배출한 단대도 전체 단대의 반을 넘지 못한다.

이 학교의 학내 구성원수를 본교학생회 홈페이지에 공고된 인원을 토대로 약 2만 명이라 보고, 그 중 학과시스템에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을 반이라 축소한 후(휴학이나 학과공부로 참여하지 않는 인원), 그 중 1학년을 제외해야한다는 주장에 응하여 이를 다시 반으로 줄인다하여도 이것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 학교전체구성원비율에 비하여 후보에 응했던 학생의 비율이 사막의 모래알과도 같았던 것이다. 물론 이전 8,90년대 선거는 이렇지 않았다. 초등학교 학급선거를 떠올려 보라. 그들도 최소 2명은 넘어선다.

대학의 선거에 관한 지적은 언제나 있어왔다. ‘저조한 투표율’, ‘비운동권의 입후보참여',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그들만의 축제도 못하는 현실. 이것이 바로 대학의 ’진짜‘ 현실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단독후보’가 왜 문제시 되는가에 관해서 반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대학’이기에 더더욱 문제다.
한국의 대학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들은 무엇을 대변해 왔는가. 한국의 대학은 ‘생동감’ 자체였다. 군부의 독재를 거슬러, 잘못된 사회의 비틀림을 거슬러. 활력이 필요한 사회의 죽음에 녀석은 언제나 들끓는 열정으로 온전히 사회에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곳의 지금은 어떠한가. 어떠한 방식보다도 획일화된 방법으로, 이러한 방법 외에는 민주주의의 꽃조차 피울 수가 없는 공간, 이것이 어째서 문제가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이것이 비단 선거자체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숲을 봐야만 한다. 나무인 개개에 비난을 하기보다, 대학이란 숲의 문제로 보고 온전히 이것에 매달려야 하는 것이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는가.
-학생회의 추락, 아직도 민중가요?

많은 학생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로 학생회에 관한 반목을 꼽는다. 이따금 고개드는 선거 반대 성명도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다시 시작된다. 어째서 학생회는 신임을 잃었는가.


▲ 모 대학 학생회 행사 중 '문선'과 '민중가요'를 선보이는 모습 ⓒ 이지은



학생회행사마다 손쉽게 볼 수 있는 매체 중 하나가 ‘민중가요’와 ‘문선’이다. 70년대 말 학생들의 협동을 이끌어낼 방책으로, 당시 학생들에게 파장을 일으키며 열정적 성원을 불러왔던 매체, 그것이 바로 ‘문선’이고 ‘민중가요’였다.

그러나 문제는 시대가 변했다는 데에 있다. ‘락’과 ‘랩’ 등의 온갖 문화로 휩싸인 지금, 이러한 가락이 청춘에 먹혀들리 없다. 그들의 저력은 이미 퇴색했다. 노래가 생활과 벗어난 그때부터 이미 그것은 사라진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순 없지 않은가. 그러나 학생회는 초지일관 반복한다.
언제까지 7.80년대 선배들이 일궈놓은 유산에 기대어 살 것인가. 청춘의 토양은 더 이상 이들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이들의 매체가 이러할 진대 설교일색의 집회 또한 변함이 있을까. 언제까지 ‘투쟁’만 부르짖으며 아이가 물을 찾길 바라는 것인가. 투쟁의 역사 한 모금, 한 줄기라도 먹여보고 싶다면 학생회는 지금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진정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신뢰를 얻지 못하는 학생회의 사업은 비호응이라는 결과로 이미 나타났다. 사회를 위한 학생회가 되기 전에 학생들을 위한 학생회를 먼저 꾸리는 것은 어떨까. 학교도 사회의 퍼즐조각이 아닌가. 학교를 바꿈이 사회를 바꾸는 첫걸음이 될 것을 누구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선행된 후에 보는 사회운동에 박수쳐주지 않을 이가 누가 있겠는가. 말뿐인 연설에 학생들은 이미 지쳤다. 그리고 메말라 버렸다.


삼성에 광명을!
-취업고시원 대학의 씁쓸한 단면

이러한 문제는 학생회 자체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지난 교무과 만원사례가 이미 증명한다. 그것은 지난 2학기 수강신청기간에 유례가 없이 교무과가 만원이 되었던 사태를 말하는데 이것의 발단은 바로 전날 보도된 내용 때문이었다.


▲ 2006년 9월 공과대학에 파문을 일으켰던 공학인증제에 관한 기사 중 하나. ⓒ 이지은



삼성이 지난 9월초 공학인증제 이수에 관한 특혜를 언론에 밝혔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공학인증제에 관심없던 학생들까지 일거에 그곳으로 몰리게 만들었고, 이는 다시 교무과 만원사태로 이어지게 되었다. 대학이 누구의 하수인이 되었는지 극명히 알리는 지점이다.

우리는 어째서 씁쓸함을 느끼는가. 대학은 어차피 사회의 일부분이니, 그 영향 하에 있을 수 있음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점은 지금의 대학이 체감하는 사회란 오직 ‘경제관념’에 의해서만 좌우된다는 점에 있다.
이전의 대학도 사회에 반응했다. 그러나 다른 점은 그것이 사회의 불의란 점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사회는 정의로 되돌려졌다.(물론 아직도 부족하겠지만) 독재정권은 물러났고 자유가 찾아졌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은 도무지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사회에 의해 조종당하는 대학, 대학은 터널에 진입해 버렸다.

대학은 철저히 사회에 봉사한다. 고시공부도, 취업도 모두 사회의 개인으로서만 말할 뿐 더 이상 대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학생 개개인만을 탓하기는 어렵다. IMF이래로 더 이상 취업이 보장될 수 없는 사회, 그것이 바로 이들의 약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이 모두 같은 곳만을 바라보고 있기에 양상되는 패배자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은 취업고시원이 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대학의 긍정적 면모도 그렇기에 절대 죽어서는 안된다.


대학, 대안은 있는가.

아니러니컬하게도 기자는 지금의 대안으로서 ‘월드컵 함성’을 떠올려 본다. 물론 2006년의 함성이 아닌 ‘자발적 의지’란 이름의 함성이다. 2002년의 함성은 자발적이었다. 그리고 의지가 하나로 뭉쳤기에 가능했던 세계적 대업이었다. 물론 지금 의지를 다시 한곳에 모으자는 주장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획일화를 낳을 뿐.
이러한 문제를 다함께 직시해야한다는 자발적 움직임, 그리고 타계해 나가자는 움직임, 이러한 의지가 모이고 모인다면 사회에 봉사하는 지금의 대학도 조금은 변화가 있으리란 말이다. 이전의 어느 누가 한국이란 나라에서 이러한 저력(월드컵함성)을 뿜어내리라 생각했겠는가. 그것은 감히 상상조차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놀라게 하고 세계를 놀라게 해 한국이란 이름의 이미지를 높였다.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대중이 자신의 이익과 반(反)하는데도 파시즘에 동조했던 원인의 하나로, 실제 대중의 위치가 아닌 인지하고 있는 위치의 차이를 지적한바 있었다. 그때의 독일인들은 자신의 위치를 중상층이 누리던 혜택의 위치로 동일화시켰기에 그들의 이익과 반하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를 수 있다. 이러한 자각을 철저히 도와줄 단호한 매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이 열려진 매체, 인터넷 언론이 바로 그것!

청춘이란 이름은 가능성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아직 완성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과 당당히 마주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 앞에서 청춘은 언제나 당당히 맞서왔다. 자신의 이름을 찾아냈던 것이다. 자신의 자아를 온전하게 아는 것(경제관념상의 ‘자아’만이 아니라), 그것이 대학을 긍정적 방향으로 이끌어낼 작금의 해법은 아닐까. 어쨌건 청춘에 행운을 빈다.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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