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은 죽었습니다

김광석의 노래가 보고싶습니다.

검토 완료

정기석(tourmali)등록 2006.06.12 19:42
느닷없이, 김광석의 노래가 보고싶어졌습니다.

비록, 김광석은 죽었습니다만...


1.




그래 ! 김광석은 이제 잘 자리잡고 흙처럼 누웠을 것이다. 넋놓고 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염려하지 말자. 산 자와 죽은 자의 처지는 마주치기에 서로 불공평해보이지만, 그는 이제 더 할말이 없다니 그냥 일방적으로 지나간 얘기를 떠들어보자.


몇년전 김광석이 몹시 미웠다. 약한 저주에 가까울 정도였다. 아마 지난 대선때였을 것이다. 그때 몸과 마음이 힘든 사람들은 무수했다. 드디어 나쁜 놈들의 치졸한 시절을 끝장낼 수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그게 실현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하고 방정맞은 예감이 자꾸 들어, 희망처럼 날로 커지던 나날이었다. 그게 정말 희망인지 결판나기까지 남은 날은 하루가 1년같아 너무도 가혹했다. 시시각각이 애절한 단말마의 고비였고 승부처였다. 혹시 만의 하나라는, 변수의 악마를 물리치는 데 온 신경을 몰아치던 나날이었다.


그럴 때 노래가 힘이 된다고 믿는다. 사람이 사람의 의지와 이성따위로 견디기 어려운 격정의 처지에 놓일 때, 마땅히 가슴이 뻐개지도록 꿈틀거리는 격문이라든가 목이 터져나가는 힘찬 노래가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큰 힘이 돼주기를 바랬다.


마침 김광석은 죽고 없었다. 힘없는 김광석의 노래테이프만 지직거렸다. 그는 그때만큼은 살아있었어야 했다. 그 노래를 하고싶든 하고싶지 않든, 그 사람을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그건 힘든 사람들이 우선 결정할 문제였다. 그렇게라도 누군가에게 떼를 써대야 힘 좀 덜 사람들이었다.


달랑 가수를 따라 죽게 마련인 노래 몇소절만 이승에 내팽겨치지 않았다면, 먼저 죽어 널브러지지 않고 그의 노래처럼 굳게 살아있었다면, 힘들었던 사람들이 많이 모인 그때 그 광장에서 기꺼이 힘찬 노래들을 불러제꼈을테고, 그랬다면 그게 얼마나 사람들에게 힘이 되었을까 하는 치미는 야속함을 누를 수 없었다.


그 노래들을 술처럼, 약처럼 받아먹고, 힘이 나 다시 싸움터로 나갔을 힘든 사람들은, 그때 그런 심정이었다. 그래서, 힘든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무심한 자식, 자기만 알고, 결국 자기때문에 스스로 죽어나자빠진 자식,김광석이 몹시 미웠다. 그때, 만의 하나 원치않는 결과를 감당해야 했다면, 최소한 나는 김광석을 다시 이승으로 불러내지 않으리라 마음 먹기도 했었다. 미운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면 족하다. 서로, 아무 영문도 모르고 주고받게 되는 그런 미움은, 이제 없다.




2.

천구백팔십년대대 중반쯤, 민족적 음주가무 및 민주적 고성방가 특성화대학 ㄱ대앞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김광석은, ㄱ대학 앞, 제기시장쪽 사거리 모퉁이 허름한 건물 2층쯤에서 ‘고리’라는 다락방같은 까페를 하고 있었다.


나는 천구백팔십이년 그 대학에 Planet Earth를 탐구하려는 척 위장한 채 잠입한 이후, 평소에는 주로 ㄱ대학 반경 백여미터를 벗어나지 않으며 단골술집에만 서식중인 선량한 주민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전투같은 운동회날마다는 교실이나 도서관에 들어가기 싫어하고 그렇다고 당구나 오락은 하기 싫어하는 무위스러운 학생술꾼들의 반체제 지하 비밀결사 음주친목회 ‘백수구락부’를 조직한 회장 신분이었다. 아마도 사람사는 세상으로 가는 혁명의 돌파구를 '술'을 동반한 에스쁘리에서 찾아보겠다며 우기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김광석은 술집 주인으로, 나는 술집 손님으로 만난 셈이다. 나이도, 학년도 같았을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김광석은 ㅁ대 팔이학번의 신분이었다. 첫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나이도 어린 놈이, 그것도 학생 주제에, 술집을 해?' 정도 였을 것이다. 게다가 안색조차 그나 나나, 다정하거나 온화한 쪽이 아니었다. 오직 '어린 학생주제에 술집을 해' 이미지의 김광석을, 그 ‘아름다운 청년가수 김광석’으로 알아모시기까지는 많은 분초가 필요하지 않았다.


당시 학교앞 작은 카페의 운영 메카니즘이 대개 그렇듯이, 술잔이 두서없이 좀 돌면서, 자연스레 술집 주인과 손님의 경계조차 어느덧 허물어질 무렵, 김광석이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제낀 것이다. '그루터기'였다. '노래를찾는사람들' 1집으로나 들어봤지 방송이나 시중에선 들어보기 어려운 그 노래였다. '아니, 어린 학생 술집 주인 주제에 저런 훌륭한 노래를 어떻게 알고, 또 왜 저리도 잘 부르지?'가 내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 노래를 부른 장본인이 바로 그 '어린 학생 주제에 술집을 하는' 김광석이라고 누가 귀띔해줬다. 그리고 보니, 그 노래의 목소리가 바로 이 노래의 그 목소리, 맞았다.


직후, 나는 그와, 그의 술집과, 그의 노래를 무조건 좋아하기 시작했다. 결코, 먼저 아는 척 하거나 친구하자는 소리 하지 않는 나의 괴상한 사회성으로 인해, 술집 주인과 손님의 관계를 뛰어넘어 얼마든지 말 트고 친구 삼을만한 여건이 충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나의 관계는 단지 그 정도 선에서 그치고 말았다.그런데, 딱 그 정도가 좋았다. 어디, 내 인간세에 그런 관계에 놓인 자들이 한둘이던가.


두번째는, 그때의 술집 손님중 한 친구의 결혼식때 영락교회에서 축가를 부르는 김광석이었고, 세번째는 대학로 학전소극장으로 공연하러 걸어가는 통기타만큼 왜소하게 찌그러진 김광석의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김광석은 서둘러 죽었고, 나는 묵은 외상술값을 더 이상 갚지 않아도 됐다.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봄날, 故 김광석의 무덤을 기어이 찾아가고 싶다. 가서, 처음 마주치는 행인인 척하고, 외상 술값 만큼 막소주 한됫박을 되돌려주고 와야겠다. 그런 짓을 죽은 김광석이 좋아할지 안할지는 상관없다. 오로지 살아있는 내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면 되는 일이다. 단지 그리하고 싶으니 이번에는 나를 좀 내버려두라. 그리고보니, 김광석은, 정말 죽었다. '너의 노래'만 이승에 홀로 내팽개친 채.

ⓒ 2007 OhmyNews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