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위험하게도 정운영의 훼절을 이해할 것 같다

'TV스타'로 여겨졌던 마르크스경제학자, 그는 나에게 누구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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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lolla)등록 2005.10.14 18:14
아마 3년 반전쯤이었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나와 일행은 우리시대의 논객들을 하나하나 생각나는 대로 호출하여 상찬의 대상과 술안주꺼리로 분류하는 발칙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대체로 의견은 비슷하게 모아지는 편이었는데, 화두가 ‘정운영’으로 가자 분위기가 묘해졌다. 나는 정운영에 대해, 옮겨놓기도 껄끄러울 만큼, 단칼에 평가를 내렸다. 나보다 5년 연상으로 현재 어느 인터넷 신문에서 학술과 과학을 담당하고 있는 ㄱ형이 대답했다:“수민씨가 우리랑 연배가 달라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 같아.”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이내 하나같이 그즈음의 정운영을 우려하고, 비판했다.

하기야 내가 정운영을 처음 본 것은 나이 열아홉이던 시절 에서였다. 그해 봄은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으로 뜨겁기 그지없었다. 그 와중에 <백분토론>에 김기식, 정대화, 장원씨와 정동영, 이사철, 이양희 의원 등이 출연했고, 반응은 뜨거웠으며, 프로그램도 덩달아 떴다. 아마도 일요일이던가, 그 토론은 재방송되기까지 했다. 월요일에 학교를 가니, 친구들이 입시스트레스를 잠시 잊고서 ‘음모론자’들을 비난하였던 기억이 난다. 논술을 ‘심도깊게’ 준비하는 아이들의 상당수는 <한겨레21>의 애독자이자 <백분토론>의 애청자였다. 자연히 토론 진행자 정운영이 화제에 올랐고, 우리들은 그에게 큰 호감을 가졌다. 그러니까, 그에 대한 내 첫 기억은 긍정적이었던 것이다.

큰, 아니 그의 말대로 ‘길쭉한’ 체형, 깐깐하면서도 편안하고, 왠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합리적일 듯한 분위기, 위엄 있는 음성, 서구인 같은 제스처, 방관하는 듯 날카로운 진행······. 정운영의 생애를 잘 알았던 사람에게는 웃기게 들리겠지만, 나한테 정운영은 ‘논객’이기보다 ‘TV 스타’였다.

나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인물과 사상>의 ‘지난 호 목차’에서 정운영의 이름을 발견했다. 강준만의 비판이었다. 도서관에서 그 글을 읽었지만, 이제는 흐릿하게 떠오를 뿐이다. 대강의 내용도 굳이 재론하고 싶지는 않다. 강준만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정운영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강준만의 정운영비판을 ‘좋은 사람이 다른 좋은 사람에게 더 잘하라고 충고하는 것’쯤으로 결론했다. 나는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 특히 지식인은 드물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모처럼 괜찮다는 인상을 준 사람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 않았다. 해결방식은 달라졌지만 지금도 얼마간 그렇다.

그러나 나는 정운영에 대해 냉소적인 평가를 내리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만다. 계속 웃기는 이야기를 풀어서 미안하지만, 나는 정운영의 저서 중 단 한권도 정독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가 견지한 마르크스경제학을 잘 모른다. 아니, 마르크스경제학자였다는 사실조차 <백분토론> 하차 후에야 알았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정운영은 모호해 보였다. 그러나 그 모호함은 불안함을 견디며 긴장하는 ‘회색분자’의 모호함이라기보다는, 그저 ‘편안함’일 뿐이었다.

2001년 대학에 입학하고 만난, 4년 연상의 ㅂ이라는 선배는 지난해에 있었다던 정운영의 강연에서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며 극찬을 했다. 정운영이라는 지식인이 도대체 무슨 실질적 활동을 하고 있는지 꽤나 의심스러워하던 나는 소극적으로나마 거부감을 내비쳤고, 이에 그 형은 지지 않고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운동이라고 이야기하더라.”는 정운영의 발언을 소개했다. 민족해방계열을 마뜩치 않아 하던 내게 더욱더 거부감이 드는 소리였다. “전 그런 뻔한 이야기나 하는 분은 좋아하지 않아요.” 때는 바야흐로 언론사 세무조사 정국이었고, 언론개혁여론 및 안티조선과 조선일보 및 언론족벌의 전선이 뚜렷하게 형성되던 시점이었다. 또한, 기회주의적 지식인들의 행동을 목도하며 어금니를 꽉 깨무는 횟수가 늘어나던 나날이었다. 당시, 정운영은 중앙일보 논설위원이었다.

나는 정운영이 중앙일보에 가는 것을 나쁘게 평가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에게 기대한 바가 없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한 성향의 필자를 영입함으로써 중앙일보가 점차 수구색에서 탈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안 그래도 고3이던 2000년도에 겁 없이 오마이뉴스에 ‘조선일보 반대를 위해 중앙, 동아일보를 활용하자’는 기사를 썼던 참이었다(그 전략은 다시 새울 수도 없고 새워서도 안 되겠지만, 그즈음의 그 판단이 글렀던 것은 아니라고 자평한다). 하지만, 견인된 것은 중앙일보가 아니라 정운영이었다.

물론, 매력적인 칼럼이 몇 차례 실렸다. 내 뇌리에 가장 또렷이 새겨진 글은 <프라하는 봄이었다>이다.

(전략)자유란 참 묘한 것이어서 한번 맛들이면 좀처럼 끊기 어렵다. 바츨라프 하벨을 위시한 민주화 인사들은 작품과 무대에서 줄곧 프라하의 봄을 풀무질했고, 스웨덴 한림원은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줌으로써 잊혀진 봄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과 연대를 부추겼다. 나치의 학생 학살 50주년 기념일을 맞아 대학이 휴업과 시위를 결정한 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 민중은 공산당 체제에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에 극장들도 동조했는데 이것이 '벨벳 혁명'의 발단이었다. 혁명은 거리의 폭력이 아닌 극장의 우단 의자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벨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둡체크는 연방의회 의장으로 복귀했다. 봄에서 벨벳으로! 20년 방랑 끝의 멋진 복수였다.(후략)

별다른 현실적 함의도, 강한 주의주장도 드러나지 않는 이 글에 나는 흠뻑 빠졌다. 우아하고도 격정적인 벨벳혁명에 취했다. 그렇지만 이 단순한 독자의 피를 타고 빠르게 흘러간 것은 정운영의 문체였다.

마르크스경제학자 정운영의 에세이에서는 어쩐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냄새를 팍팍 풍겨야 할 것만 같은데, 나의 예상 내지 기대는 기분 좋게 배반당했다. 나는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그를 조회했고, 주변에 그에 관해 좀 더 물어보고 다녔다. 정운영의 별명은 ‘와인에 심취한 마르크스주의자’.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자가 마르크스주의자답게 살지 않는 것을 몹시 불편해했다. 허나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와인에 마시면 안 되나?’, ‘와인을 부르조아의 전유물로 취급하는 발상이야말로 가소롭지 않은가?’라는 의문에 빠졌다. 그리고 점점 나는 그 편으로 기울어졌다.

정운영이 돌아간 9월 24일, 나는 한 인터넷 웹진의 기획회의에 참석했었다. 기획위원 중에는 구면인 사람들도 있었는데, 처음에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2년간의 군복무 탓이었겠지만, 또 ‘모습이 달라졌다’는 표면적 이유도 있었지만, 내가 주변부 인간이어서 그런 탓은 있지 않을까 사료했다. 오해말길, 난 딱히 많은 고생을 살아본 사람도 아니고, 사회운동에 엄지발가락 걸친 후로도 아주 자잘한 고생 몇 번 했을 뿐이다. 하지만 집단으로, 중심부로 스며들고 섞여드는 데에는 천성적으로 젬병이었다.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바지에 체인을 걸친 차림으로 안 어울리게 <민족21>을 -심심풀이로- 읽으며 아직 오지 않은 기획위원들을 기다리던 나는, 그날 회의에서 쏟아진 온갖 과학적 분석 앞에서 졸지에 ‘문화주의적’, ‘사회심리학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의 논의를 끄집어냈던 나는, 속으로 잠깐 이렇게 생각했다:‘혹시 정운영도?’

김진균 교수 별세 이후에 그렇게 언론이 눈에 띠게 ‘궃긴 소식’을 나르며, 부음기사, 추모글을 싣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찬사가 쏟아졌다. 나는 하나하나씩 읽었고, 그후 정운영을 잊었다. 그러던 차에 어떤 친구가 모 게시판에서 정운영을 두고 벌어진 논쟁에 참여한 걸로 가정한 채 항의성 문자를 보냈다. 나는 처음 듣는 소리에 황당해하면서 화를 냈고, 그 친구는 꼬리를 내리며 사과했다.

논쟁의 내용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난 ‘정운영’이 궁금하다. 10월 13일 오후 <인터넷한겨레>에는 안수찬 기자가 작성한 <정·운·영, 우리시대 논객을 위한 비망록>이 올라왔다.


새 경영진이 들어선 99년 초부터 ‘이번 기회에 몇명 남지 않은 비상임위원들을 모두 해촉한다더라’는 소문이 돌았다. 창간을 함께 했던 이들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하반기 들어 일부 비상임논설위원들이 스스로 사표를 썼다. 비상임논설위원 가운데 제일 마지막으로 정운영도 사표를 썼다.

<한겨레>의 한 논설위원은 “그러나 그 배경에 정 위원에 대한 사내 일부의 좋지 않은 감정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86년, 정운영은 다른 교수들과 함께 ‘학내 투쟁’을 벌였다. 신학부 중심의 대학운영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학장 불신임안을 교수회의에서 통과시키려다 불발에 그쳤다. 그는 김수행 교수와 함께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정운영이 대학에서 나오던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뒤이어 여섯달 동안 계속된 거대한 물결 속에서 그는 마땅히 둥지를 틀 곳이 없었다.

그는 평생 경제문제와 씨름했다. 글 속에는 한국경제를 담았지만, 실제로는 가정경제를 고민해야 했다. 가산을 탕진한 부친 덕에 그는 가난을 끼고 살았다.

그는 1983년 위암 수술을 받았다. 위를 거의 다 들어냈다. “원래 기골이 장대했는데 수술 이후 그렇게 마르셨다는군요.” 윤소영 교수의 말이다.

정운영은 <중앙일보>에서 사설을 쓰지는 않았다. “신문사도 그렇고 당사자도 그렇고 서로 (사설을) 안쓰는 쪽으로 양해했다. 그래서 정 선생의 심적 부담이 덜했을 것”이라고 정 전 심의실장은 전했다.

윤소영 교수는 “386세대를 비롯해 이른바 민주화 세력에 대한 서운함이 말년에는 굉장히 깊었다. 오해의 소지가 많은 칼럼을 쓴 것은 학문적 판단 외에도 그런 정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김수행 교수는 “민중, 그리고 민중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에 대한 회의를 많이 품은 것 같았다”며 “지금까지 지켰던 신념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까왔다”고 말했다.

혹시나, 혹시나 했다. 그에게도 ‘달의 뒷면’이 있었다. 주류매체에서 활약하며 대중적 지식인으로 각광받아온 그는 실은 계속 내몰리고 있었다. 그 내몰림은 또 그를 주류화·우경화시켰다. 선뜻 이해할 수도, 그렇다고 못 본 척할 수도 없는 생애였다. 부인의 전언이다: “그 분한테는 한겨레에서 중앙으로 옮긴 게 아주 아주 큰 일이었어요….” ‘큰 일’이라는 것은 그를 아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큰 일’이 어떤 뜻에서의 ‘큰 일’인지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부음후속기사를 모니터에 띄우고 스크롤을 내리며, 별 일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평범한 대학생인 나는 모든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말년에 쓴 칼럼들을 찾아 읽으며 짜증을 내면서도, 정운영을 ‘선생’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선생에 대한 못마땅함이 녹아내리고 있다. 너무나 위험하게도, 나는 선생이 말년에 보인 훼절을 이, 이해, 할, 할, 것, 같,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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