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우수학생’의 변명

이한의「학교를 넘어서」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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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미(anchor419)등록 2006.11.18 15:07
◎수능이 끝났다.
어른들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우수학생’은 돌아오는 봄엔 대학생이 될 것이다. 대학생이 된 ‘우수학생’은 교육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 조금은 억울한 심정이 들지 모른다. 1998년 출판 된 이한의 「학교를 넘어서」읽으면 그 억울함 (예를 들면 ‘우수학생인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이 더 커질 수도 있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사회가 인정하는 “우수학생”이 되려고 또는 누구나 학교에 다니니까 하는 심정으로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12년. 사회가 말하는 바람직한 가치에 순응하는 삶을 선택이 아닌 일종의 의무로 받아들이는 학생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학교에 다니고 있다.
지금의 학교체제는 극심한 경쟁, 입시전쟁, 비인간성을 들어 많은 문제점을 지적받고 있다.
이 문제점의 원인을 진단 할 때 ‘잘못은 누구에게나 있다’, ‘학생도 학교체제를 유지하게 한 가해자다’라는 식의 사고는 ‘우수학생’을 슬프게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사회가 마련해 놓은 가치를 교복처럼 갖춰 입고 학교를 다닌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사고를 학생들에게 교복처럼 꿰어 입힌 것을 넘어 체화하기를 바라는 부모님과 교사들 사이에서 “우수학생”이 되려고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의 의지나 선택이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다. 학생의 자유로운 의견개진은 ‘버릇없음’으로 간단히 재단되고 침묵을 비롯한 순응의 제스쳐는 ‘예의바름’으로 인정받는다. 그렇게 사회가 원하는 학생은 어른의 말을 잘 듣는 無사고의 학습기계다. 적어도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12년간은 이런 방식이 유효하다. 이런 학교교육의 메커니즘 아래에서 ‘우수학생’들은 체제유지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고 나면 사회의 요구와 기대는 이것과 모순되는 방향으로 분열한다. 독창적, 창의력, 개성 등의 속성을 지닌 21c 지식정보사회에 맞는 인재가 되어주길 바란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다면, 당장에 비판이 날아든다. ‘요즘 학생들은 생각이 없다’ 혹은 ‘교육과정에 문제가 있다’와 같은 식의 비판은 자기반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런 단계를 거치는 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우수학생’들에게 소외감과 억울함을 느끼게 한다. 사회에서 원하는 학생으로 학교 “잘”다닌 죄 밖에 없는 ‘우수학생’에게 가해지는 비판과 반성의 요구는 이성적 사고 작용을 종용하기보단 감정의 상처를 선물한다.
감정적인 사고를 배제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우수학생’에게도 잘못은 있는 것 같다. 과연 어떤 것이 잘못이 있을까?, 그리고 우리의 학교 교육은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러자 몇 가지의 문제점이 떠올랐다.

하나) 어떤 현상에 대해 “왜?”라고 묻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일
둘) 잘못된 것 같다고 여겨도 침묵했던 일
셋) 점수의 가치를 무엇에도 (우정, 컨닝......) 우선하는 가치라 여겼던 일
넷) 결과적으로 학교 체제에 고스란히 순응했던 일

이렇게 정리하니 그동안 잠자고 있던 생각이 깨어났다. ‘당연하다’에 숨은 無사고의 위험성. 그것이 결국 모든 것의 원인이 된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 우리는 당연하다는 상식선에서 사고의 자리를 배제하는 동시에 개인의 개성과 욕망도 터부시 했다. 그 결과 12년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성인이 되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회가 인정하는 욕망을 마치 개인이 추구하는 욕망으로 내면화 하는 과정에서 자기 안에 숨은 개성은 말살됐다. 21c 교육이 지향해야 할 가치는 자아의 발견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각각 고유한 개인으로 타인이 가지지 않는 자신만의 개성을 갖고 태어났다. 문제는 그것이 학교 교육을 통해 묻힌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존재하는 자아의 가치를 발견해 그 씨앗을 싹틔우는 것. 그것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이며 학생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
나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지난 12년간의 학교 교육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포기였고 체념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에의 포기, 체념과 같은 생산적이지 않은 삶의 방식을 수용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얼마간 이런 생각은 타당성을 갖는다. 현실이란 피할 수 없는 상황 아래에서는 이상, 환상과 같은 것들을 얼마간 포기해야 한다. 이런 과정이 현실에의 타협이든 적응이든 누구나 겪고 있는 사회화의 한 부분이다.)
‘우수학생’으로 12년을 살면서 작은 학교에서 배운 긍정적인 점도 많다. 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사람과 소통하는 것은 인간에게 하나면서 전부이기도 하다. 그건 작게 보면 의사소통의 기술이고 크게 보면 인간관계의 전부다. 흔히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이해의 벽은 어떤 사람을 볼 때 그가 한 행동으로 파악 할 때 일어난다. 한 사람의 행위를 동기에서부터 행동까지 전체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을 이해하는 벽이 생겨날 가능성이 줄어든다. 나는 작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그렇게 지냈다. 나와 친구들은 서로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는 그래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기꺼이 각자의 지지자가 되어 주기로 했다. 소수라 할지라도 피상적인 학교친구가 아닌 진짜 친구가 있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여러모로 삶을 여유롭게 해준다.
또한 나는 선생님도 소통의 대상임을 알게 됐다. 여기서는 개인적으로 한 선생님을 소개 하고 싶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학급 반장을 맡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내게 지나치게 느껴질 만큼 엄격하셨다. 여태껏 선생님을 대할 때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존경해야한다’를 당연히 생각하던 나는 기존의 생각과 선생님에 대해 생겨난 부정적인 생각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선생님의 엄격함에 지쳐 갈 때에는 기존의 생각에 대한 예외를 인정해 담임선생님을 맘껏 미워하며, 학교에 가기 싫다고 부모님께 하소연 했다. 그러다 수학여행에서 선생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의 엄격함이 나에 대한 관심과 사랑임을 깨달았다.
신체적, 인격적 성장의 단계에 있는 학생들에게 부모라든지 선생님과의 소통은 정서적 안정감을 선사한다. 정서적 안정감은 자신감, 자존감을 키워주며 자신의 삶이 가치 있는 것이란 생각의 틀을 마련해 준다. 또한 어른에 대한 반항감이 커지는 시기에 어른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준다. 정서적 안정감은 성인에게도 중요하지만 학생시기에는 그것이 학생의 앞으로의 삶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어 그 중요성이 더 커진다. 학생 = 공부하는 사람이란 등식은 학생이 공부하는 일 이외의 것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우리의 교육 현실은 앞의 등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어른들의 (부모님이나 선생님 등) 관심어린 말 한마디는 학생을 사람으로 환원시키는 힘을 가진다.

◎내가 바라는 학교 교육
학교 교육은 개인의 자아발견에 힘써야 한다. 사람들은 각자 고유한 개성을 갖고 태어난다. 개인이 가진 개성과 능력을 키워 작게는 개인의 발전을 돕고 넓게는 사회의 다양성을 추구 하는 것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이며, 학습자의 권리다. 민주주의가 인간이 만든 제도 중 가장 훌륭하다고 인정받는 것은 그것이 소수 의견을 무시하지 않을 때, 그리고 실제 하는 다양성을 인정할 때 그리고 갈등의 조정에 있어서다. 7차 교육과정에 명시 한 것처럼 우리의 교육은 민주시민을 양성함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럼 응당 학생들에게 의무와 더불어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학생이 아직 ‘포기’하기 전에 학생의 관심과 재능을 교육 안에서 자유롭게 키울 수 있게 해야 한다.
<학교를 넘어서>는 우리의 학교 교육 체제의 경직성과 비인간성을 들어 이것이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문제는 학교 교육 체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망 전체에 넓게 퍼져 있다. 발상의 전환 없이는 그것이 학교 교육이든, 대안 교육이든 문제점을 안고 간다. 그리고 변화는 급진적인 것보다 점진적인 것일 때 수용의 가능성이 더 높다. 새로운 방안과 더불어 인식의 변화를 학교에서부터 사회에까지 넓게 퍼뜨려야 한다. 우리나라가 교육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의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다.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이런 건강한 문제인식에서부터 변화의 단초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가 다르게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이 존재 한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학교와 사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자연스레 일어 날 수 있도록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하나) ‘당연하다’는 것을 의심하자
-정말 당연할까?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 상식이 인류보편가치에 합당한가?
둘) ‘우수학생’의 개념을 바꾸자
-점수로 학생의 우열을 가릴 수 있는가?
-인간을 우열로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존재하는가?
셋) 의무는 권리와 함께 존재 한다
-공부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권리도 있어야 한다.

나는 이런 기본적인 3가지를 학생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우리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비판적 이성의 영역을 침해해 왔다. 그리고 구성원에게 암암리에 당연한 것들의 무조건적인 수용을 종용해 왔다. 학생이 학교에 가야 한다는 걸 당연시 하고, 정해진 교과를 배우는 것이 당연하고,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이런 것들이 쌓일수록 문제가 지적되는 많은 것들은 문제해결은 커녕 문제 상황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는 물론 절대 부정하지 못할 것들이 있다. 살인과 같은 범죄행위는 일어나선 안 된다고 모두들 당연히 생각한다. 당연하다고 여기면 그 이면의 의미는 논의대상이 되지 못한다. 살인이 금지 되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 때문이다. 그럼 인간이 정한 법으로 죽음을 맞아야 하는 사형수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살인금지가 당연한데 그들은 죄인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많은 이들이 ‘당연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인간의 존엄성은 범죄행위와 함께 사라지는 건지, 사형제 폐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취지는 어떤 것인지 이런 문제에 대해 ‘당연하다’란 사고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인간의 오판으로 생명을 강탈당한 사람들을 우린 종종 뉴스에서 전해 듣곤 한다. 당연하다란 말은 이처럼 사고의 영역을 없앤다. 혹여 모두가 인정하는 당연한 일이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거치는 일이 필요하다.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거쳐 사회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무조건적인 수용을 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있어야 진정 성숙을 이룰 수 있다. 학교 교육은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너의 생각은 무엇이니?”와 같은 열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점차 정립해 나가면서 아이는 어른이 된다. 자신의 사고과정을 거친 당연하다는 생각은 신념의 이름으로 삶의 사는 하나의 원칙이 된다. 우리의 학교 교육은 열린 질문을 하는 일에 인색하다. 학교 교육의 도움이 미약하더라도 당연함을 의심해 보는 태도는 학생들에게 사고력을 키워줄 것이다. 교육은 사회의 구조망 아래서 학생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학생의 변화는 점차 교육의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그 반대의 변화 방향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방향이 아닌 발상의 전환과 같은 변화의 내용이다.
내가 학교 교육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아발견 뿐만 아닌 소통의 기능이다. 취향이 비슷한 또래 집단의 소통은 활발히 이루어 질 수 있다. 학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다. 학교가 학생들을 잡아두는 덕에 학생들은 그 안의 구성원과 소통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 속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나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친구의 상황을 공감할 수 있으며, 나와 다른 세대를 살아온 선생님을 보면서 옛날을 그려 볼 수 있다. 타인에 대한 공감은 인간관계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학교의 다양한 구성원은 이질성이 높은 집단으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역할을 한다. 나는 학교의 제1의 기능으로 이런 만남의 장을 얘기 할 것이다. 학교에 다닌 사람들이 학교를 추억 할 때 어떤 것을 배웠다는 지적인 부분은 거의 없다. 이것은 학교 교육이 쓸모없는 것을 가르쳤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들어올 수도 있지만, 학교 교육의 그러한 시스템의 역기능도 학생을 비롯한 구성원에게 소통의 필요성을 더 강조 했다는 반증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교육이 배움의 이름으로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학교에서 대화의 소리가 새어 나오길 기대한다. 우리의 학생들이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자기애를 바탕으로 우리를 사랑해 이익을 쫓는 자신만의 삶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삶이기를 학교와 그 밖의 세상에 바란다.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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