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보와 인권보호의 양립은 불가능한 것인가

민주주의의 기본조건인 인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검토 완료

한상범(soldat)등록 2006.07.28 15:31
나는 미국 국기와 그 국기가 상징하는, 하나님 아래 하나이며 나누어질 수 없으며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이 나라에 충성을 맹세합니다.(I Pledge Allegiance to the Flag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o the Republic for which it stands, one Nation under God, indivisible, with liberty and justice for all.) - 미국의 국기에 대한 맹세


내 통화내용을 남이 듣고 있다. 대기업인 내 회사에서의 통화내용도 ‘테러행위와 동일하다며’ 누군가 듣고 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인터넷 화면 또한 다른 누군가가 함께 보고 있다.

포로로 있는 내게 제네바협약의 정신은 어디로 갔는지 모진 고문과 참을 수 없는 모욕이 가해진다. 나와 한 부대에 있던 동료는 ‘고도의 고문기법’으로 먼 타향에 있는 비밀수용소에서 나와 똑같은 처지에 처해 있다. 이러한 부당한 조치에 대해 유엔 인권이사회나 유럽이사회에서 인권개선권고를 하고 최고재판소에서 위헌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동일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 마을에 어느날 갑자기 미사일이 떨어졌다. 결혼식에 참여했던 우리 마을 사람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신랑신부를 포함, 어린 아해들마저도 목숨을 잃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몇 달 뒤, 옆집에 갑자기 군인들이 찾아와 15세의 소녀를 겁탈했다. 그리고 그 군인들은 자신의 행위를 감추기 위해 그 집안 사람을 추가로 3명이나 죽였다. 그럼에도 옆집 여동생을 겁탈한 군인들은 ‘정신착란’을 이유로 무죄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병사의 자질문제로 인한 여러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의 육군 모병사령부 대변인은“문제인물도 좋다, 입대만 해다오”하는 식으로 시민권을 미끼로 신병 모집에 있어 인종주의단체 조직원들이나 범죄경력이 있는 신병마저도 환영한다는 식으로 “(목표 8만명을 무난히 채우리라 기대되어) 지금까지 결과가 성공적이라 무척 기쁘다”라고 말을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병사는 겁탈하기 3개월 전 자신의 나라에서 ‘시민들의 수호천사로 묘사된“정의로운 군인”’으로 언론에까지 소개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테러, 미사일, 위폐, 마약 등의 불법행위의 근원지로 지목되는 ‘악의 축’국가인 이란, 이라크, 북한 등에서 행한 일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세계인권선도국’을 자처하는 미국, 매년 국무부에서‘세계인권보고서’를 발행한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며, 미국의 국가기관이나 군대에서 행한 일들이다.

이미 슐츠(Schoultz)는“미국의 인권외교는 '이중잣대'에 의해, 인권침해의 심각성이라는 기준보다 자국의 이익,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국민들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정권의 이익'에 따라 결정되고 집행”되었다고 1981년에 이미 지적했다. 이 지적은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계속되는 것인가? 국가안보와 인권은 정말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21세기 인류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보편적 사조와 제도를 들라고 하면 누구나 인권을 생각할 것이다. 그만큼 인권은 정치체제나 이념을 넘어선 보편적 가치로 자리잡힌 것처럼 보였다. 아니, 우리는 도넬리에 의해 처음으로 도입된‘인권레짐’을 이야기하며, 인권은 인간의 기본권리로서 어떠한 형태의 국가주권보다도 우선한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미국의 일련의 행보들을 보며 ‘국가안보, 냉정히 말하면 국가안보로 포장된 국가이익’이라는 목적을 위해 타국인의 인권을 희생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며, 인권과 국가안보는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다시금 제기하게 된다. 아니 이제‘인권’은 보편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소극적 방어권의 개념을 벗어나 국제정치에서의 강력한 또 하나의 ‘무기’로 변질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든다. 헨더슨의 말처럼 ‘국가이익이라는 개념이 인권분야에는 정녕 적용될 수 없’는 것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한 방향으로만 휩쓰려 가지 않는 희망적인 미국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2006년 6월 29일 쿠바 관타나모 미군 수용소에 있는 테러 용의자들을 부시 대통령의 지시로 설치된 군사위원회에서 재판을 받게 한 조치는 “미국 헌법, 미국 법, 국제협약에 모두 위배된다”는 미 연방 대법원의 판결, 그리고 2006년 6월 27일‘국기모욕에 관한 수정안(Flag Desecration Amendment)’, 일명 성조기법이 헌법상 의사표현의 자유의 침해라며 미국 상원에서 아슬아슬한 표차로 부결된 것, 이러한 모습 속에서 필자는 국가안보와 인권의 양립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본다.

위와 같은 미 연방대법원의 위헌판결과 상원의 성조기법 부결의 근원은 그동안 미국 사회 내에서 성숙된 민주주의의 토대 속에서의 최소한의 도덕성의 발현일 것이다. 미 연방대법원에서 보수로 분류되었지만 사안에 따라 소수자 보호 등에 찬성표를 던져 인권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던 산드라 오커너(Sandra D. O'Connor) 전 대법관이나 앤서니 케네디(Anthony M. Kennedy) 대법관에게서, 그리고 단 1표라는 귀중한 차이로 의사표현의 자유를 존중한 미국 상원에서 희망을 본다.

‘민주주의의 확산’을 모토로 하여 ‘세계 각국의 인권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미국의 일련의 움직임 속에서 이러한 최소한의 도덕성의 발현을 통해 ‘민주주의의 확산’과 동시에 ‘민주주의의 강화’의 기본조건인 ‘인권 보호’의 노력이 더욱 높아지길 기대한다.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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