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언어의 연애로 들어가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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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암(bluewind65)등록 2005.12.16 10:12
사진과 언어의 연애에 들다

-이성복 사진에세이『오름 오르다』(현대문학)


'오름'이란 제주화산도상에 산재해 있는 기생화산구를 말한다. 쉽게 말하면 화산 지형인 제주도에 있는 자그마한 산 혹은 구릉을 가리키는 말이다. 화산 폭발 이후 생겨나는 용암이 굳어지며 만들어지는 형세가 완만한 산이 바로 오름이다. 이 오름이 제주 출신의 고남수라는 젊은 사진작가에 의해 멋진 예술 작품으로 재 탄생했다. 현재 제주관광대학 사진과 교수인 고남수는 2001년 갤러리 룩스(서울)와 제주아트에서 [오름 오르다]라는 개인전을 가졌다. 흑백으로 처리된 고남수의 개인전 포스터를 본 이성복 시인이 제주도로 건너가 사진작가의 안내를 받으며 오름의 실재를 눈으로 담게된다. 그래서 고남수의 흑백사진 오름과 시인 이성복이 읽어낸 오름 이야기가 2004년도 월간『현대문학』에 일 년간 연재가 되었다. 이 내용물이 단행본으로 묶여진 것이 『오름 오르다』라는 이성복 사진에세이집이다.

제주도 지역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상의 그 오름들을 젊은 사진 작가의 눈으로 찍어낸 오름 사진 스물넉 장을 갖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흑백의 그 선택된 앵글 속으로 들어가 나는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면서 골치 아픈 세상살이의 일들을 잊고 한 마리 새처럼 오래 자유로웠다. 거기에다 시집 『뒹구는 돌은 어제 잠을 깨는가』와 『남해 금산』으로 우리 시대 한국의 대표적 시인인 이성복의 산문이 더 보태어진 『오름 오르다』를 읽는 즐거움은 각별하다. 시인 황지우와 함께 이성복은 필자와 같은 사십대 초반의 시인들에게는 시의 원적지와도 같은 시인 아닌가.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사물, 기억, 존재라는 비밀을 풀어가는 예민한 시인의 상상력의 진국을 맛볼 수 있다. 고남수의 흑백 오름 사진 스물넉 장을 통해 펼쳐진 스물 네 꼭지 글 마당 몇 군데를 소개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또한 예술은 삶이 꿈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또 다른 꿈이며, 근본적으로 폭로하는 자신까지도 꿈임을 인정하는 마지막 꿈일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결단코 삶이라는 꿈에 속지 않고 꿈인 자기까지도 속이지 않겠다는 마지막 노력이며 자존심인지도 모른다."
-「긁어 부스럼 다시 긁기」중에서

"비스듬히 올라가다가 자시 숨을 고르고는 선뜻 뚜렷한 각을 이룬 다음 직선으로 쏠려내려가는 화면 속 검은 오름을 보노라면, 신비란 응축과 탈색의 결과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고 보면 어둠의 외피를 발가벗기는 완전한 빛은 저와 같은 신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빛은 사물의 표면을 편애함으로써 심층을 은폐한다. 하지만 새벽과 저녁의 어스름, 반쯤의 밝음과 반쯤의 어둠은 숨겨진 심층을 표면으로 불러들임으로써 표면과 심층의 분열을 무화시킨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미명의 공간에서 선線은 면이고, 면은 입체며, 입체는 또한 곡선이다."
-「내재와 즉물의 신비」중에서

"따지고 보면 강이라는 것도 땅 위의 물이 지나가는 길이다. 세상의 모든 강이 강과 지형의 공모共謀이듯이, 인간의 길 또한 인간과 자연의 대화로 생겨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화면에서 한 줄기 강을 연상시키는 흰 길은 또한 푸른 하늘에 제트기가 지나간 자국처럼 선명하다.…둥근 봉분을 가운데 두고 사각으로 검은 돌담을 쌓아올린 제주의 무덤들은 오름의 등때기에 강제로 새긴 투박한 문신이라고 할까. 여러 개 주사위를 흩어놓은 듯한 그 눈알 모양의 무덤들로 인해 트림처럼 낮은 오름은 천조각을 이어붙인 선사禅師들의 누더기 옷을 연상시킨다.…말이 침묵을 통해 깊어듯이, 길은 보이지 않음을 통해 아늑함과 아득함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길의 중간에 돋아나 느닷없이 길의 진해을 가로막는 나무들의 검은 둥치는 풍경을 난자하고 유린하는 길의 전횡을 제지하는 쐐기와 같다."
-「외줄기 흰 길의 은유」중에서

이성복 사진에세이『오름 오르다』(현대문학)는 사진 예술과 언어 예술의 행복한 그리고 멋진 연애를 한껏 보여주고 있다. 저들의 연애 속으로 들어가는 독자들은 진정으로 행복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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